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잿빛 어둠에 꼬리를 감췄다.
낮게 드리운 세상은 음흉한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힘없는 존재 같았다. 여자는 주춤거리다가 핸드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비추며 앞길을 걸었다. 불 꺼진 공원 벤치에는 폐지를 줍던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여자가 벤치 앞을 지날 때였다. 노인은 움츠렸다가 한껏 뛰어오르는 개구리처럼 몸을 펼쳐 여자의 손을 낚아챘다. 여자가 휘청거렸다. 노인의 주름진 손등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세월의 노쇠함이 켜켜이 박혀있었다. 노인과 여자의 손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체되기 시작했다. 노인은 괴력을 분출했고 검게 타오르는 핏줄이 여자의 손등으로 번져갔다. 여자는 이를 악물며 노인의 손을 뿌리쳤다. 노인의 손이 석면 가루처럼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손이 노인의 주름진 살갗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손가락 마디는 살갗을 발라낸 뼈 모양을 그대로 드러냈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노인의 눈빛은 생명을 잃은 채 허공을 떠돌다가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세라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었다. 입술은 잠결에 난 잇자국으로 벌겋게 부어올라 피가 났다. 간신히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꾸었고 그때마다 기력이 반쯤 나가 육체가 분리된 느낌이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경은 문이 열리자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렀다. 세라의 눈두덩이는 깊숙이 파였고 땀에 흥건히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에 딱 달라붙었다.
“캡, 캡틴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서……. 카레 했다고 점심 같이 먹자는데요.”
세라가 힘없이 도경을 쳐다봤다.
“점심이요? 보다시피 제가 좀 꼴이 말이 아니어서요. 다…… 음에…….”
문을 닫으려는 데 도경이 물었다.
“어디 아파요?”
도경은 세라의 입술에 난 핏자국을 보았다. 세라는 도경을 쳐다보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사람이 물으면 말을 해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도경의 말에 세라는 떨리는 입술로 소리쳤다.
“아파요! 아프다고요! 됐어요?"
도경은 카페에 앉아 마른 수건으로 카메라 조리개만 계속 닦았다. 세라는 창밖을 쳐다봤다. 캡틴은 세라와 도경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카레 접시를 내밀었다. 세라가 말없이 물을 마셨다. 도경이 한숨을 쉬더니 수건을 내려놓았다.
“앱니까? 안 좋은 꿈 꿨다고 울어서 사람 놀라게 하고.”
도경이 한마디 했다. 캡틴은 도경에게 그만하라는 뜻으로 눈을 깜박였다.
“저, 이상하지 않아요?”
세라는 도경의 말을 무시하고 캡틴에게 물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뭐 달라진 거 없어요?”
캡틴은 세라를 빤히 쳐다봤다.
“달라진 거요? 그야 당연히 있죠.”
“네?”
세라는 당황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일어 실력은 수준급으로 향상됐고, 웬만한 라멘도 잘 만들고, 그리고…….”
“그런 거 말고요.”
“그럼 뭐요?”
캡틴이 멋쩍어하자 도경이 끼어들었다.
“성격 탓인지 살도 빠진 것 같고, 무슨 자신감인지 한국 아니라고 노메이컵에, 매번 악몽이라도 꾸는지 눈은 퉁퉁 부어있고, 어쩔 땐 좀비처럼 시장 골목을 걸어 다니고.”
세라는 할 말 잃은 표정을 지었다.
“뭐 대략 이 정도요.”
도경이 카메라 장비를 하나하나 입바람으로 불며 말했다. 세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비가 내렸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세라는 라멘집 문에 기대어 도톤보리 강을 바라보았다. 팅커벨이 날갯짓을 하듯 작은 빗방울들이 통통 강물 위로 춤을 추었다. 세라는 유리문에 달라붙어 미끄러져 내려가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어릴 적 아빠와 피터팬 만화 영화를 즐겨 봤었다. 아빠는 팅커벨에 빠져 있었고, 팅커벨 요정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별 부스러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 세라가 저렇게 예쁘게 크면 좋겠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세라는 피터 팬이 되고 싶었다.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을 때는 아빠의 말 때문에 키가 안 큰 거라고 하늘에 대고 탓을 했다. 작은 몸집에다가 그 안에 마음의 크기도 작아서 남이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고 뜬금없는 이유도 갖다 붙였다. 그러고 보면 정신을 놓고 시장 골목을 걸어 다닌다는 도경의 말도 틀린 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의 크기는 그때와 달라지지 않아서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세라는 서울에서 정임을 본 뒤로 가슴속에 가라앉았던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건져냈다. 정임은 잘 지냈고 그녀의 삶은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공항에서 마음을 짓눌렀던 불안한 눈빛이나 눈물은 두부를 달랑거리며 들고 가는 정임의 모습 속에 묻혀버렸다.
시장통에는 한 손에 우산을 접은 채 구경하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천장에 달린 대게 모형을 조금씩 흔들었다. 타코야키를 사려는 손님들이 옆 가게의 출입문까지 길게 늘어섰다. 요시메상의 화장품매장은 무인점포 같았다. 세라는 그녀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캡틴의 말을 듣고 화장품매장을 지날 때마다 눈여겨 들여다보고는 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수제 햄버거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님들이 볼 수 있게 셰프가 커다란 팬에 열 개의 패티를 올려놓고 한꺼번에 뒤집는 진기한 재주를 펼쳤다. 구경꾼들에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앞줄에 앉은 초록색 두 건을 두른 사람이 최고라고 연거푸 외쳐댔다. 요시메였다. 그녀는 가게는 내팽개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요시메상.”
