빌딩 로비에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했다. 층층이 박혀있는 꼬마전구가 연말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출근하던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오수아도 셀카를 찍다가 김선형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갔다.
“김 선배!”
오수아가 출근하는 김선형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 해? 안 올라가고.”
김선형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사진 한 장만요. 아직 시간 있어요.”
오수아는 김선형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섰다. 토트백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녀의 크림색 울코트에 달린 금색 단추가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빛났다. 김선형은 구도를 잡고 귀찮은 듯 몇 컷을 연속해서 찍었다.
“출근 시간이 그렇게 한가해요?”
김선형의 뒷덜미로 쌀쌀맞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뒤돌아서자 채 상무가 블루종의 깃을 세우며 지나갔다. 김선형은 오수아에게 핸드폰을 던지다시피 하고 재빨리 걸어갔다.
“선배 같이 가요!”
오수아가 김선형의 뒤를 쫓아갔다.
건너편에선 세라가 커피를 들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랫배가 묵직했다. 트리에 숨어 반짝이는 전구들이 하나같이 모스부호처럼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의사는 지난 검사 때 보다 혈중 난포 자극 호르몬 수치가 증가했다고 했다. 얼마 전 생리혈이 보여서 내심 기대하고 의사에게 물었는데 폐경 전후로 하혈이 있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리가 아니라 하혈이라고…….
점심시간이 지나고 세라는 여느 때처럼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화장을 고쳤다. 골반을 쿡쿡 찌르는 통증이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허리를 구부려 배를 부여잡았다.
“팀장님, 왜 그래요?”
립스틱을 바르던 오수아가 거울 속 세라에게 물었다.
“아, 으흠…… 괜찮아.”
세라는 힘겹게 허리를 펴고 옷매무새를 만졌다.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을 때 또다시 아랫배를 쥐어짜는 고통이 뒤따랐다. 허리를 구부리고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자리에 멈춰 섰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온기 같은 것이었다. 눈물이 흐를 때 따뜻하게 내리긋는 한 줄기 선 같은, 그런 곧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아래로, 아래로 자꾸 내려갔다.
“악!”
뒤따르던 오수아가 비명을 질렀다. 세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 위로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종아리를 타고 붉은 도랑이 새겨졌다. 카펫에 핏자국이 벌겋게 번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수, 수…….”
입안이 바짝 말라 이름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팀장님! 피…….”
오수아는 칫솔을 들고 질겁했다. 다른 직원들도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봤다. 세라는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복도가 어수선해지자 김선형이 전화를 끊고 뛰어나왔다. 허리를 굽은 채 서 있는 세라를 자리로 데리고 갔다.
“괜찮아요?”
김선형이 응급차를 부른다고 하자 세라가 말렸다.
“나, 다니는 병원이 있어.”
김선형이 세라를 데리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떠나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채 상무가 유리창 너머로 기획팀을 지켜보다가 이마를 찌푸리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세라가 잠에서 깼을 때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커트 아래 종아리로 시선이 갔다. 혈흔도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오면서 정신을 잃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파란 셔츠를 입은 아빠의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설 때 말끔했던 아빠의 젊은 얼굴 그대로였다. 세라는 아빠의 무릎을 베고서 파란 셔츠의 소맷단을 꼭 쥐고 있었다.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팅커벨.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문자가 여러 개 있었다.
-팀장님, 깨어나면 생존 신고 좀 해주세요.
김선형의 문자였다.
-집에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는데 친구분 전화가 와서 병원이라고 말했어요. 혹시 보호자가 필요할지도 몰라서요.
세라는 통화목록을 뒤졌다. 김선형이 누구와 통화했다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손톱만 물어뜯었다. 오수아의 문자도 연달아 들어와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수군댄다고 했다. 혹시 임신했냐며 묻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놀이를 기대했다. 마른 수풀 더미에 누군가 불씨만 던지기를, 그 작은 불씨가 여기저기 날아올라 주위가 활활 타오르기를. 노화가 진행되고 증세가 나타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응급실에 와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이런 일이 매번 반복될지도 모르고. 세라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소문이 현실이었으면 어땠을까. 정말 아기를 가졌더라면. 그런 소문조차도 한낮 바람으로밖에 품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임신을 했더라면.
