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당신의 안녕

by 조선희




새벽부터 내린 비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세라는 침대에 모로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쳐다봤다. 얼기설기 꼬인 전깃줄에 매달린 빗방울이 그네를 타고 있었다. 전선 위에 새가 날아오를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그녀도 불안하기만 했다. 방바닥에 흐트러진 가발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더욱 심란했다.


어젯밤 강호는 운전하는 내내 말을 아꼈다. 말을 아낀다기보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영지를 먼저 내려주고 집으로 가면서 강호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너 뭐냐.”

강호가 입을 뗐다.

“내가 뭘.”

세라는 손가락으로 모자를 간지럽히듯 만지고 있었다.

“왜 모른 척하냐고.”

“…….”

“이유나 들어보자.”

강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한 건 아니야.”

세라는 자신도 헷갈렸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너는 그럴 때 없어?”

“왜 영지 친구인 척했냐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래, 너 몰라봤잖아. 영지가 말하기 전까지 몰랐잖아! 내가 전에 뭐랬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먼저 알아봐 달라고 했잖아!”

세라는 소리를 질러놓고 도리어 흠칫 놀랐다. 오사카로 떠나기 전 집 앞에서 강호에게 했던 말을, 눈이 펑펑 쏟아지던 골목길에서 눈 속의 메아리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버렸다.


카톡이 온 줄도 모르고 세라는 멍하니 천장만 보고 누웠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며 어젯밤 강호에게 했던 말들을 기억에서 떨쳐냈다. 카톡창에는 영지가 사진 전시회 무료 티켓을 올렸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톡방에 올린 관람권 사진에는 ‘당신의 안녕’이라는 부제와 함께 공모전 수상작의 전시회라고 쓰여 있었다.

- 난 이번 주말에 회사 연수 있어서 못 갈듯. 갔다 온 사람 나중에 밥 사라.

영지의 카톡만 덩그러니 방을 지켰다.


세라는 하루마에게 발주서를 받고 나서 이 주전에 주문한 화장품 용기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배송조회도 안 되자 용기 회사에 전화했다. 아침부터 계속 통화 중인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급기야 저녁 무렵 즈음 용기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머릿속이 까무룩 해졌다. 마음이 급해지자 엘라화장품을 다닐 때 거래하던 가온을 찾았다.


“말해 뭐 해, 나야 유 팀장 돕고 싶지. 수량도 얼마 안 되고, 근데 그게 말이야. 채 상무가 알면 내가 좀……. 알잖아. 채 상무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말이지.”

“사장님, 제가 상무님이랑 얘기해 볼게요.”

“그렇게 해주면 내가 좀 수월하고.”

가온 사장의 너스레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채 상무가 아무리 규모가 작은 회사라도 엘라화장품이 타사와 같은 용기를 쓴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선을 그었다. 세라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제품명과 라벨이 다르니 엘라화장품이 온라인 쇼핑몰의 신생 업체와 같은 용기를 쓴다고 해서 소비자가 알아볼 리는 없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채 상무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번호를 누르려다 잠시 숨을 골랐다.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채 상무의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걸음을 멈추고 세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는 인상을 쓰며 이렇게 말하겠지. 유 팀장, 지금 제정신인가? 절대 안 돼! 세라는 생각만 해도 움찔했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졌다.


“여보세요.”

간신히 받은 듯한 목소리에 거친 숨소리까지 들렸다.

“상무님. 세라 예요.”

“유 팀장, 잠시만……. 엄마가 해줄게. 기다릴래?”

멀리서 채 상무가 지우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세라는 시계를 봤다. 9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세라는 가온의 사장과 통화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사정을 얘기했다. 채 상무는 귀 기울이는 것 같았지만 중간중간에 지우에게 무언가를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무님?”

“듣고 있네. 계속하게.”

“가온 사장님이 중간에서 난처해하시길래 제가 말씀드리겠다고 했어요.”

“그게 전분가?”

“네? 네…….”

세라는 말꼬리를 내렸다.

“유 팀장도 잘 알겠지만, 엘라에서 그 정도 수량이 빠진다고 해서 무슨 문제 될 게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라벨이나 용기 포장 수준도 개인 사업자와 어떻게 비교하지? 요시메상의 사업권을 따냈다고 엘라를 우습게 보는 건가?”