세라가 이름을 몇 번 불렀지만, 요시메는 셰프의 현란한 손짓에 정신이 팔렸다. 세라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요시메가 뒤를 돌아봤다.
“니코리!”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 반색하며 구경꾼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가게는 어떻게 하고 여기 있어요. 누가 화장품 다 가져가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녀는 세라의 손에 이끌려 가게로 갔다.
세라가 화장품 진열대를 천천히 살피고 있을 때 요시메는 커튼을 쳐놓은 내실에서 떡꼬치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왔다. 요시메는 의자를 내밀며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니코리 이리 와서 먹어봐. 누가 오기 전에 어서 먹어.”
세라는 갈락토미세스라고 쓰인 갈색병을 들고 형광등 불빛 아래서 흔들었다.
“요시메상, 이거 직접 만드셨다고 했죠.”
“그럼, 내가 만든 거지. 누구도 못 가져가. 왜, 그년이 온대?”
“네? 누구요?”
“나쁜 년.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자꾸 만들어 달라고 하잖아.”
요시메는 두 눈을 부라리며 흥분했다.
“저, 테스트 좀 해봐도 돼요?”
세라는 오로지 갈색 호리병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거? 물론이지.”
세라는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손등에 덜어 골고루 펴 발랐다.
“이거 갈락토미세스 농축액인 거 맞죠?”
“그게 뭔데.”
“아, 가.라.구.토.미.센.스.요.”
세라는 발음에 신경 써 말했다.
“그럼, 난 섞은 거 안 팔아. 내가 효모에서 추출한 건데.”
요시메는 단호했다.
“이것도 줄까? 갖고 싶은 것들 말해봐. 여기 있는 것들 다 니코리 거야.”
세라는 니코리가 되어 요시메와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요시메가 화장수 제조법에 관한 노하우를 세세하게 설명할 때면 세라는 놓칠세라 핸드폰으로 메모를 했다. 그러다가도 요시메가 그년이, 하며 허공에 대고 욕을 해대면 그녀의 손등을 지그시 감쌌다.
“니코리, 아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널 지켜줄 거야.”
요시메가 세라의 얼굴을 찬찬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니코리의 정체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메다에 있는 H백화점에 도착한 건 늦은 오후였다. 달팽이관 같은 지하 주차장은 초입부터 만차 표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하 3층에서 겨우 주차공간을 찾았다. 캡틴이 세라와 도경과 함께 공중정원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기로 한 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세 사람이 시간을 맞춰 함께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야경을 보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 맛집으로 유명한 돈가스집으로 먼저 갔다.
식당 앞에는 대기 손님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안내하는 직원이 캡틴에게 번호표를 주고 바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캡틴과 세라는 의자에 앉아 메뉴를 골랐지만, 도경은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았다. 식당 간판을 찍는가 하면 대기 줄에 선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었다. 캡틴이 핸드폰이 울리자 비상구로 갔다.
“사람들 뒷모습은 왜 찍어요?”
세라가 말했다.
“사실적이잖아요.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야말로 그런 부분이죠.”
“사람들의 표정이 더 사실적이지 않아요?”
도경은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을 돌려봤다.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를 보면 갑자기 현실을 잊고 웃어버리죠. 돈가스를 먹겠다고 자기가 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SNS에 올릴 셀카를 찍느라 온갖 예쁜 척을 해요. 그런데 팩트는 뭔지 알아요? 이미 다리는 퉁퉁 붓고 허리는 반쯤 휘어 벽에 기대고 있어요. 난 사실을 찍는 거예요.”
세라는 계속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는 도경에게 물었다.
“어차피 세상 모든 일에는 양가성이 있잖아요. 이게 보편적이지 않나요?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이 숨어있다는 건 비약 아닌가요?”
“난 진실이라고 말 한 적 없어요. 사실이라고 했지. 진실과 사실은 완전히 다르죠.”
도경은 카메라를 무릎에 내려놓고 정색했다.
직원이 34번을 호명하자 통화를 끝내고 오던 캡틴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진실이든 사실이든 일단, 먹고 봅시다.”
식사를 마치고 스카이 빌딩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캡틴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댔다.
“전화 안 받으세요?”
세라의 말에 캡틴은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어떡하죠. 오늘 약속이 겹쳐버렸네요. 다케시상이 계속 전화가 오네요. 친구들이 라멘집에 모였다고 늦게라도 오라고 성화네요.”
“아, 그러면 …….”
세라는 도경과 남는다고 생각하니 난처했다. 그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진만 찍어댈 것이고 어쩌다 한두 마디 건네면 대답이 되돌아오기까지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야경을 보면서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도경이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내릴 준비를 했다.
“전 어차피 사진 찍으러 온 거니까 남아서 찍고 가겠습니다.”
“세라 씨도 함께 구경하고 와요.”
캡틴이 룸밀러로 비친 세라를 보며 말했다.
“저는, 돌아…….”
도경이 차에서 내리다 말고 뒤돌아봤다.
“안 내려요?”
밤이 깊어지자 야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엘리베이터가 30층을 넘어가자 세라는 호흡을 크게 하고 안전 바를 붙잡았다. 도경이 바라봤을 때 그녀의 볼은 열꽃이 인 것처럼 붉어졌다. 사람들을 따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거대한 불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세라는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경도 카메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캄캄한 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는 수많은 불빛에 둘러싸여 자신이 피사체가 된 기분이었다. 빌딩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대교를 건너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어느 시골에서 마주한 신비한 반딧불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아.”