한 여자가 응급실 문을 열고 침대마다 돌면서 사람을 찾았다. 세라는 금방 그녀를 알아보고 손짓했다.
“영지야, 여기.”
영지가 목에 두른 도톰한 목도리를 풀면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세라는 김선형이 말한 친구가 강호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생리통이 심해서…….”
“전에도 그랬니? 의사는 뭐래?”
“어? 어, 뭐, 스트레스 그런 것 때문이래. 수액 다 맞으면 가도 된대.”
"스트레스?"
영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거의 바닥까지 내려간 수액을 보고 간호사를 불렀다.
다음날, 세라는 출근하면서 로비에 있는 대형트리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제 일을 물을 것 같았고 뭐라 해야 할지 막막했다. 복도 카펫에는 혈흔을 없앤 흔적이 남아있었다. 오수아가 괜찮냐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아주 말짱해.”
세라는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세라는 어느 때보다도 지쳐있었다. 점심시간이 다되어도 채 상무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블라인드도 그대로 내려져 있었다. 채 상무의 호출이 늦어질수록 쓸데없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책상 달력에 눈이 갔다. 임원 조찬회의, 힐튼, 포세이돈 홀. 세라는 채 상무의 회의 일정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김선형과 오수아를 데리고 파스타 집에 갔다. 어제 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월든에 들러 따뜻한 커피도 하나씩 들고 올라왔다.
“그래서, 유세라 팀장님은 임신한 게 맞대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려다 세라는 다시 변기 위에 앉았다.
“글쎄, 그렇다는 얘기도 있고. 사귀는 사람이 있었나?”
“근데 미혼모도 출산 휴가, 육아휴직 이런 거 다 받을 수 있어?”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인기척에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게 왜들 궁금하지요?”
채 상무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하며 핸드 드라이어가 멈추기도 전에 나갔다. 세라는 채 상무의 힐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계속 앉아 있었다. 종일 죄지은 사람처럼 채 상무의 호출을 기다렸다. 퇴근 때까지도 채 상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지만, 거리는 한산했고 어디서나 들리던 캐럴송도 조용했다. 자선냄비를 세워놓은 구호단체도 현저히 줄었다. 잦은 눈 소식에 사람들의 발걸음만 동동거릴 뿐 연말 분위기는 차분했다. 세라는 당분간 강호와 함께 퇴근하기로 했다. 응급실에 간 이유를 묻는 강호에게 세라는 빈혈이라고 둘러댔다. 세라가 늦게 끝나는 날이면 영지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영지는 세라와 강호가 카풀 한다는 얘기를 듣고 가는 길에 내려달라며 종종 합석했다.
주말에 내렸던 눈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도로는 질퍽했고 사람들의 발자국이 지저분하게 도로에 남았다. 기온도 영상으로 올라가 크리스마스를 앞둔 사무실 분위기는 모처럼 활기찼다. 세라만은 경직된 표정으로 책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채 상무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채 상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자리로 돌아온 세라는 아무 말이 없었고 사무실은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선형은 눈치를 보며 말을 걸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저, 팀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나, 사직서 냈어.”
“네?”
김선형과 오수아는 입을 벌린 채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
세라가 제주 공항을 빠져나왔다. 2번 게이트 앞에 있을 거라던 셔틀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교회 이름이 적힌 버스 몇 대가 대기 중이었고 끝으머리에 '천사'라고 쓰여있는 현수막이 언뜻 보였다. 세라는 그곳으로 갔다. 캐리어를 끄는 손이 시렸다. 현수막을 단 버스에 천사 렌터카란 글씨가 커다랗게 보였다.