채 상무의 반응은 의외였다. 경쟁업체를 의식하듯 말 한마디에 엘라의 이름을 들먹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빈 용기라도 엘라에서 제품을 고려해 용기의 원료까지 신경 써서 발주하는 걸 아는데 제가 급하다고 그대로 쓰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이건 상무님께 배운 것이기도 하고요.”

“으음.”


채 상무는 까다로운 상사이긴 했지만 무슨 일이건 절차와 결과는 공정하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했었다.


“충고하나 할까? 사업을 하려면 눈에 보이는 것만 챙기면 안 돼.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이번처럼 주문을 받아놓고도 용기 때문에 놓치는 경우가 생기게 되지. 항상 백업을 생각해야지. 그리고 거래처가 부도 일발인 것도 모르고 있는 그 정보망은 하든 쓸모없는 것일세. 이참에 생각해 보고 용기 회사를 바꿔보는 건 어떤지 고려해 보게. 내가 가온 사장님한테는 따로 얘기해 놓을 테니…….”

갑자기 채 상무의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 지우야, 그건 건들지 말라니까.”


그녀에게서 지우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상냥함이 흘러나왔다.


세라는 일이 해결되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수년간 함께 일했던 채 상무가 완벽하게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배신이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질주하던 그녀를 본보기로 세라는 남은 자신의 생을 그려 넣었었다. 그 누구의 아내도 아닌 엄마도 아닌 철저히 혼자인 사람, 그녀가 했다면 자신도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다고, 그래도 멋있을 수 있다고 위안했었다. 지금 세라의 눈앞엔 칼날이 무뎌진, 모성의 둥근 현을 켜고 있는 채 상무의 모습이 전부였다.






강호가 사진 전시회에 같이 가자고 문자를 보내온 뒤로 세라의 마음은 공중에 떠다니는 풍선 같았다. 세라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앞에서 전철역 쪽을 바라봤다. 강호는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돼서 나타났다. 두 사람은 티켓팅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초입부터 걸려있는 사진들은 공모전 당선작에 걸맞게 열정적이고 비장했다. 주제와 의미가 한눈에 보이는 사진도 있었고 난해한 것도 있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운 조명에 비친 피사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전시회 타이틀이 왜 ‘당신의 안녕’일까?”

강호가 천천히 사진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기엔 사진들이 너무 혁명적이지 않아? 주제가 명확하고 작가가 뭘 말하려는지 의도가 분명해 보여.”

세라가 그물에 걸린 쓰레기를 들어 올리는 늙은 어부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마지막 섹션을 돌 때 두 사람은 야경이 전면에 펼쳐진 어느 사진 앞에 섰다.

“여기 봐. 작품명이었네.”


액자 밑에 '당신의 안녕' 이라는 제목이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공중에 점같이 박혀있는 불빛이 지구에 내려앉은 은하수 같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뒤태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하늘거렸다. 세라는 여자를 보다가 우메다 하늘 정원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고 찬란했던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착각이 들었다. 저 여자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시공간을 넘나드는 야경을 보니 한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야경 끝내준다. 너도 여기 가봤니? ”

강호는 사진 옆에 해설지를 보며 말했다.

“…….”

“세라야.”

강호가 세라를 툭 쳤다.

“어?”

세라의 눈동자는 사진에 멈춰 있었다.

“가봤어? 근데 저 여자가 바라보는 게 뭘까.”

“…….”

“무슨 생각해?”

“뭐, 뭐라고 했어?”

세라는 딴생각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되물었다.

“저 여자 말이야. 야경을 보는 게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지 않아?”

강호가 물었다.


여자의 얼굴은 보는 각도에 따라 빌딩의 불빛과 수많은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얼비친 흔적으로 유리창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혹시, 저, 저 여자 얼굴이 보이니?”

세라가 말을 더듬었다.

“글쎄.”

강호가 사진에 더 가까이 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가지 마!”

세라는 강호의 팔을 붙잡았다.