세라가 들뜬 목소리로 감탄했다.
어둠이 번져갈수록 강물을 가로지르는 불빛들은 예전에 영화에서 본 은하수 주위로 모여드는 별들처럼 빛을 뿜었다.
“굉장한데!”
도경은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우주처럼 펼쳐진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공중정원에는 꽃들도 정원수도 아무것도 없었다. 발아래 펼쳐진 보석 같은 섬광들이 꽃이고 나무였다. 도경이 포토존을 찾아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다. 세라는 오사카를 가로지르는 강줄기를 보며 도경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한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도경의 카메라는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세라는 도경의 카메라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해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세라는 언제부터인가 도경의 카메라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는 건 알고 있지만, 카메라 렌즈와 눈이 자주 마주칠 때면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의 말대로 잠을 설쳐 눈이 부어있거나 텅 빈 눈으로 골목을 걸어 다니다가 그의 렌즈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도경이 카메라 렌즈를 보며 시선을 멀리 보냈다. 세라는 카메라를 피해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발밑을 보며 신기한 듯 손바닥을 펴고 잡는 시늉을 했다.
“저기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어져요? 점 보다도 작은 크기로 말이죠. ”
세라가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불쑥 올라와 있는 건물들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보드게임에서 건물과 땅을 주워 담을 때처럼 모형 빌딩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위엄이나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세속적인 감상이 모두 배제된 하나의 덩어리로 다가왔다.
“종교 있어요?”
도경이 뜬금없이 물었다.
“어릴 때 아빠 따라서 교회 간 게 다예요. 그건 왜요?”
“나는 무교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 오면 고해성사 비슷한 걸 해요. 세상을 밟고 서서 그동안 지은 죄를 한 번에 퉁 치는 거죠.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누구 한 명은 들어주지 않겠어요?”
도경이 렌즈를 갈아 끼우며 말했다.
“그러면 뭐가 좀 달라지나요?”
“속마음을 털고 나면 세상과 나를 분리해서 바라보게 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백 장의 사진을 보고 쓸만한 게 없다고 거절하는 광고주나 마음에 들 때까지 얼굴 보정 해달라는 어이없는 고객이나, 어제까지 내 일상을 쥐고 흔들던 사람들이 지금 발아래 저 밑에 있다고 보면, 그냥 그들은 점 같은 존재라는 것뿐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도경은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화법은 늘 세라를 긴장시켰고 난감하게 만들었다. 지금 그의 옆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인간적인 냄새가 났다. 그를 판단했던 잣대도 조금씩 느슨해져 갔다.
셀카를 찍던 커플이 도경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는 커플이 괜찮다고 하는 데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여러 장을 더 찍고 카메라를 내주었다.
“계속 라멘집에서 일할 거예요?”
도경이 말했다.
“사실 구상 중인 일이 있는데, 먼저 설득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빨리 시작하라고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세라는 요시메의 화장품이 발효추출 원액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천연화장수를 개발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겼다. 요시메가 정신이 온전할 때를 기다려 원료 사업을 얘기하고 싶었다. 알람을 맞춰놓고 라멘집 알바가 끝나면 요시메을 보러 화장품 가게에 들렀다. 하루의 루틴을 정해놓으니 시간의 틈 사이로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요시메가 세라를 니코리라고 부르는 일이 많아졌고 시장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요시메가 무표정하다가도 니코리라 부르며 환하게 웃을 때면 세라도 진짜 니코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게 가슴 뛰는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이제 다른 존재로, 니코리로 살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세라는 라멘집에서 퇴근하면 바로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어떤 날은 요시메상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요시메상이랑 얘기 잘 됐어요?”
캡틴이 커피를 내리며 세라에게 물었다.
“아니요. 언제 정신이 돌아오실지 모르니까 그게 좀…….”
“그럼, 하루마와 얘기해 보는 건 어때요?”
캡틴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하루마가 누군데요?”
“요시메상 아들이에요. 아카시와 친구기도 하고. 오늘 가게에 나오는 날인데.”
“아드님과 얘기하더라도 할머니한테 직접 승낙을 받고 싶어요.”
세라의 뜻은 강건했다. 요시메가 니코리에게 모든 걸 준다고 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니코리 행세를 하며 그녀가 이뤄낸 결과물을 훔치듯 가져오고 싶지 않았다.
“세라 씨 마음은 잘 알겠는데, 이런 일은 미룬다고 좋을 게 없어요. 잘 생각해 봐요.”
며칠이 지나도 요시메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세라는 도경이 전망대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내색 없이 응원하는 그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그마저 힘이 났다. 그렇다면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루마를 만나 천연화장수 개발에 대한 사업을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라멘집에는 대기하는 손님들로 번잡했다. 세라는 손님들 사이로 빠져나왔다. 퇴근 길은 붉게 물든 저녁놀이 옅게 번지고 있었다. 막 점등하기 시작한 가게의 네온사인은 오밀조밀하게 반짝거렸다. 도톤보리 강 주변에 이른 취객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 강 다리 위에 취객이 난간을 붙잡고 힘겹게 서 있었다. 그는 곧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근처 카페에 있던 도경은 취객의 뒷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봤다. 캐논에서 주최하는 사진 공모전을 떠올리며 상금이 천만 원이라는 기사에 눈독을 들였다. 취객이 양복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허리 밖으로 반쯤 삐져나온 셔츠 자락은 꼬깃꼬깃하게 구겨졌다. 대형 간판의 글리코 상의 활기찬 모습과는 대조적이었고 사실적이었다. 도경이 손가락으로 사각 프레임을 만들어 취객의 모습을 좇았다. 그러다 불쑥 카메라를 들고 카페를 나왔다.
