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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Oct 20. 2023

단 한 명의 독자

어떤 이들은 자기 안에 매우 영롱한 말의 열매를 무수히 지닌 채 태어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자기 안에서는 그 어떤 말도 지니지 못하고 태어나,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세상-타자의 말의 열매를 통해 말을 배운다. 그리하여 그것으로써만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꿈틀대는 무언가를 아주 느리게 겨우겨우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물론 후자다.


*


내 최초의 글쓰기 연습은 일기였던 것 같다. 특히 방학이 끝날 무렵, 한꺼번에 몰아서 써야 하는 일기는 나로 하여금 쓰기에 대한 최초의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밀려서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그건 물론 내 일기를 읽을 단 한 명의 독자인 담임 선생님을 '속이기' 위한 계책인 것이다. 그래도 우선은 최소한의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어린 나는, '오늘은~'으로 시작해야 하는 일기를 '어제는~' '그저께는~'이런 말로 시작하며 써 내려갔다.


그렇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날들은 어쨌든 창작을 해야만 했다. 내가 언젠가 했던 일들과 (다른 아이들의 경험 중에서) 내가 할 법한 일들과 언젠가 하고 싶은 일들을 뒤섞어 삼십여 일치의 일기를 다 완성하고 나면, 다른 숙제를 해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아주 뿌듯한 감격이 있었다. 거기에는 창작을 해낸 기쁨과 더불어, 내 작품을 읽는 단 한 명의 독자인 선생님을 만족 시킬 수 있으리라는 통쾌함도 한몫했다.


그런 (얄팍한) 기쁨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인지, 그 뒤로 아무도 내게 숙제로 내주거나 강제로 검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꾸준히 일기를 썼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을 쓰면서도, 나는 마치 나 아닌 누군가 읽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마냥 했던 것이다.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가 아니라 (책에서 본 대로) 문장들을 좀 더 멋지게 표현해 보려 애쓰거나,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참아가며 (누군가에게 착한 아이처럼 보이고 싶어서?) 내 잘못에 대해 더 반성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내 일기를 몰래 보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 속 마음을, 엄마가 무심결에 말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기왕 그렇게 된 김에 나는 일기장 속에 엄마가 봐야 할 내용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또 그때부터는 글쓰기의 방향을 틀었다. 아예 독자를 지정해서 내 가장 친한 친구에게 혹은 내가 애정하는 라디오 방송 DJ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쓰기 시작했다.   


*


지금껏 내가 쓴 글을 읽어줬던 단 한 명'씩'의 독자'들'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 건, 지난여름 수강했던 프랑스어 강독 수업 때문이다. 난생처음으로 진지하게 '프랑스어 수업'에 임하는 시간이었는데, 수강생이 단 둘 뿐이었다. 주목받는 게 부담스러운 나는, 수강생이 한 명만 더 있어도 참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주부터는 그나마 한 명 있던 다른 수강생도 사라지고 나 혼자만 남고 말았다. 온라인 수업이긴 하지만, (아직은 낯선) 프랑스어 선생과 단 둘이 마주하자니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수업 후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수강생이 나 혼자라고 생각하니, 개인사를 핑계 삼아 가끔 '땡땡이'를 칠 수도 없었다. 또 유일한 학생인 내게만 질문을 하시니, 나는 어쩔 수 없이 꼬박꼬박 예습과 복습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혼자 프랑스어 공부를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무척 힘들긴 했지만 (이젠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져 같은 단어를 열두 번도 더 다시 찾아봐야 한다! ㅠㅠ) 그만큼 공부하는 재미는 조금 늘었다. 그렇게 8주가 지나 마지막 수업 시간, 선생님은 내게 소감 한마디를 부탁하셨다.


"수강생이 단 한 명뿐인데도, 폐강하지 않고 열강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처음엔 너무 어색하고 힘들고 열정이 넘치는 선생님이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부담이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어 번역가로 또 대학의 수업 진행으로 바쁜 와중에, 몇 년째 초급에만 머물러서 엉뚱한 대답이나 해 쌌는 나이도 많은 단 한 명의 수강생을 위해 꼬박꼬박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수업료를 벌겠다는 생각 따위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내가 뭔가를 어려워하거나 관심 있는 기색을 보이기라도 하면 그에 관해 더 자세히 알려주느라고, 원래 두 시간으로 예정된 수업시간은 언제나 세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런 내 마음을 그저 그렇게 한 마디로밖에 표현하지 못했을 때, 그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답했다.


"많은 학생들보다, 진지한 단 한 사람이 제겐 더 소중합니다."


*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넌 대체 누구 보라고 이런 데다가 글을 쓰는 거니?' 더 많은 이들에게 자기 글을 읽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바에야, 그냥 혼자만의 일기장 같은 데에 편안하게 쓰지 않는 이유는 뭘까? 왜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고치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 고치고를 반복하는 것인가? 우선은, 그러는 과정이 (결과적으로 잘 쓰고 못쓰고 와는 상관없이) 되~게 재미있는데, 이런 곳에 쓰는 편이 종이에 연필로 쓰는 것보다 고치고 지우기가 훨씬 더 수월하기도 하다.


또, 내가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데도 내가 쓴 걸 슬~쩍 보러 오는 사람이 과연 있는지 궁금하고, 그 옛날 일기를 검사하던 선생님이나 내 일기장을 살짝 훔쳐보았을 엄마처럼, 그런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굳이 그를 막고 싶지 않다. 나 자신도 그런 데서 느껴지는 재미를 좀 알기 때문이다.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글보다 이상하게 그런 글이 내겐 더 흥미롭다.) 그러니 내가 쓰는 글은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감춰놓으려고 쓰는 글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로 염두에 두는 단 한 사람의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지금껏 내가 썼던 글을 가장 많이 읽어주던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나는 내가 써 놓은 글을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수십 번도 더, 다시 읽는다.


가끔 내 글을 읽으러 이곳에 들르는 한 친구는 내 글이 좀 현학적이라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온갖 언어를 지니고 있다면,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 있는 매력적인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별다른 언어도 없이 지구별에 온 것만 같은 나는, 내가 알고 싶고 그걸 알아내 사용해 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 글로 써 가며 천천히 나 자신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현학적인 글쓰기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내 글의 가장 중요한, 단 한 명의 독자는 나 자신이고, 내 글은 나에게 딱 적합하게 재미있고 유익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내 독자와 나 사이에는 그런 식으로 맺어가는, 지금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질문하고 다시 고치면서 만들어지는 그런 식의 우리만의 우정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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