도경은 동호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꽃다발과 축하 인사를 받았다. 기념촬영이 끝나고 사람들은 흩어져 전시회를 둘러봤다. 몇몇 관람객들이 도경에게 사진을 찍자며 다가왔다.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노란색 스카프를 늘어뜨린 여자가 도경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하늘 정원에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실사보다 사진이 훨씬 드라마틱하네요”

“감사합니다.”

도경은 사진을 찍으러 온 관람객이라 생각하고 여자 옆에 나란히 섰다.

“아니요. 저는.”

여자가 한 걸음 떨어져 도경에게 명함을 건넸다. 도경은 렌즈아트라는 잡지사 이름을 보고 며칠 전 인터뷰 약속을 했던 게 생각나 민망했다. 기자는 사진 앞으로 다가가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의 안녕이라, 다른 입상작들하고 확실히 다르네요. 차별화 전략인가요?”

“네?”

도경은 기자의 질문에 당황했다.

“공모전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작가의 개념이나 의식이 렌즈에 걸려야 하잖아요. 전달하는 메시지도 있어야 하고. 그렇게 보면 작가님의 작품은 뭐랄까, 개념이나 의식보다는 감정에 충실한 것 같은데요. 결혼하셨어요?

기자는 핸드폰으로 메모하며 상투적으로 물었다.

“개념이나 의식 좋죠. 하지만 그런 건 사진이 아니어도 우리 일상에서 항상 마주치는 것들이잖아요. 그런 사진을 기대하셨다면 SNS를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도경의 말에 기자는 메모를 하다가 멈칫했다.

“아, 오해가 있었나 보네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언짢았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진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보다는 솔직하신데요. 사람들은 야경에 감탄하다가 결국에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하거든요.”

도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여자의 뒷모습과 야경이 그녀의 삶이 투사된 것처럼 느껴졌었어요. 야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누구에게나 다 아름다워 보이지 않은 것처럼 자기만 아는 진실이 있잖아요.”

“그럼,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여자의 얼굴은 의도하신 건가요?”

도경은 사진 속 여자를 응시했다.

“우연히 보게 됐어요.”

기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진 속의 여자분은 아는 분인가요?”

“제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군요.”

기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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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은 입구에서 전시회 책자를 보는 남녀에게 시선이 갔다. 남자는 여자에게 연신 말을 건넸고 여자는 책자만 들여다봤다. 조명 아래서 여자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자 옆모습이 드러났다.


“보충할 내용이 있으면 따로 연락드려도 될까요?”

기자가 말했다.

“작가님?”

“아, 예. 그럼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도경의 시선은 두 남녀에게 쏠려있었다. 기자와 인사를 나눈 뒤 그들에게 걸어갔다.

“유…… 세라 씨?”

세라와 강호가 동시에 돌아섰다.

“혹시나 했는데, 맞네요!”

세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자신을 모델로 한 사진을 봤을 때보다 더 긴장했다.

“잘 지냈어요?”

도경은 그녀의 깊은 눈과 뒤로 넘긴 머리카락으로 찬찬히 시선을 옮겼다.

“입상하신 거 축하…….”

세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경에게 손짓했다.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세라가 멋쩍게 말했다.

“혹시 지금 갈 건가요? 시간 괜찮으면 커피 마시고 갈래요? 함께…….”

도경은 물러 서 있는 강호에게도 의중을 물었다.

강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 괜찮아.”

“저는 하도경이라고 합니다.”

도경이 강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한강호입니다.”

강호는 도경에게 손을 내밀며 세라를 곁눈질했다.


세라는 강호와 전시회장을 빠져나와 근처 카페로 갔다. 도경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그를 떠올렸다. 매일 아침 커피를 시켜놓고 마른 헝겊으로 카메라를 닦던 고집스러운 곱슬머리의 남자가 아니었다. 수그리고 있던 어깨는 한껏 펴졌고 검은색 고무줄을 칭칭 감고 있던 손목에는 길이 잘 든 가죽 시계가 채워졌다. 카페에 앉아 윤나게 문지르던 카메라는 결국 알라딘의 램프처럼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대상작이라는 타이틀 아래 ‘당신의 안녕’이란 문구가 야경보다 선명한 불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다발도 그의 작품 앞에서 빛났다. 세라는 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는 걸 확신했다.