취객을 따라가며 조리개를 조절했다. 도경이 셔터를 누르는 동안 렌즈 안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좁은 보폭으로 취객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취객은 위태롭게 발걸음을 뗐고 여자 쪽으로 비틀댔다. 도경은 카메라를 들고 계속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여자가 제 속도로 계속 걷는다면 비틀거리는 남자와 부딪힐 것 같았다. 순간 취객이 여자의 신발 뒤축을 밟아 운동화 한 짝이 벗겨졌다. 여자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도경이 카메라 렌즈로 그 장면을 당겼다. 순간 도경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렌즈 한가운데 세라가 보였다. 도경은 재빠르게 달려갔다. 취객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휘청거리며 세라한테 몸을 기울였다. 도경이 세라의 팔을 낚아챘다. 깜짝 놀란 세라가 비명을 질렀다. 취객이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똑바로 보고 다녀!”
도경이 취객에게 소리쳤다. 남자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양복 재킷을 주운 뒤 주춤거리며 급하게 걸어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길 한복판에서!”
도경이 세라의 팔을 잡고 눈썹을 치켜떴다.
세라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도경을 보자 긴장했던 어깨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도경의 카메라는 이미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가 매일 마른 헝겊으로 정성 들여 닦던 카메라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다가 부리로 카메라를 쪼아댔다. 도경이 짜증 섞인 얼굴로 카메라를 주웠다.
“괜찮아요?”
세라가 카메라를 보며 겸연쩍게 물었다.
도경이 입바람을 불며 카메라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이씨, 완전히 나갔네.”
헐거워서 테이프로 붙여놨던 배터리 커버가 떨어지면서 두 동강이 났다. 세라는 도경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그 옆에서 카메라를 한참 쳐다봤다.
요시메의 가게 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세라는 서류 봉투를 두 팔로 껴안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요시메상.”
작은 소리로 불렀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내실에서 남자가 나왔다.
“요시메상은 어디 가셨나요?”
“어머니는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세라는 남자의 눈매가 요시메를 닮아 그가 하루마라는 걸 단박에 알아봤다. 게다가 그가 입은 초록색 실 조끼는 요시메의 두건과 세트처럼 보였다.
“혹시, 하루마상 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안녕하세요. 저는 유 세라예요. 요 앞 캡틴 게스트하우스에 살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낯이 익네요. 근데 무슨 볼일이라도.”
“저, 어머님 일로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세라는 이렇게 된 이상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요시메에게 말했던 화장품 원료 사업에 대해 아들에게 설명했다. 하루마는 귀담아들으면서도 세라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세라가 캡틴과 아카시의 얘기를 곁들이자 경계의 눈빛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건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당연한 말씀이세요. 저도 요시메상과 직접 얘기하고 싶어요. 하루마상이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세라는 사업 설명서가 담긴 서류 봉투를 건넸다.
“정신이 맑을 때 꼭 보여드리세요. 구체적인 사업 설명이 되어 있어요.”
“네. 그러죠.”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가방 안에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혹시, 니코리가 누군지 아세요?”
“니코리를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하루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라가 하루마에게 들은 가족 이야기는 오래전 시장이 생겼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생선 가게를 크게 하셨대요. 전쟁이 나면서 할아버지는 생선 가게를 접고 친구분과 군수물자 사업에 뛰어드셨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는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라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외삼촌이 있었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외삼촌은 어머니를 무척 아꼈다고 해요. 할머니도 남매지간에 우애가 유별났다고, 저와 동생이 싸울 때면 항상 그 말씀을 하셨어요. 잠시만요.”
하루마는 내실로 들어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아마, 어머니가 열 살 정도 되었을까요. 외삼촌이 경찰예비대에 입대한 게 열일곱 살이라고 했으니까요.”
“경찰예비대요?”
“할아버지의 결정이었죠. 전쟁 통에 경찰예비대에 들어가면 군 간부로 이관될 확률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대요. 외삼촌이 입대하고 어머닌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해요.”
그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외삼촌은 군대에서 총기사고로 스무 살에 죽고 말았죠. 할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외삼촌이 죽었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하시더라고요.”
“어쩌다가…….”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건 아시죠?
“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 저한테 오빠라고 부를 때가 있어요.”
“그럼. 혹시 니코리는…….”
세라는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줬다.
“외삼촌이 부르던 어머니의 애칭이었어요.”
“아, 그랬군요.”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예요. 하지만, 어머니가 세라 씨한테 왜 니코리라고 하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세라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면서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요시메와 자신의 얼굴이 겹쳐져 또 다른 얼굴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요시메가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기억의 한 부분이 니코리로 불리던 유년의 시절이 아니었을까. 세라는 가장 찬란했던 추억이 남은 생을 지탱해 주는 한 줄기 빛이 된다면, 과거 속에 영원히 산다 해도 불행할 것 같지 않았다.
하루마는 일찍 문을 닫으려고 가게 안을 정리했다. 세라가 준 서류 봉투를 가방에 넣은 걸 확인하며 불을 끄고 가게에서 나왔다.
“실례합니다만, 여기가 미우라 요시메상 화장품 가게인가요?”