짐을 싣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애월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보자 제주도에 온 게 실감 났다.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인수하고 내비게이션에 펜션 주소를 입력했다. 애월읍은 카페 신축 공사로 땅이 파헤쳐 있거나 앙상한 골조만 드러낸 데가 많았다. 복잡한 땅과 맞닿아 있는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꽉 차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바닷바람이 금세 밀려들었다. 월정리 숙소까지 30분 정도 거리였다. 김녕에서 월정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에는 풍력발전기가 눈길을 끌었다. 거대한 인공물은 자연의 한 부분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한적한 밤이 되면 바다에서 육지로 성큼성큼 걸어 나올 것 같았다.
월정리와 가까워질수록 하늘빛이 탁해졌다. 사직서를 냈을 때 채 상무의 얼굴처럼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았다.
“그 소문 때문에 이러는 건가? 사실이라도 그게 뭐가 문제지?”
세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개를 들었다. 채 상무는 독선적이고 속내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소문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날이 무색할 정도로 채 상무는 사생활이라며 일축했다. 일순간 세라에게 한 편이라는 연대감이 솟구쳤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힐을 고집하는 것도,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방식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지방 출신인 그녀가 해외파 임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건, 길고 가느다란 힐에서 나오는 마법의 힘이었을 것이다. 채 상무도 그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직원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 날은 화창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김선형의 농담이 없어서 좋았고, 웃을 일이 없는 아침이어서 좋았다. 배웅하는 팀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마지막이 쓸쓸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세라는 팀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짐을 챙겨 나왔다. 김선형이 따라 나오며 짐이 든 상자를 대신 들었다. 오수아가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송별회는 언제 할 거냐고 계속 물었다. 세라는 눈치 없지만, 때때로 흥이 많은 오수아도 그리울 것 같았다.
정임은 출장을 간다고 했더니 그대로 믿었다. 일 년에 서너 번은 가던 출장이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라는 무작정 떠나고 싶었고 그곳이 낯선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곳, 그런 곳이면 됐다. 숙소는 월정리 해변까지 걸어서 5분이면 될 만큼 가까웠다. 키 작은 주황색 대문 안으로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펜션은 넓은 마당을 끼고 두 개의 독채가 마주 보고 있었고 마당 한 편에는 캠핑카 모형의 미니버스가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그네 의자가 바람에 조금씩 삐거덕거렸다. 안채에서 여자가 나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예약한 사람인데요.”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여자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핸드폰으로 예약자 명단을 확인했다.
“유세라 씨, 맞나요?”
“네.”
여자를 따라 마당으로 난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제법 넓은 거실에서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저희는 안채를 쓰고 있어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여자가 세라에게 방 비밀번호를 건넸다. 펜션 홈피에 올라온 리뷰처럼 주인 여자는 생글거리며 친절했다.
“저기, 캠핑카 좀 구경해도 되나요?”
세라가 마당에 있는 미니버스를 내려다봤다. 여자는 구경뿐 아니라 소품 구매도 가능하다고 흔쾌히 말했다. 먼저 내려간 여자는 패딩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어느새 대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캠핑카 안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 찼다. 미니카부터 모형 비행기, 캔들, 손수건, 핸드메이드 지갑같이 소품으로 즐길만한 아이템들이었다. 뜨개로 된 다용도 케이스도 보였다. 정임도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뜨개질하고는 했다. 계절을 타는 목도리는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비해 사용가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세라가 구시렁대면 정임은 뭐든 공들인 만큼이라며 두툼한 목도리를 목에다 둘러주었었다.
세라는 손뜨개로 된 지갑을 만지다가 뭔가 생각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시간을 담은 아름다움’
봄 신상의 타깃 문구로 흠잡을 데 없었다. 핸드폰 열고 김선형에게 간략한 메모를 쓰다가 멈췄다. 순간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천천히 둘러보다 벽에 걸린 드림캐처에 눈이 갔다. 흰색 깃털이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렸다. 누군가의 기도에 화답이라도 하는 걸까.