커피 주문 벨이 번쩍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지글거렸다.


“하도경 작가는 어떻게 알아?”

강호가 세라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사카에 있을 때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살았었어.”

세라가 휴지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옆집 사람?”

강호는 세라의 눈치를 살폈다. 도경이 세라를 바라보던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세라는 말없이 커피만 마시다가 손부채로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왜 그렇게 땀을 흘려.”

강호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좀 답답하지 않아?”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었다 다시 풀며 얼굴에 촘촘히 올라온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뒤통수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따가운 통증과 뜨거운 열감이 전해졌다. 감전된 듯 전기가 온몸을 관통하다가 회오리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강호가 세라의 인중 사이로 번지는 피를 보고 휴지를 뭉텅이로 만들어 그녀의 코에 갖다 댔다. 세라는 피 묻은 손을 조금씩 떨었다.


“괜찮아.”

세라가 당황하자 강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휴지 뭉텅이가 빨갛게 젖어 들어갔다.

“어지러……워.”

“괜찮아? 세라야, 유세라!”

세라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강호가 세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신 좀 차려봐. 안 되겠다. 병원 가자.”

세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잡았다.

“한신 병원으로 가줘.”

“한신 병원?”

강호는 핸드폰으로 한신 병원을 검색했다.


카페 문이 열리면서 도경이 들어왔다. 세라를 발견하고 다가오던 도경은 테이블 위 핏자국을 보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도경은 병원을 검색하고 있는 강호를 밀치며 축 처진 세라를 둘러업었다.

“세라 씨! 정신 좀 차려봐요.”



칼날 같은 저녁이었다. 무엇이라도 베지 않으면 아침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세라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나리던, 눈의 속살이 그의 가느다란 눈썹에서 희미하게 떨리던 그 날밤을 기억했다. 마지막이었던 뜨거운 포옹은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아직도 가슴속에서 타올랐다. 눈을 떴을 때 하얀 천장에 전구가 알처럼 박혀있었다. 전구의 불빛 위로 정 박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유 세라 씨, 정신이 들어요?”

정 박사는 세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네. 여기가.”

“여기, 응급실이지. 이거 서운한데요. 응급실에나 와야 얼굴을 볼 수 있네.”

정 박사는 강호를 등지고 서서 세라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누구?”

“친구예요.”

세라는 민망한 나머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이 움직여 욱신거렸다.

“빈혈이 아주 심해요. 철분 약을 처방해 줄 테니까 잊지 말고 먹어요. 두 달 후에 다시 피검사해 봅시다. 다른 증상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정 박사는 세라에게 외래 진료일을 잡아주고 돌아갔다. 세라가 침상에서 일어나자 뒤로 물러서 있던 강호가 심상치 않은 얼굴로 다가왔다.

“우리 얘기 좀 해.”

세라는 강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은 듯 주위를 둘러봤다.

“도경 씨는?”

강호는 세라가 도경을 찾자 가슴속에서 작은 파동을 느꼈다. 처음으로 세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영지는 한남동으로 데리러 오라며 새는 발음으로 전화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그곳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강호는 전화를 끊으려다 복잡한 심경을 털어 내려 차를 몰고 나갔다. 앞 유리창에 도경이 세라를 업고 뛰던 모습이 비에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영지가 알려준 주소는 어느 주점이었다. 흡연자들 사이에서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있는 영지를 발견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영지가 비틀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영지에게서 술과 안주가 뒤섞인 괴상한 냄새가 났다. 쾌쾌한 술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강호는 창문을 열고 송풍 다이얼을 높게 돌렸다. 영지의 블라우스 단추가 열려 그 사이로 가슴골이 보였다. 뒷좌석에서 얇은 담요를 꺼내 영지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영지는 혀가 꼬인 채로 중얼거렸다. 차 안에 있던 생수를 마시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강호를 쳐다봤다.


“야, 한강호!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고.”

“이 밤에 데리러 왔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나 마음이 복잡하니까 건들지 마라.”

“네가 뭐가 복잡해? 고백한 나보다 더 복잡해?”