그는 낯선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포니테일 스타일의 여자는 하늘색 재킷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입술에 바른 빨간색 립스틱은 도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고 반짝이는 구두의 앞코는 도도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모자 가게의 내부 인테리어는 빈티지하고 아기자기한 소품 다락방 같았다. 계절과 상관없이 한겨울 뜨개 모자와 여름용 망사모자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가 와인색 페도라를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세라는 버킷 모자를 고르다가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 여자는 엉덩이만 가까스로 가린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자유롭게 자세를 취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모델이나 된 듯 오글거리는 자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자가 계산하는 동안 세라는 30% 세일이라고 붙어있는 검은색 페도라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페도라의 볼록한 크라운이 얼굴에 생기를 돌게 했다. 그러나 여자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결국 버킷 모자만 들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돌아오면서 계속 페도라가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도경은 카페에 앉아 늘 그랬듯이 마른 헝겊으로 카메라를 닦았다. 가까스로 붙여놓은 배터리 커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수리를 맡기지 그래요.”
아카시가 보다 못해 참견했다.
“서비스 센터에 물어봤는데 지금 맡기면 수리하는데 2주나 걸린대요. 공모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전까지 버텨 볼 라고요.”
“아, 공모전이 있군요! 사진은 많이 찍었어요?”
“그렇긴 한데 마음에 딱 와닿는 사진이 없어서…….”
그때 하루마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와, 하루마.”
아카시가 말했다.
하루마는 도경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캡틴은?”
“서울에 가셨어. 어제 그 여자랑은 얘기가 잘 됐어?”
하루마는 의자에 앉아 얼음물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펄쩍 뛰셔. 그 여자는 안된다고. 내 생각에는 그쪽이 조건이 훨씬 좋은데.”
“이제 정신이 드셨어?”
“어제 몸이 안 좋다고 일찍 들어가시더니 나를 알아보셔.”
“그래? 그럼 지금 결정해야 할 타임 아니야? 또 언제 옛날로 돌아가실지 모르잖아.”
“그렇긴 하지. 오늘 가게에 나오신다는 데 그 여자가 또 찾아올까 봐 그게 걱정이야.”
도경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살폈다. 컴퓨터에 옮겨놓은 사진들과 B컷 사진들을 찾아 삭제해 나갔다. 공교롭게도 사진들 속에 세라가 많이 찍혀 있었다. 사각 프레임 끝에 걸려있거나 비스듬한 각도의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사진 속 세라의 모습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수척했으며 미소는 불안해서 어찌 보면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얼마 전 고베에 있는 하버랜드의 야경을 보며 노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찍었었다. 그들이 석양을 등지고 유람선의 불빛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춤을 출 때 여행자 파티에서 맥주를 들고 춤을 추던 세라가 생각났었다. 세라가 카페 창밖을 멍하게 내다보는 사진이 나오자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세라가 악몽을 꾸었다고 뒤돌아서 울먹이던 날, 그는 세라가 좀비처럼 시장 골목을 돌아다닌다고 핀잔을 준 게 걸려 잠을 뒤척였었다.
“도경,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도경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셋이 한 번 뭉치자고요. 나이도 비슷하니.”
하루마가 도경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네. 뭐. 그러죠.”
“참, 한 사람 더 있네요.”
“누구?”
하루마가 묻자 아카시는 창 밖으로 보이는 세라를 가리켰다. 세라는 버킷 모자를 쓰고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갔다.
“요시메상 계세요?”
화장품 가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세라는 반가웠다.
“어서 와요.”
요시메가 초록색 두건을 두르며 내실에서 나왔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요 며칠 좀 쉬었더니 가뿐해졌지 뭐야.”
“정말 다행이에요.”
세라는 요시메의 표정을 찬찬히 챙겼다. 안색은 편안해 보였고 한 곳을 주시하며 집착하지도 않았다.
“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세라 씨, 내가 또 실수했나 보군요.”
“요시메상! 돌아오셨군요! 고마워요!”
세라는 그녀의 손을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진정해요. 아가씨.”
요시메가 내실에서 서류 봉투를 들고 나왔다.
“하루마한테 얘기 듣고 깜짝 놀랐어요. 세라 씨가 한국에서 화장품회사의 브랜드 매니저로 일했다면서요. 전해준 사업 설명서도 잘 봤어요. 준비를 많이 했더군요.”
“읽어봐 주셨다니 감사드려요. 저 진심으로 해보고 싶어요.”
“나는 원리 원칙주의자예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일하면서 많이 힘들어했죠. 그게 나만의 사업을 시작한 이유기도 해요.”
“전 요시메상의 그런 점을 배우고 싶어요.”
“내 발효 추출물을 원하는 업체들이 많았지만, 다들 사업적 이익이 우선이라 추출물에 장난치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업이라는 게 원래 돈을 벌려고 시작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아요. 규모와 상관없이 제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자를 찾고 있어요.”
세라는 마른침을 삼켜가며 그녀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메모했다.
“세라 씨도 알겠지만, 내가 아프고 보니 이제는 욕심만 가지고 일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함께 해봐요. 내가 투자자가 되겠어요.”
“투자요?”
세라는 고개를 들어 요시메를 쳐다봤다.
“세라 씨가 돈이 얼마나 있겠어요. 이 좋은 원료를 가지고 구멍가게나 할 생각이었어요?”
그녀에게서 텅 빈 눈망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까만 눈동자에서는 전에 없던 결기가 느껴졌다. 세라가 가슴을 움켜쥐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요시메는 물을 가져와 세라에게 마시게 했다.
