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며칠 뒤, 큰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불안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친구들에게서 들은 소식을 전달했다.
"엄마, 이탈리아에 소매치기가 엄청 많데요. 내 친구의 엄마의 아는 사람도 당했다는데요? 그리고 친구들이 나는 소매치기가 딱 좋아할 인상이래요."
"엥? 네 친구의 엄마의 아는 사람? 친구가 실제로 아는 사람이야 모르는 사람이야? 그 친구 누구야? 혹시 또 그 (말하기 좋아하는) XX냐?"
"맞아요. 근데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은데요. 다른 애들도 다 그런 이야기 들어봤데요."
딸의 이야기를 듣고 20여 년 만에 다시 이탈리아 여행에 대해 알아보니, 정말로 소매치기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들이 만발했다. 20여 년 전 로마에서 3일을 보내는 동안 소매치기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내게는 없다. 어쩌면 그때도 그런 소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나는 키도 크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눈매를 가진 남편과 함께였기 때문인지 아무런 걱정 없이 로마 시내를 활보했었다. 우리는 그때 로마 시내가 지저분하고 복잡한 것에 놀랐을 뿐이지, 우리의 소매를 치겠다고 접근하는 사람때문에 놀란 일은 없었다. 물론 매표소에서 잔돈 사기를 당하긴 했지만 그것도 내 주머니에 잔돈을 더 넣어준 일이니,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흥미로운 사건에 해당할 뿐이었다.
20여 년 전, 소매치기와 유사한 일은 오히려 파리에서 겪었다. 그날도 이른 아침 숙소 근처의 저렴한 카페에 들러 맛 좋은 카푸치노와 크루아상으로 하루를 시작한 뒤에 지하철을 타러 갔다. 우리가 묵던 숙소는 파리 변두리의 주택가여서 우리가 하루의 여행을 시작하는 시간의 지하철 안에는 출근하는 파리지엥들로 가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날도 우리는 여유롭게 지하철에서 표를 구입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뭔가 부스럭댔다. 놀라서 돌아보니 아주 멀쩡한(!) 젊은이가 내게 미소를 날리며, '고마워'라는 말을 속삭이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다른 개찰구를 통과한 남편과 다시 만난 나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때서야 따져보았는데 내가 등에 메고 있던 가방도 그냥 멀쩡했고(사실 가방 속에도 물병과 외투 정도만 있었을 것이다), 내 주머니 속에는 실상 아무것도 없었기에 뒤적거려 봐도 뭔가 사라질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젊은이의 타깃은 내 주머니나 가방이 아니라, 지하철 표 없이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일 뿐이었다. 일명, 무임승차. 그땐 정말 너무 멀쩡해 보이는 젊은이가 왜 저런 짓을 하나 싶어, '별 미친X 다 보겠네'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내가 타깃이 되었을까 싶다. 파리에 있는 동안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임승차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사실 그 젊은이 정도면 다른 이들처럼 개찰구를 그냥 뛰어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딸에게 '소매치기가 딱 좋아할 인상'을 물려줘버린 나는 또한 '무임승차자들이 딱 좋아할 인상'인 걸까? 그러나 또 생각해 보니 그 역시, 바티칸 매표소의 잔돈 사기처럼, 그 '미친X'으로서는 자기 삶에 자그마한 동양 여자 하나를 놀라게 한 무용담을 보탠 것이고, 나로서는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털리지 않았고 (잠시 멘탈은 털렸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사건 하나를 보탠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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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여행 전 이탈리아 소매치기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해보니,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서너 명이 무리 지어 다니며 주로 (내가 보기엔) 한국인들을 노리는 것 같았다. 기차에서 커다란 트렁크에 자물쇠를 채우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서양 여행자들은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다고 하니 말이다. 또 소매치기범들은 험상궂게 생긴 남자일 것이란 선입견과는 달리 젊은 여성의 무리가 더 많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런데 또 재밌는 건, 소매치기들이 범행을 하다 발각되면 '미안, 미안' 혹은 '그건 너의 오해야'라면서 가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여행자들을 위협하거나 무기를 사용해 폭력적으로 갈취해 가는, 아주 험악한 범행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정보에 의하면, 소매치기들은 현금보다 한국 여권을 더 많이 노린다고도 했다. 다른 나라 여권보다 한국 여권으로 쉽게 갈 수 있는 나라가 많다나 뭐라나. 아니, 우리 여권이 그렇게 좋은 여권이었다니! 거의 10년에 한 번 꼴로 여권을 사용하던 나는, 이 좋은 여권을 몇 번 사용하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아쉽고, 게다가 이 좋은 여권으로 수많은 다른 나라에도 못 가본 채로 이탈리아라는 똑같은 나라에만 두 번 사용하는 게 뭔가 손해인 듯싶기도 했다. 가성비 측면에서는 다른 이들과 돌려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먼 나라에서 여권을 분실해서 그나마 짧은 여행의 시간을 민원과 행정 업무로 써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매치기들로부터 여권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다시 검색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가장 안전한 숙소-호텔 금고에 두고 다니라고 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숙소는 안전하지 않다고, 숙소까지 침입하는 사례가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여권 전용 가방을 이용하는데, 심지어 가방 안에 든 여권을 스캔해 가는 일명 전자 소매치기 범죄도 있다고 '안티스키밍'인지 하는 기능성 여권 전용 가방까지 준비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런 용도의 가방은 소매치기들에게 "여기에 여권 있어!"라고 오히려 알려주는 기능성을 갖춘 것 같기도 했다. 또, '여권 도난 방지'로 검색하다 보니, 소매치기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주머니 달린 팬티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하~ 정말 대단한 한국사람들!) 그건 소매치기뿐만 아니라 실제로 여권을 보여야 할 때에 나 자신도 접근이 곤란할 것 같았다.