“그만해.”

강호는 속도를 줄였다.

“너, 세라 때문이야?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영지는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등받이를 뒤로 눕혔다.

“말해봐, 무슨 소리야?”

“예전의 세라가 아니라고. 모르겠니? 뭔가 이상하다고. 정신 차리라고 바보야!”

영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세라 얘기가 왜 나와?”

“개는 안 된다고. 세라는…… 병에 걸렸…….”

영지가 자기가 한 말에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강호가 차선을 바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영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 여기서 내릴게. 조심해서 가.”

강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영지는 차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강호는 전방만 주시했다. 단근질하듯 이마가 화끈거렸고 꽉 깨문 입술은 벌겋게 달아올랐었다.


침대 머리맡에 일어나 앉았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물처럼 엉킨 생각을 떨쳐내고 싶었다. 영지가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 헛말 하는 걸 보면 이번에도 그런 거라 믿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조로증이라고 치자 여러 연관 검색어가 떴다. 관련된 기사와 논문 내용을 찾는데 손가락이 떨렸다. 성인 조로증에 관련된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강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투병 중인 환자의 얼굴 위로 세라가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세라가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한신 병원으로 가자고 한 것도 그렇고 응급실에 도착한 그녀를 대하는 의사나 간호사의 태도도 이력이 난 듯 자연스러웠다. 병원을 찾은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세라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지만, 빈혈 수치가 낮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간호사는 자기 볼일을 봤다.


이태원에 갔을 때도 영지의 친구인 척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과호흡 하는 바람에 놀라기도 했다. 세라는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몸을 창가 쪽으로 돌려 가방에서 약통과 생수를 꺼내 마셨다. 작고 하얀 원통이었는데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슨 약이냐고 묻자 영양제라고만 답했었다. 세라는 새벽에 영양제를 챙겨 먹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사카에서 돌아온 세라는 많이 말랐다. 분명 살이 빠진 것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안경을 썼어도 움푹 꺼진 눈 밑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푸석했다. 그래도 표정은 밝으니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라는 동안이라 제 나이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었다. 강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핸드폰을 이불 위로 던졌다. 그럴 리가 없어.


강호는 함박눈이 내리던 날 세라와 깊게 포옹하던 묵직한 여운이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 고여있었다.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장례식 때 여린 손으로 강호의 커다란 등을 감싸고 어깨를 토닥이던 그때부터일지도 몰랐다. 온전히 세라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건 어딜 가더라도 부메랑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곁에 머무를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이제 부메랑은 제자리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세라가 라이카 매장에 도착했을 때 도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좀 어떠냐며 머뭇거렸다. 세라는 전시회 중에 병원까지 동행한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대신 밥을 사겠다고 했다. 진열장에 놓인 카메라를 하나씩 구경했다. 아래 적힌 가격표를 보고 흠칫 놀랐다. 도경이 배터리 덮개를 테이프로 붙이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님, 뭐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직원이 다가왔다.

“혹시 이 카메라가 있나요. 모델 번호는 모르겠고요. 사진은 있어요. 여기.”

세라는 핸드폰으로 검색한 카메라를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이 모델요? 근데 어쩌죠? 매장에는 없는데 오래된 모델이라 구하기 힘들 텐데요.”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본사 쪽으로 알아볼 수는 있는데 본사에 있다고 하더라도 독일에서 오려면 한참 걸리고 배송비며 비용 문제도 있고 해서…….”

세라는 카메라 가격에 배송비까지 고민하다가 도경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 모델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본사와 확인하는 대로 전화를 주겠다던 매장직원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세라는 인터넷 검색창에 직원이 알려준 모델 번호를 쳤다. 중고로 나온 것 외에는 새 제품을 찾기란 힘들었다. 구매 대행사에도 알아봤지만, 확답을 주는 곳은 없었다.


가끔 정체된 일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풀릴 때가 있다. 가온의 사장이 세라와 함께 일하게 된 참에 채 상무와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세라는 채 상무와 일정을 조율하던 중 그녀가 바이어스도르프사와 회의 때문에 독일 출장이 잡혀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독일에서 자연 친화적인 화장품 원료를 사용하는 회사로 유명했기에 세라가 엘라화장품에 근무할 때도 윗선에서 협업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인 업체였다. 채 상무가 거래를 성사시킨 것도 축하할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독일에 간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카메라?”