“천천히 숨을 쉬어봐요. 후후후. 다시 들이마시고.”
그녀는 아기를 다루듯 세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순간 어지러워서요.”
“그동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요. 내가 그 마음 알아요.”
세라는 정신을 차리고 요시메의 손을 잡았다.
“해볼게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볼게요.”
회사를 그만두며 억울했던 모든 감정이 순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사업을 시작하면 서울로 돌아가 정임에게 당당하게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늙게 될 두려움도 투병 중이라는 사실도 일의 욕망 뒤로 숨어버렸다.
며칠 후 세라와 요시메는 천연화장수 원료개발과 공급에 대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세라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하루마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는 요시메가 결정한 일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세라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우선 캡틴과 도경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축하받고 싶었다.
“요시메상.”
여자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세라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서둘러 서류를 가방 속에 넣고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또 오셨군요. 한발 늦으셨습니다.”
하루마가 여자 손님에게 말했다.
가게 안에 진한 딥티크 향이 퍼졌다. 오랫만에 맡아보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세라는 기분이 서늘했다. 세라가 가방을 메고 일어나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손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온몸이 그 여자에게 반응하듯 굳어졌다.
세라의 눈앞에 채 상무가 서 있었다.
아카시는 커피를 내리며 세라와 낯선 여자가 앉은 테이블 쪽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커피잔을 앞에 두고 말이 없었다. 세라는 채 상무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사카의 재래시장, 그 안에 작은 화장품 가게, 이곳에서 스쳐 지나갈 우연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놀랄 뿐이었다. 채 상무가 의자에 등을 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오사카엔 언제 온 건가?”
채 상무의 당황한 표정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세라는 채 상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살짝 돌렸다. 채상무의 눈썰미는 회사에서도 알아줬다. 색조의 미세한 차이도 잡아내는 실력은 시제품을 선보일 때마다 매번 심장을 조리게 했다. 그녀라면 자신의 흔들리는 눈빛만 봐도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아볼 거라 여겼다.
“3년 되가요. 어학연수차 왔어요.”
세라는 그녀가 자신을 면밀하게 살핀다는 생각에 자신을 감추기에 정신이 없었다.
“연수? 그럼 요시메상 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인가.”
세라는 그녀의 관심이 요시메에게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제가 여기 원룸에서 살아요. 시장 골목이니 웬만한 상인들은 알고 지내고요. 상무님은 요시메상을 어떻게 아시는지, 혹시…… 발효 추출물 때문에 오신 건가요?”
“유 팀장도 알다시피 좋은 원료 찾는 건 우리의 일 아닌가. 아까 아들이란 사람이 한발 늦었다고 하던데, 그럼 유 팀장이 계약했다는 건가?”
채 상무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네. 요시메상과 함께 일하기로 했어요.”
“계약조건은 우리가 훨씬 좋을 텐데, 알 수가 없군. 요시메상이 유 팀장을 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러나 방심하지 말아. 비즈니스에서는 영원한 내 편은 없거든.”
채 상무는 세라를 자극했다.
“저도 잘 알아요. 가온에서 우리한테 증정하기로 한 팔레트 샘플을 경쟁업체에 먼저 넘겼던 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세라가 의도적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건강은 괜찮나.”
회사에서 하혈했던 일을 염두하고 한 말 같았다.
“네. 아무 문제없어요.”
“그 또한 다행이네.”
채 상무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식적으로 경계했다.
세라는 잠들기 전에 옥상에 있는 공용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서울과 다를 게 없었던 하늘은 이제 완벽한 이국의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에 떠 있는 작은달을 가렸다. 달을 가려도 주위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옥상에 켜놓은 작은 전구들과 주위 건물의 옥탑에서 흘러내리는 네온의 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두운 하늘에 하얀 손등이 쭈글쭈글 빛났다. 순간 거죽이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상체를 곧게 세워 손등을 매만졌다. 채 상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야. 세라는 물속으로 낮게 들어갔다.
세라가 요시메와 계약을 했다는 소식에 캡틴과 아카시는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축하 파티를 하자고 했다. 카페 문 닫을 시간이 되자 아카시와 하루마는 케이크와 음료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도경은 언제 와요?”
아카시가 시계를 보고 캡틴에게 물었다.
“요새 공모전 때문에 일찍 나갔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더라고. 곧 오겠지. 먼저 시작합시다.”
캡틴이 마른안주를 챙겨 테이블로 왔다.
“자, 그럼 사업가로서의 세라 씨의 첫걸음을 축하합시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멈췄지만, 잔바람은 여전히 카페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세라는 카페 문소리가 날 때마다 쳐다봤다. 도경은 축하 자리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세라는 화장수 샘플을 만들어 테스트에 들어갔고 화장품 가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장 사람들에게 샘플을 나눠주고 반응을 살폈다.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샘플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시장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 대신 화장수에 관한 얘기를 해주길 바랐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먼저 들른 곳은 과일꼬치 집이었다. 과일꼬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정신없이 꼬치를 내어주는 주인아주머니와 계속 과일을 꼬치에 끼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화장수 얘기를 꺼내는 게 면구스러웠다. 다른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뒤돌아 나왔다. 속옷 가게는 외출 중이라는 안내판이 붙었고 와규집 사장은 고기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생선 가게로 갔다. 선풍기에 매단 길게 자른 종이가 생선 위를 돌며 파리를 쫓고 있었다. 어제 찾아갔을 때 주인 여자는 오늘 와달라며 부탁까지 했다. 주인 여자는 어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가게로 나오고는 했는데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틀어 놓으면 아들은 떼쓰지 않고 조용했다. 생선 가게로 막 들어서는데 가게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도경이 주인 여자의 손등을 카메라 모니터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도경에게 손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세라는 심호흡을 하며 가게를 뒤돌아 나왔다. 공모전을 위해서라면 피사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동이 비굴해 보였다.