“그거, 발리에서 온 거예요.”
세라가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섰다. 낚시 조끼를 입은 남자가 진열장에 새 소품들을 채워 넣고 있었다.
“발리요?”
“여행 중에 원주민한테 산 거예요. 잘 때 머리맡에 걸고 자면 좋은 꿈을 꾼다네요.”
세라는 흰 깃털이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가 주술을 외우는 듯했다.
“이것도 파는 건가요?”
“그럼요. 이쁘죠?”
남자가 드림캐처를 공중에 들어 올렸다.
“이게 말입니다. 원래 인디언한테 유래된 건데, 나쁜 꿈을 꾸면 여기, 여기 있죠.”
다시 원형 틀 안에 있는 그물을 가리켰다.
“여기 그물에 나쁜 기운은 걸러내고 좋은 기운이 이 깃털을 타고 내려가서 사람에게 스민다고 해요. 그래서 잠잘 때 머리맡에 걸어 두라고 하더군요.”
남자가 세라에게 들어보라고 드림캐처를 내밀었다. 세라는 그것을 들어 올리고 신기해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깃털이 춤을 추었다.
“정말…… 그럴까요?”
펜션은 평일이라 세라 말고는 다른 투숙객은 없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펜션 부부는 세라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안채 현관 벽에는 사진 액자가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파리의 에펠탑, 교토의 청수사, 빅토리아 항구에서 찍은 홍콩의 야경, 장소는 달라도 부부가 손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는 포즈는 한결같았다.
세라가 사진에 관심을 보이자 주인 남자는 최근에 오사카를 여행했다며 대형 글리코 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부부는 갓 결혼한 커플처럼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주인 여자가 김이 나는 수제비를 잔꽃 무늬가 가득한 자기에 담아왔다. 부부는 끊임없이 여행 이야기를 했고 식사가 끝난 후에 세라와 테라스로 나가 차를 마셨다. 외부의 찬 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씌어놓은 투명한 우레탄 창이 테라스를 감싸 분위기가 아늑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골드 장식 볼이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였다. 주인 여자가 유튜브에서 재즈 음악을 틀고 향초에 불을 붙였다. 쳇 베이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흐르자 강호가 생각났다. 캠핑 가면 항상 강호가 틀던 음악이었다.
강호는 늘 쳇 베이커의 플레이 리스트를 핸드폰에 담아왔고 다음 날 집에 갈 때까지 그에 대한 역사와 음악을 얘기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를 들으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그게 뭔데?”
영지가 장작불에 잘 구워진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물었다.
“내가 책에서 본 건데, 해가 질 무렵 하늘이 붉어지면서 여러 색을 내잖아. 이때 멀리서 언덕을 보면, 언덕 위에 개와 늑대의 모습이 구분되지 않는대. 유럽에서는 그 시간을 그렇게 부른대.”
장작을 옮기고 있는 강호 대신 세라가 대답했다.
“한 마디로 혼돈의 시간인 셈이지.”
강호가 화로대에 장작을 넣으며 거들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개와 늑대의 시간. 위험하기도 하고, 야생의 늑대를 내가 키우던 개로 잘못 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보면 쳇 베이커는 삶 자체가 그런 시간이었는지도 몰라. 항상 음악과 마약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았으니.”
강호가 착화제를 넣고 불을 붙였다.
“나는 블루룸이 좋던데, 들어봤니?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 오글거리기는 한 데, 가사가 멋져. 두 사람을 위한 파란 방을 만들고 싶다는 게 소박하면서도 너무 로맨틱한 거지.”
세라는 장작불에 손을 갖다 대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영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툴툴댔다.
주인 남자가 소품 가게에서 봤던 뜨개 받침을 하나씩 놓고 그 위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감귤 차인데 드셔보세요.”