채 상무는 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여기선 구할 수 없다고 해서요.”

세라는 채 상무에게 부탁할 심산이었다.

“나야 뭐 안 될 게 있나. 카메라 정보를 주게. 근데 사진에도 관심이 있었나?”

“아니요. 선물하려고요.”

“선물을?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채 상무는 그런 고가의 선물을 줄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오사카에 있을 때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아, 그래?”

채 상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주 후에 세라는 채 상무를 만났다. 그녀를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지우가 세라에게 알은체를 했다. 채 상무는 먼저 인사하는 지우가 대견해 카메라를 전해주는 걸 잊고 있었다. 세라는 채 상무가 지우에게 칭찬하도록 기다렸다. 채 상무는 한참 지우 얘기를 하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카메라를 꺼냈다. 도경이 테이프로 배터리 덮개를 덕지덕지 붙이고 분신처럼 여기던 그 카메라였다. 세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되길 바라네.”

채 상무가 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아줌마 카메라예요?”

지우가 끼어들었다.

“지우야, 아줌마 아니야. 누나지.”

채 상무가 무안해서 세라를 쳐다봤다.


세라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당황스러웠다. 비록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비밀을 들킨 것 같아 시름이 깊어졌다. 차라리 솔직하게 투병 중이라고 말할까. 그러면 상대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에 마음 졸이는 일은 없겠지. 채 상무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독일제 천연화장수와 다양한 테라피 오일 샘플이 들어있는 뷰티 박스였다. 지우가 해맑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요리조리 만지며 관심을 보였다. 오른쪽 가슴에 단 고래 모양의 작은 와펜을 빼더니 카메라 줄에 옮겨 달았다. 세라가 이게 뭐냐고 지우에게 물었다. 지우는 볼에 가득 사탕을 물고 한두 마디씩 쏟아냈다.


“이 고래 사진을 진짜 찍으면 고래밥 열 개를 준대.”


채 상무와 세라는 서로 얼굴을 보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루프탑에 있는 레스토랑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불 꺼진 빌딩 창문에도 네온사인이 얼비쳐 수많은 전구가 소리 없이 춤을 추었다. 도경이 창가 쪽 테이블에서 손을 들었다. 세라는 쇼핑백을 옆에 놓고 앉았다.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낮은 조도가 그녀를 조금은 어둡게 비췄다. 피사체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도경의 눈매가 부담스러워 마주 앉은 시간이 어색할까 걱정했었다. 그나마 어두운 조명이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조명에 반짝이는 그의 어색한 눈빛이 수줍어 보이기까지 했다. 세라가 선물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삽화 - 37화.jpg




“이거.”

“뭐예요?”

도경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예전에 도톤보리 다리에서 카메라를 떨어뜨렸었잖아요. 그때 배터리 덮개가 깨졌다고…….”

“아, 그거요? 원래 헐거웠던 겁니다. 마지막에 떨어지면서 두 동강 난 것뿐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설마…….”

“병원에 갔던 일도 그렇고요.”


세라는 상기된 그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언제부턴가 도경이 자신의 비밀을 알거라 생각했다. 그는 항상 렌즈를 통해 사람을 봤고 렌즈를 통해 말을 걸어왔다. 그도 자신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길 바랐다. 도경은 카메라를 들고 어쩔 줄 몰라했다. 세라를 업고 병원으로 갔을 때 어쩌면 예견된 일이라 여겼다. 세라의 사진을 현상할 때마다 달리 보이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 해야죠. 실은 그 사진 속에 여자의 뒷모습, 세라 씨 맞아요. 미리 말하지 못한 점 사과할게요. 혹시 기분 나빠요?”


세라는 사진 속 여자에 대해 모른 척하고 싶었다. 강호도 그 누구도 그녀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주길 바랐다. 피사체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줬으면 했다.


“이젠 괜찮아요. 근데 정말 당신이 저의 안녕을 바라고 있었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조명 때문인지 도경의 낯이 붉게 타올랐다.