“니코리, 왜 이렇게 기운이 없니?”
요시메가 말했다.
“샘플을 준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말이 없어요.”
“그럼 직접 물어봐야지.”
요시메가 엉킨 실타래를 풀며 말했다.
“그게…….”
세라가 한숨을 쉬었다.
요시메는 실타래가 곧게 풀리자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다시 감았다.
“여편네들이 몇 개씩 샘플 가져갈 때는 언제고. 안 되겠다. 앞장서봐.”
요시메는 갑자기 격양된 목소리로 나무랐다. 세라는 소매를 걷어붙이는 요시메를 겨우 달랬다.
집으로 가는 길에 카페에 앉아 있는 도경을 보았다. 생선 가게 주인과 머리를 맞대고 있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세라가 옆에 앉은 줄도 모르고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만 계속 돌려봤다.
“이제 생선 뭐 이런 것도 찍나 봐요.”
세라는 차마 여자의 신체도 찍느냐고 하려다 돌려 말했다.
도경은 급하게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뭡니까. 사람 놀라게. 그런데 생선을 찍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낮에 생선 가게에 있는 걸 봤어요. 거기서도 정신없이 찍던데요.”
“그건, 생선이 아니라…….”
도경은 말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라는 생선이 아니라며 말을 더 잇지 못하는 도경에게 한없이 실망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세라와 도경은 동시에 자신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잘 지내니?”
세라는 화면에 뜬 발신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강호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이전과는 달리 절제되고 차분했다. 넘쳐흐르는 감정이 없었으며 담담한 문자 속에 체념의 그림자가 보였다. 약해지면 안 돼. 세라는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사카의 여름은 30도를 넘지 않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쾌적한 날이 이어졌다. 세라는 방 창문을 활짝 열고 기지개를 켰다. 한눈에 구로몬 시장의 돔 지붕이 눈앞에 펼쳐졌다. 맑고 투명한 공기는 지붕 아래 북적이는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전해주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에그샌드위치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노트북을 켰다. 사업 계획서를 차근히 살폈다. 시장 사람들을 상대로 시제품을 테스트하면 반응에 따라 다른 추출물이나 첨가물을 추가할 계획이었다. 방문 판매로 시작해서 온라인 판로를 확장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다.
시장 사람들은 세라가 지나가면 불러 세웠다. 어떤 이는 화장수를 써보지도 않고 겉치레로 인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샘플 하나를 더 얻기 위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제품의 효과를 단기간에 바라는 건 아니었다. 화장수에 관심을 가지고 리뷰를 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채 상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세라는 채 상무가 주고 간 명함을 쥐고 한참 생각했다.
세라는 오후 늦게 생선 가게 주인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카페로 내려갔다. 여자는 테이블 옆에 유모차를 세워놓고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세라 씨, 여기요.”
여자가 세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살구색 립스틱을 바르고 느슨하게 흘러 내린 머리를 매만지는 여자의 모습은 낮에 장사할 때와는 달랐다. 유모차를 탄 어린 아들은 한 손에 장난감을 들고 잠들어 있었다. 세라는 도경이 여자와 긴밀하게 사진을 찍던 게 계속 생각났다.
“내가 너무 늦었지요? 장사하다가 애가 칭얼대면 한 번씩 어르고,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니 화장품 샘플이 어땠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세라 씨가 가게 앞을 지나가면 얘기해야지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금세 까먹지 뭐예요.”
세라는 말속의 의중을 헤아리려 귀담아들었다.
“괜찮아요. 바쁘신데요. 화장수는 사용해 보셨어요?”
주인 여자는 대뜸 손등을 보여줬다.
“여기 기미 같은 거 보이죠.”
세라는 여자의 손등 위를 자세히 살폈다. 커다란 반구형 흔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기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흔적이 있긴 있네요.”
“내가 삼 주 정도를 여기에다 발랐는데…….”
주인 여자는 세라의 눈치를 봤다.
“일하면서 얼굴보다는 손에 바르는 게 훨씬 수월하니까 그런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세라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주인 여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아침에 얼굴에 바르는 것보다는 손등에라도 수시로 발랐을 때의 효과가 더 궁금하기는 했다.
“기미가 옅어졌어요. 여기 경계가 희미해지더라고요."
여자는 흔적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샘플을 좀 더 구할 수 있어요? 친구들도 테스트해보고 싶다고 해서요.”
세라는 효과가 있다는 말에 고무적이었다. 여자는 시장 골목의 상인 중에서도 젊은 편에 속했고 샘플을 얻기 위해 거짓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젊은 여자들의 반응이 궁금했기에 그녀의 호의적인 태도에 자신감을 얻었다. 여자가 말한 것처럼 손등에 있는 기미가 옅어진 게 사실이라면 피부노화를 늦추는 데 효과적인 게 증명된 셈이었다. 채 상무가 찾아올 정도면 요시메의 추출물은 차별화된 성분이 있는 게 분명했다.
세라는 매일 밤 화장수를 얼굴에 바르고 다음 날 아침에 달라진 낯빛을 상상했다. 정 박사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자신을 보고 놀라는 장면도 그려봤다. 기적을 믿지 않는다던 그의 말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주인 여자가 카페를 나가면서 말했다.