여자는 조천읍에 있는 자그마한 귤밭에서 재배한 거라며 감기와 미용에 좋다고 했다. 세라는 테라스의 따뜻한 공기와 향초의 은은한 냄새가 어우러져 노곤했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홀리데이 시즌 제품이나 특별행사 준비로 야근을 일삼았었다.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고 급한 불이 꺼지면 무중력 상태처럼 모든 일이 느리게 돌아갔다. 야근도 약속도 일정표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친구들의 카톡방에선 누구 한 사람이 슬쩍 운을 떼면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는 했다. 이조차 세라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영지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며 기분이 들떠 있었고 강호는 솔로 캠핑 동호회 사람들과 태백에 간다며 눈이 내리기만 기다렸다.
세라는 멍하니 향초의 심지를 쳐다봤다. 핸드폰 불빛이 깜박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만 올린 단체대화방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와 이모티콘만이 공허하게 돌아다녔다.
주인 남자가 우레탄 창을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 갑자기 들어선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 노을이 죽이거든요.”
하늘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여러 색이 겹쳐져 전혀 다른 하늘빛을 내고 있었다. 세라는 가슴이 뛰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마치 혼돈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초록빛이 감돌았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좁은 틈으로 밀려 들어왔다. 벽에 걸린 드림캐처가 간밤의 안녕을 묻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오후에 비가 내렸다. 주인 여자는 마당에 펼쳐 놓은 마른 귤껍질을 급하게 손으로 모아 바구니에 담았다. 세라는 겉옷과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꽁지머리를 묶은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대문 앞을 서성거리다 옆으로 비켜섰다. 몇몇 사람이 우산을 쓰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풍력발전기는 여전히 비와 바람을 가르며 존재를 과시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 보였고 조금 더 외로워 보였다.
지난밤 세라는 주인 부부와 여행 얘기를 밤늦게 나눴었다. 아이는 없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여자는 차를 마시면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사람은 여행을 지나치게 좋아해요. 계절에 한 번씩은 나갔다 와야 그 계절을 온전하게 보냈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에는 빠듯한 살림 때문에 여행을 갔다 오면 항상 부부싸움을 했어요. 전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죠. 아이를 안 낳으면 평생 여행 다니며 살 수 있다고.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도 참 단순해요.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애정을 과시하는 행동처럼 보였으나 여자의 말속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럼…….”
세라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기 얘기는 안 하겠다고요. 제 말에 찬성한 건데 왠지 서운하던데요.”
주인 여자는 아직도 할 말이 있는지 남자를 쳐다봤다. 감귤 차를 다 마시자 남자가 와인을 가져와 한 잔씩 권했다. 세라는 그들이 여행이라는 유희적 감정 때문에 아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니 무모해 보였다.
“너무 감상적인 거 아닌가요?”
세라는 속말이 튀어나왔다. 부부가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몸에서 손을 뗐다. 세라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회적으로 설명했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아기를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요, 여행 때문에 아이를 안 갖는다는 게 납득이 안 가서요.”
그다음에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약간의 열을 올리며 얘기할 즈음 와인 잔은 거의 비어 있었다. 부부의 인생관은 예고 없이 만난 뜻밖의 소나기 같았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차가웠다. 세라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들의 세상에선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했다.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지난밤을 떠올리며 세라는 우산을 접어 모래사장을 짚었다. 지나간 자리에는 우산 꼭지의 흔적이 가느다란 점선을 만들었다. 해변에는 덕에 걸어놓은 오징어가 비닐로 덮여 있었고, 비가 와서 아무도 앉지 않은 원색의 의자에는 사색의 공간이라는 푯말만 낯부끄럽게 서 있었다.
“거기, 앉을 거예요? 말 거예요?”