현금과 여권 이외에 스마트폰 역시 소매치기의 대상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 하듯 카페나 식당에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더니 사라졌더라는 이야기부터, 버스 안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데 뒤에서 누군가 손에 든 걸 낚아채더니 재빨리 내려버리더라는 믿기 어려운 무용담까지, 이 역시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람 많은 곳에서는 스마트 폰을 웬만하면 꺼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스마트 폰의 구글맵과 맛집 정보에 대한 검색 없이, 게다가 언제 또 갈지 알 수 없는 유럽까지 갔으니 인생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스마트폰을 꺼내지 말란 말인가. 그랬더니 다른 사람은 그렇다면 반드시 스마트 폰을 목에 걸라고도 했다. 그러나 걸어 다니는 내내 목에 폰을 걸고 다니는 것은 경증의 목디스크 보유자인 내게는 무리한 일인 것 같았다.
이 모든 정보를 찾아보고 나니 여행을 가기도 전에 벌써 소매치기한테 전신을 털린 것 마냥 지쳐버린 나는,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할 딸들과 우리의 준비를 지켜보는 남편에게 차례로 물었다.
(무임승차자가 딱 좋아할 인상의 나) "어쩌지? 소매치기 때문에 여행 가도 되겠니? 안 무섭겠어?"
(소매치기가 딱 좋아할 인상이라는 큰 딸) "무섭긴 한데, 벌써 예약 한 거 아니에요?"
(무임승차자가 좋아할 인상을 발산하는 엄마 눈을 안 닮고 아빠의 예리한 눈매를 닮은 둘째 딸) "소매치기 따위가, 무섭긴 뭐가 무섭다고 그래!"
(무임승차자가 딱 좋아할 인상의 나) "하긴, 칼 들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가라고 하면 간다고는 하네. 그러면 (인터넷에서 찾은 여러 가지 '소매치기 방지용' 상품을 보여주면서) 이런 거 사서 매고 다닐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듯한 예리한 눈매의 소유자인 남편) 소매치기한테 광고하고 다닐라고? 그렇게 무서워서 어떻게 다니려고 그래! 그럴 거면 그냥 가지를 말어."
그렇다, 소매치기를 방지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에는 바로 그런 곳에 가지 않는 방법이 있었다! 순간 '그래,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직 당하지도 않은 소매치기 때문에, 가기도 전에 여행을 포기하는 건 왠지 너무 비굴한 것 같지 않은가. 그래 이번 기회에 나도, 용감한 둘째 딸을 닮아보기로 하자. 그래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떠나기는 좀 아쉬워서, 기차에서 트렁크를 보전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것도 쉽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전거 자물쇠를 하나 준비하는 걸로, 나는 지친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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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여행 내내 우리는, 소매치기를 구경도 못했다. 아니 처음엔 소매치기가 어디 있을까 긴장하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그런 생각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로마와 피렌체를 오가는 기차에서 트렁크를 지키는 데에 쓰려고 준비했던 자전거 자물쇠도 가져갔다는 걸 잊을 정도였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딸들에게, 어디서 소매치기 때문에 제일 무서웠냐고 다시 인터뷰를 했더니 둘 다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다가, 그나마 사람들이 붐비던 트레비 분수에서 스마트폰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준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는 찍고 싶은 만큼 사진을 찍었고, 구경하고 싶은 만큼 분수와 사람들을 구경하며 충분히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셋이 항상 붙어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예리한 눈매의 용감한 둘째 딸과 함께여서, 무임승차자나 소매치기가 딱 좋아할 인상을 가진 나와 큰 딸의 눈매도, 어쩌면 덩달아 아주 조금은 예리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우리가 택한 날짜는 여행객이 줄어든 비수기라, 어쩌면 소매치기들도 휴가를 떠났던 것일까? 그렇다면 비수기라고 일을 안해도 될 정도인 소매치기의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털어봤자 나올 게 하나도 없어 보였던 걸까? 그건 정말, 사실이 그렇긴 했다. 로마와 피렌체 골목길을 누비던 우리의 주머니 속에는 털릴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만약 텅빈 나의 호주머니 속에 소매치기의 손이 들어왔었다면 우리는 그저 서로의 빈손을 꼭 잡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소매치기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그 정도는 대충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소매치기에게 털리지 않았다는게 그닥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주일 간 로마와 피렌체 딸랑 두 도시만을 여행한 우리는, 처음 며칠을 제외하고는 거의 '츄리닝' 바람으로 관광지의 골목길을 낮이나 밤이나 아주 편안~하게 '싸돌아'다녔다. 미리 찾아본 이탈리아 소매치기 유형 중에, 지시자인 듯한 나이 든 여자와 그에 따라 작업하는 어린 여자들의 조합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어쩌면 혹시 우리가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소매치기로 보였던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