“참, 그 친구분 있잖아요. 그분이 그날 사진을 찍어주지 않았으면 비교할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친구요?
"그 사진 찍는 분 있잖아요."
"그 남자가 이걸 찍은 거라고요?”
“그렇다니까요. 이거 봐요.”
주인 여자는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테스트 전과 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세라는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도경이 유부녀와 노닥거리는 게 한심해 보여서 삐딱하게 굴었었다. 세라는 구석으로 숨고만 싶었다.
한동안 화장수 샘플만 받아 가던 시장 사람들이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세라는 방문 판매를 목적으로 조금씩 고객을 유치해 나갔다. 주변 상가 사람들에게도 입소문이 전해져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이 요시메 가게를 찾아왔다. 고객이 늘어가는 희열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세라는 라멘집에서 일이 끝나는 대로 요시메 가게에 들러 화장수를 만들었다. 녹차와 라벤더오일 등 첨가물을 넣어 종류도 늘려나갔다.
“세라 씨, 주문도 늘어가는데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건 무리예요. 내가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라멘집은 그만두는 게 어때요?”
어느 날 요시메가 말했다.
세라는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블로그를 만들어 인터넷 공동 구매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때까지 겸업할 생각이었지만 밤늦게 화장수를 조제하고 나면 다음 날 라멘집에서 졸음이 몰려왔다.
“방문 판매 고객들이 꾸준히 는다는 건 입소문을 탄다는 거니까 이런 추세면 지금보다 훨씬 바빠질 거예요. ”
일을 끝내고 카페에 들른 세라에게 캡틴이 말했다.
"라멘집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세라가 말했다.
“그래도 방문 판매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 계획이 있어요?”
세라는 머릿속에 그려놓았던 그림을 차례대로 끄집어내 캡틴에게 설명했다.
“우선 블로그에 홍보하면서 스마트 스토어 비즈니스로 시작해 보려고요. 요시메상이 투자자가 되겠다고 하셨지만, 아직은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캡틴은 식기를 정리한 후 의자에 앉았다.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면 재고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배송문제도 있는데 여긴 한국과는 달라요. 온라인 쇼핑의 천국인 한국과는 비교할 수가 없죠.”
“그래서 말인데요. 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요.”
캡틴과 일행은 카페 영업이 끝나는 대로 도톤보리에 있는 선술집으로 향했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먼지처럼 하루를 털어 내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캡틴이 들어가자 직원이 바로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중년 여자가 테이블로 다가와 캡틴을 보고 웃었다. 여자는 귓불이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에 커다란 진주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몇 가지 요리를 추천하고 캡틴과 얘기하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그녀가 돌아가자 아카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는 분이에요?”
“여기 사장인데, 다케시상 동생이야.”
세라는 다케시한테 라멘집을 오픈할 때 동생이 많이 도와줬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난 또.”
아카시는 혹시 캡틴의 여자친구는 아닐까 하고 넘겨짚다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세라 씨가 막상 서울로 간다고 하니 서운한데요. 한국 친구가 있어서 좋았는데. 물론 도경 씨도 있지만.”
캡틴이 두 손을 모으고 아쉬운 말들을 쏟아내며 세라와 도경을 번갈아 쳐다봤다.
술과 안주가 나오자 아카시가 잔을 들었다.
“세라 씨, 한국에 가더라도 가끔 놀러 와요. 여기 잊지 말고요.”
“그럼요.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두 분 다 저에게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리고…….”
세라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갑자기 울컥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어어, 코피!”
아카시와 캡틴이 휴지를 찾는 동안 옆에 앉은 도경이 휴지 뭉치를 만들어 세라의 코에 갖다 댔다.
“요새 무리한다 싶었는데, 한국 가면 일단 좀 쉬어요. 건강도 좀 챙기고.”
캡틴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라를 다독였다.
세라는 머쓱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화제를 돌렸다.
“서울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그래요. 서울에서 한 번 봅시다. 도경도 서울에 가면 연락하고.”
캡틴은 지갑 속에서 명함을 꺼내 하나씩 돌렸다. 서울과 오사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소가 적혀있었다. 자정이 지나 술집에서 나왔다. 캡틴과 아카시는 어깨동무하며 저만치 앞서갔다. 세라는 도경과 함께 나란히 발을 맞췄다. 밤낮없이 뛰고 있는 글리코상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세라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멘집을 향해 이 길을 걷고 뛰고 또 걸었었다. 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길가에 박혀있었다. 도톤보리 강 위에서 춤추던 빗방울도 추억 속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지난번 일은 고마웠어요. 그 사진들이 아니었더라면 제품에 대한 확신이 안 섰을 거예요.”
세라는 도경에게 진심을 건넸다.
“그거야 뭐, 내가 할 줄 아는 게 사진이니까, 거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맙시다.”
도경은 쑥스러워하며 헛기침을 연거푸 했다.
숙소로 돌아온 세라는 게스트하우스 옥상으로 올라갔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환한 달빛에 고개를 숙였다. 달빛이 구로몬 시장 지붕 위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달빛은 밝았고 하늘은 유난히도 어두운 그런 밤이었다. 혼자라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다가도 실제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밀려왔었다. 이제 시장 골목을 방황하던 그 시간을 모두 구로몬 지붕 아래로 모두 흘려보냈다. 달빛을 향해 손을 폈다. 손가락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노인의 거친 손등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젠 안녕, 오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