카메라를 든 남자가 세라에게 물었다. 그는 반 팔 티셔츠를 카고바지 위로 늘어뜨리고 다리를 쩍 벌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것으로 보이는 패딩과 우산은 모래사장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진을 찍을 듯한 자세로 카메라를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 세라는 그의 본새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딱히 그 자리에서 할 것도 없어서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같은 자리에서 여러 컷을 찍어댔다. 볼거리가 많은 위치도 아니었고 매력적인 피사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풍에 끄덕끄덕 말라가는 오징어, 비를 뿜은 먹색의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어느 상가 건물 꼭대기에‘월정리 동부하수처리장 증설 반대’라고 써 붙인 현수막 하나가 전부였다. 세라는 그의 옷차림을 보고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세라의 발 쪽을 보며 시비조로 말했다.
“저기요.”
세라가 모래사장에 널브러진 패딩의 끝자락을 밟고 있었다.
“어머, 미안해요.”
그는 옷에 묻은 모래를 털고 카메라 장비를 챙겼다. 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옮기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짙은 바다 안개가 느리게 지나갔다. 는개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 탓인지 세라는 몸이 가라앉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주인 여자가 저녁 준비가 다 됐다고 알려왔다. 어제 먹은 수제비가 맛있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더니 별일 없으면 오늘도 함께 먹자고 했다. 안채에는 다른 손님도 들어와 있었다. 꽁지머리를 묶은 모습이 보였다. 문득 대문 앞에서 캐리어를 끌고 있던 남자가 생각났다. 식탁에 앉았을 때 세라는 당황했다.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던 남자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꽁지머리와 사진을 찍던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의 말투는 까칠했지만, 살짝 다문 입술은 다소곳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 여자는 투숙객끼리 인사를 나누라며 상을 차렸다. 세라는 살짝 묵례했다. 그와는 적당한 인사와 거리가 최선이었다. 꽁지머리는 구면이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주인 남자가 앉기도 전에 숟가락을 들었다.
주인 남자는 그에게 어서 먹으라고 공기에 밥을 한가득 퍼 주었다.
“제가 배가 고파서요. 그럼 먼저 먹겠습니다.”
세라의 눈에는 예의 없어 보였지만 주인 여자는 그의 그런 태도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돼지고기 건더기를 잔뜩 얹은 김치찌개를 꽁지머리 앞에 놓았다. 세라는 은근히 그가 얄미웠다.
“참, 여기가 어제 말한 오사카 게스트하우스예요.”
주인 남자가 오사카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자주 묵는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핸드폰으로 게스트 하우스의 전경이 나와 있는 블로그를 보여주고 링크도 걸어 주었다.
“낯선 장소에 가는 것보다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는 걸 좋아해요. 내겐 오사카가 그런 곳이에요. 낯설지만, 서울처럼 익숙한 곳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친근하죠. 물론 개인의 취향이긴 하지만요.”
주인 남자가 말했다.
“오사카 정도면 혼자 여행하기에는 괜찮죠. 길 잃어버리는 일도 없을 거예요.”
꽁지머리가 말했다.
“가보셨군요.”
“난바역 근처에 있었어요.”
“거기 주인장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예요. 혹시 여행계획이 있으시면 오사카도 좋아요.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시장이 있어서 사람 사는 거 구경하려면 그만한 데가 없어요. 그리고 관광지로도 유명하니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면 한국인일 수도 있어요.”
주인 남자의 말에 모두 소리 내어 웃었다.
“저도 게스트하우스 주소 좀 주세요.”
꽁지머리가 솔깃해하자 주인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홈페이지를 공유했다.
세라는 주인 여자에게 설거지를 돕겠다고 했다. 주인 여자는 그릇을 헹구면서 방은 따뜻하냐며 웃풍이 심해서 작년에 단열 시공을 했다고 뿌듯해했다. 내일 아침에 귤을 따올 테니 맘껏 가져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세라는 여자의 수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인 남자의 말을 되새겼다. 익숙한 장소에서의 낯선 사람들…….
설거지를 끝내고 주인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잠시 세라를 응시했다.