“그러면 안, 됩니까?”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음식 사이로 두 사람의 어색한 손이 마주쳤다.

“제가 하죠.”

도경은 세라 앞으로 샐러드 접시를 옮겨놓았다.

도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기자님.…… 그건 제가 인터뷰한 내용이 아닙니다만.”


도경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자는 이번 호에 사진전 기사를 실었는데 사진 속 모델에 관해 오보가 났다고 했다. 도경은 기자가 여자에 관해 물었을 때 세라의 입장까지 생각지 못한 점에 아차 했다. 유세라와 내가 연인관계라니. 기자는 수정본이 최종적으로 반영되지 못해 사과했지만, 말투에서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최종본이라면 기자가 임의대로 스캔들을 만들어 놓고 나중에 수정했다는 얘긴데 그조차도 어이없었다. 이런 실수를 의례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에 익숙한 것 같았고 기자는 다음 회에 정정보도를 내겠다는 약속으로 마무리했다.


세라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잔잔하게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세라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처했다. 카페 조명에 괜히 얼굴만 뜨거워졌다. 렌즈아트는 사진 전문 잡지라 일반인에게는 대중적이지 않으니 그만큼 독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연예인도 아니고 공모전 당선작가가 모델과 무슨 관계인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도경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


“무슨 일 있어요?"

세라는 기분 좋게 허밍 하다가 물었다.

“아, 별거 아닙니다.”

도경이 우물대다 이어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문제가 좀 생겼어요.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오보가 났어요. 이미 발간돼서 다음 회에 정정보도 한다고 합니다.”

“오보의 내용이 뭔데요?”

세라는 포크로 샐러드를 집으며 물었다.

“그게…….”

그녀는 도경이 머뭇댄다고 생각했다.

“곤란하시면 말 안 해도 돼요.”

“아니요. 세라 씨도 알아야 할 내용이에요. 우, 우리가 연인관계랍니다.”


세라가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헛짚었다. 접시가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지나갔다. 세라는 괜찮다며 호기롭게 넘어가야 하는지 불쾌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짧은 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의 실수도 아닌데 카메라 선물까지 해놓고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안녕이란 제목 때문에 기자가 그렇게 추측했나 보네요.”

“제 불찰인 거죠. 미안해요. 다음 달에 정정 기사가 나갈 겁니다.”


도경은 세라가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을 보여서 연인관계라는 말에 의미를 부여한 자신이 민망했다. 하지만 그는 월정리부터 아니 전날 공항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렌터카에 오를 때부터 카메라에 그녀가 들어왔었다. 그날부터였다. 우연한 만남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근데, 이게 뭐죠?”

도경이 카메라 줄에 달린 고래 모양의 작은 와펜을 손으로 만졌다.

“아! 그게 달려있었네요. 고래 사진을 찍어오면 고래밥 열 개를 준대요.”

“네?”

“아니에요. 어떤 꼬마가 한 말이에요. 그건 그냥 떼어버리셔도 돼요.”


세라는 지우가 한 말을 떠올리고는 웃어버렸다. 채 상무는 지우가 고래를 좋아해서 그랬다며 새 카메라 줄에 달린 고래와펜을 보고 겸연쩍게 웃었었다. 도경이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삼키며 냅킨으로 입술을 훔쳤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인물 사진전을 하고 싶어요.”

“멋지네요. 한 사람의 일생이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사람을 위한.”

“맞아요. 태어나서 현재의 모습까지, 개인의 역사를 펼쳐놓는 거죠. 결혼식장에 가면 식전에 스크린으로 보여 주잖아요. 신랑 신부의 돌 사진부터 유치원, 학교를 거쳐 대학에 가고 뭐 그런 사진들요. 전 그걸 볼 때마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런 애도의 수순이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봐요.”

세라의 눈동자가 빛났다.

도경이 말을 보탰다.

“평소에 그 사람이 좋아했던 가요나 팝송을 틀어 놓기도 하는 거죠. 장례식장에서 힙합이나 재즈가 흘러나오면 오호.”

“애도의 방법을 좀 달리 해보자는 거죠.”