“그리고 어제 말인데요. 우리의 방식은 틀린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거예요.”
어젯밤 세라의 말에 진중해졌던 여자는 종일 그 말을 품고 있었다. 세라는 자신의 삶도 남들과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총량의 법칙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면 희소병에 걸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아프기로 한 거라고. 그러니까 대단한 거라고.
세라는 해변을 거닐고 싶어 밖으로 나갔다.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면 문을 닫은 상점들 사이로 카페 불빛이 해변까지 드리웠다. 발끝에 부서지는 차가운 모래알을 보며 세라는 생각했다. 채 상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힐을 신었던 것처럼, 주인 부부가 남과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것처럼, 그날 강호와 함께 있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날 강호는 모텔 앞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세라는 모텔로 들어가는 강호의 뒷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정신이 들었다.
바닷물이 발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운동화 코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둥근달이 검은 바다 위에서 서서히 헤엄치고 있었다. 달이 머무는, 월정에서 세라는 깊고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익숙하지만,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머릿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세라가 목도리를 두르며 주방에 있는 정임을 슬그머니 살폈다. 정임은 과일을 갈았고 세라는 늘 하던 대로 정임이 주는 주스를 입 안 가득히 머금고 출근하는 척했다.
세탁소 아저씨가 수면 바지에 점퍼만 입고 셔터를 올리고 있었다. 출근 시간에는 닫혀 있었기에 처음 보는 세탁소 아저씨의 행색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골목 끝에는 하나 슈퍼와 으뜸 세탁소가 나란히 마주했다. 슈퍼를 끼고돌면 회사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나왔고 반대편 세탁소를 돌아가면 구립 도서관으로 가는 큰길이 나왔다. 베란다에 나와서 지켜보는 정임에게 손을 흔들며 슈퍼 쪽으로 걸어갔다. 정임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세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세탁소로 방향을 틀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로 오전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뷰티에 관련된 전문 서적을 읽거나 지루할 때면 공룡 대백과사전, 달리기 잘하는 방법 같은 흥미 위주의 책을 골라 보기도 했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날씨가 좋으면 캐러멜마키아토를 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하거나 광화문 씨네 큐브에서 영화를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다.
세라는 서울을 떠나기 전에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싶었다. 월든에 먼저 도착한 세라는 턱을 괴고 카페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카페 입구에는 원목으로 만든 입간판이 눈바람을 맞으며 섰다. 눈송이가 유리창에 부딪혀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갔고 남녀 커플은 그와 상관없이 천천히 걸었다. 그들 사이로 강호가 보였다. 강호가 머리에 앉은 눈을 털어 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
강호가 장갑을 벗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니, 조금 전에 왔어.”
“영지는?”
“아직 사장님이 퇴근 전 이래.”
음식이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함박눈을 계속 바라봤다.
“강호야, 지난번엔 미안했어.”
따뜻한 물컵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세라가 말했다.
“뭐, 나도 잘한 건 없으니까.”
강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세라는 떠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혀끝에서 맴돌 뿐 이유를 설명할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 친구들의 당황한 표정과 갈 곳 잃은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강호가 잘 다녀오라고 무심하게 말 한마디로 정리할지도 모른다. 세라는 덜컥 겁이 났다. 명확한 사이가 될까 봐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하지 못했다.
커피와 파스타를 다 먹어도 영지는 오지 않았다. 눈발은 더 굵어졌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데, 막히기 전에 데려다줄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굵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강호는 세라의 머리를 털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팔을 꽉 붙들었다. 도로가 정체되어 한 시간이나 늦게 세라의 집에 도착했다.
한적한 공원에 눈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총총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눈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가로등에 비쳐 잘게 부서진 유리알처럼 미세하게 반짝였다. 귀 기울이면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소복하게 쌓인 눈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세라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우리 강군, 얼굴 좀 자세히 보게.”
내리는 눈 때문에 강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질 않았다.