세라의 머릿속에 아빠의 장례식이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바닥에 쓰러진 채 절규하는 엄마와 영정사진을 보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가 보인다. 동정 어린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공중에 떠올라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 자리에 아빠가 흥얼대던 <붉은 노을>이 향불과 함께 긴 연기 꼬리를 감추고 타오른다. 조문객들은 술잔 대신 어깨동무하며 영면에 이른 자를 깨우기라도 하듯 응원가의 한 소절처럼 떼창을 한다. 세라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도경의 말에 집중했다.


“학부 때 교양 수업에서 이런 과제가 있었어요. 꿈꾸고 있는 자신의 장례식이 있다면 어떠한 모습인가.”

“질문이 재밌네요.”


세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도경이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도경이 테이블에 바짝 당겨 앉았다.


“시립미술관에서 테레사 수녀의 삶을 조명하는 사진전을 본 적이 있었어요. 테레사 수녀의 유년 시절과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로 건너가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는 헌신적인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이었죠. 교수님이 추천한 전시회이기도 했고 학생들이 많이 관람했어요. 그 후에 내준 과제니 당연히 연상작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학생들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태어나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일대기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많이 내더군요.”

“도경 씨는 뭐라고 했어요?”

“전 다른 얘길 했던 것 같아요. 이전의 삶이란 현재를 만들기 위한 도움닫기 같은 거잖아요. 이왕이면 현재 이후의 미래의 모습을 남기자고 했죠. 내가 좀 더 살았다면 미래에 이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혹은 더 미래의 나의 노년이 이런 모습일 거라는, 포부를 담은 사진 같은 거 말이죠. 이를테면 광고쟁이한테 시달리는 하 피디가 아닌, 보고 싶고 담고 싶은 장면만 찍는 사진작가 하도경을 남기고 싶은 거죠.”

“괜찮은데요.”

“그래서 말인데…….”

도경이 머뭇거렸다.

“저도 세라 씨한테 선물하게 해 줘요.”

“선물요? 저한테요?”

“당신의 사진전을 하고 싶어요.”


오사카에서 그녀의 송별회가 있던 날, 도경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좋은 추억이 될 만한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렌즈에 찍힌 그녀의 사진은 어느새 미니 앨범을 만들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경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제주 공항에서 월정리를 거쳐 오사카까지 그녀의 한 시절을 파노라마로 펼쳐보는 기분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피사체는 꽃봉오리가 피었다 지는 장면을 몇 배속으로 연출하는 영상과 흡사하게 변화가 느껴졌다. 그날 도경은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구로몬 시장의 전경을 렌즈로 관망하고 있었다. 료칸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세라가 프레임에 들어왔다. 물기에 젖은 머리와 헐렁한 긴 티셔츠 아래로 나무 같은 종아리가 애처로웠다. 그녀를 클로즈업했을 때 무엇하나 걸치지 않은 민얼굴이 드러났다. 그녀가 조금씩 증발하고 있었다.


세라는 자신을 모델로 사진전을 하고 싶다는 도경의 말에 사색이 되었다. 뭔가를 알아낸 걸까. 그 얘길 들은 순간부터 피아노의 선율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도경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왜 저예요? 사람들에게 뭘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자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당신이 웃을 때나 화낼 때, 여행자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혹은 멍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할 때도 내 카메라에 항상 당신이 들어와 있었어요.”


“그래서, 뭐가 보……였……어요?”

세라가 시선을 떨궜다.


“그냥 당신. 세라 씨가 보였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나로 살면 돼요. 아프면 아픈 대로 먹고 마시고 울고 사랑하고 그게 뭐 죕니까. 꼭 안 아픈 척하며 살아야 정상입니까?”


도경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세라가 요시메와 계약했을 때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요시메상을 설득하려고 밤낮을 매달리던 날들을 생각해 봐요. 그때가 당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때처럼 자신을 선입견 없이 바라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봐요.”


세라는 요시메와 화장수 개발에 전념하는 동안에 스스로 환자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화장수를 적신 솜을 손등 위에 몇 번씩 발라도, 푸른 정맥이 작은 언덕처럼 솟아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정말 내게 선물일까요?”

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믿어요.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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