“왜 그래. 또.”
“어디서든 네가 먼저 알아봐 주라.”
가로등 불빛아래 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장난치지 말고.”
세라가 강호를 힘껏 껴안았다. 가슴이 콩닥거릴 때마다 강호에게 들킬까 봐 숨을 참았다. 애써 웃으며 빌라 현관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다 말고 주춤하며 뒤돌아섰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강호의 하얀 뒷모습이 희미하게 번져갔다. 세라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강호야, 나 잊으면 안 돼.”
세라의 목소리가 눈 속에 서서히 파묻혀갔다.
정임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젊은 트로트 가수의 노래와 춤이 메들리로 이어졌다. 항상 노래를 따라 부르던 정임이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화면만 쳐다봤다. 세라가 일본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하자 그 후로 넋 나간 표정으로 하는 일마다 심드렁했다. 정임이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은 단순했다. 세라가 직장을 다니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순탄하게 살기를 바랐다. 손주를 봐주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었고 세라와 떨어져 사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라는 정임에게 거짓말로 둘러댔다. 해외 파견을 나간다고 했을 때 가슴이 미치도록 쿵쾅거렸다. 누군가 폐부에 들어와 달리기 하는 것 같았다. 정임은 그대로 믿었고 의심하지 않았다.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혼자서 감당해야 할 근심거리만 두 사람이 나눠지게 되는 꼴이었다. 정임이 의사를 찾아갈지도 모르고 의사를 찾아간 정임이 치료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의 무능함에 욕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눈물 마를 날이 없을 테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효험이 있다는 약을 구해 세라 앞에 들이댈 것이다. 그런 일들이 하루, 이틀, 한 달 그리고 수많은 날을 채워가겠지. 세라는 정임이 남은 생을 그렇게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그런 정임을 견뎌낼 수 없었다. 미래가 어느 한 사람의 희생과 고통으로 이어진다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이기적이었다.
출국장은 한산했다. 정임이 공항까지 따라나섰다. D 항공사 앞에는 출국 수속을 밟으려는 사람들로 줄지어 있었다. 정임은 무릎을 짚으며 세라 옆에 섰다.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엄마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진작 그러지 못했을까. 세라는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정임을 보며 후회했다. 정임이 혼자 쓸쓸하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짐을 부치고 정임의 손은 갈 곳을 잃어 손수건만 조몰락거렸다. 출국심사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세라가 정임의 얼굴에 양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우리 김 여사 얼굴 좀 다시 보자.”
“가서 밥 거르지 말고 잘 먹고 다녀. 이것아.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전화 자주 하고 알았지?”
정임은 세라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엄마도 밥 잘 먹고, 약 잘 챙겨 먹어. 그리고…… 내 얼굴 잘 기억해.”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임의 두 눈에 물기가 스몄다. 미간이 좁아지고 코볼을 벌렁거리더니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정임은 세라가 출국장으로 들어가자 마지막 모습을 놓칠세라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세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컨베이어 벨트에 가방과 웃옷을 벗어 올려놓았다. 출국심사장을 통과하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가만히 앉았다. 옆 칸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나자 세라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급작스러운 기류 변화에 세라는 잠이 깼다. 착륙 30분 전이라는 안내가 기내 스크린에 떴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종이와 펜을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사원증이 올려져 있는 걸 보니 출장 중인 것 같았다. 여자의 고개가 자꾸 통로 쪽으로 넘어갔다. 마침 통로를 걸어가던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세라는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지나가는 남자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여자에게 괜찮은지 묻지도 않고 제 길을 가는 게 거슬렸다. 여자는 자기가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도 모르고 계속 고개를 떨구고 졸았다. 세라는 여자의 고개가 자기 쪽으로 넘어오자 어깨를 내주었다.
네모난 창을 가득 메운 구름 띠를 내려다봤다. 까마득하게 보이던 점들이 또렷하게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후드티 남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 남자, 어디서 본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