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함께 내리는

by 미르mihr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우산을 쓰고도 온몸이 축축해질 만큼 세차게 비가 내렸다. 그럴 때 나는, 그 눅눅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도서관의 뽀송한 실내에 들어가면 느껴질 따뜻한 안도감에 대해 생각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다 젖어버린 축축한 옷을 벗어던지고 따뜻한 물에 씻는 후 기분 좋게 잘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상상을 하면서, 비를 즐겼다. 비는 그 자체의 촉촉함이 나쁘지 않지만, 비 덕분에 더 소중해지는 다른 즐거움을 알게 해 준다. 이런 나는 비에 대한 추억이 꽤 된다.


추억 1

비 오는 날, 나와 친구들은 교실의 불을 끄고 어둑하게 만들고 다음 수업의 선생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체면상) 어서 불을 켜라고 하지만, 우리는 "에이~ 싫어요~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라며 조른다. (그 선생님은 이런 게 '먹히는' 선생님이라는 걸, 영특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선생님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럼 진짜 오늘 만'이라는 조건을 붙이며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첫사랑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중에는 내 첫사랑 선생님도 있었는데, 나의 첫사랑이 들려주는 첫사랑의 이야기는 재밌으면서도 마음이 아렸다고 해야 할까?


추억 2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소주를 마셔보았다. 그런데 으웩, 이건 정말 써도 너무 썼다. 이런 걸 대체 왜 마시는 것인가. 그러나 내 주머니는 항상 얄팍하고, 내게 술을 사 주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모두 가난했다. 그럼에도 나는 소주는 못 마신다고, 어떻게든 '맥주를 달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가난한 선배 중 하나가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는 맥주를 사주는 대신, 나를 포함한 후배들을 (당시의 우리로서는 비싸서 엄두를 낼 수 없던) 곱창구이 집으로 데려갔다. 연탄불 위에 석쇠를 놓고 구워 먹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난생처음 (그전에는 왜 먹는지 이해할 수 없던) 곱창을 먹었다. 곱창집 테라스(?) 위 비닐 포장으로 떨어지는 빗물 소리, 곱창이 탁탁 구워지며 내는 소리, 그때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연기. 이런 풍경 때문인지 몰라도, 평소에는 쓰기만 하던 소주가 처음으로 참 달았다!


추억 3

때는 바야흐로 봄. 어느 강의가 끝날 무렵 누군가 내게 다가와 노트를 좀 빌려달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빌려줬더니, 그다음 주 강의 때는 같이 산책을 좀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날은 봄비가 촉촉이 오는 날이었는데, 나도 마침 산책을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나는 또 아무 생각 없이 그러지 했다. 교정 뒤 언덕을 오르면 나오는 작은 공원까지 꽤 오래 걸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기억에 남은 건, 연둣빛이 가득한 나뭇잎과 교정의 곳곳의 흙과 풀냄새들, 언덕길을 포장한 아스팔트를 따라 흘러내리던 빗줄기, 그리고 그 애의 고향이 바닷가라는 말, 그 말에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속으로 상상했던 일, 그것뿐이다. 그때 우산 하나를 같이 썼는지, 아니면 각자의 우산을 따로 썼는지, 문득 궁금하네.


추억 4

어느 비 오는 날, 밖에 나가 놀지 못해 지루한 어린 두 딸을 우비와 장화로 무장시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우리 셋은 이런 동요를 부르며 물 구덩이마다 발을 첨벙 댔다. "오늘은 해님 안 떠요, 비 오는 날이에요. 오늘은 해님 안 떠요, 비 오는 날이에요. 오늘은 지렁이 나와요, 비 오는 날이에요. 오늘은 지렁이 나와요, 비 오는 날이에요." 위에서 세차게 내리는 비와 아래에서 힘차게 튀어 오른 물줄기들이 우비와 장화 사이로 튀겨 들어가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다 자란 아이들은, 비 오는 날 외출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땐 엄마가 억지로 데려갔다나 뭐래나. 물구덩이에서 첨벙거리는 동안, 지들도 엄청 깔깔대며 웃어놓고는!


추억 5

언젠가부터 비 오는 날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부침개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날따라 내 손으로 직접 부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며칠 전, 동네 지인으로부터 부침개 맛집이 어딘지 알아둔 터였다. 나는 퇴근하는 남편을 부침개 맛집이라는 그곳으로 유혹(?!)했다. 사실, 저녁 먹으면서 한 잔 걸치는 걸,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남편이 나보다 더 신이나긴 했다. 그런데 와~ 아직 초저녁인데, 남은 자리는 딱 하나뿐이 아닌가. 게다가 우리 둘 빼고는, 전부 중년의 아저씨들인 부침개 맛집의 자리들은, 모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처음부터 남편 목소리보다 아주 잘 들리던 회식 나온 옆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가 (술을 마시니) 점점 더 커져 내 예민한 귓고막을 괴롭히자, 나는 내 욕망의 평범성에 대해 한탄했다. '아, 내가 부침개 먹고 싶으면 모두들 부침개가 먹고 싶은 거구나.' '내가 남이 부쳐준 부침개가 먹고 싶으면, 모두들 남이 부쳐준 부침개가 먹고 싶은 거구나!' 그날 이후, 그 부침개 집에 가고 싶어지면 자동으로 떠올라 다시는 그 맛집에 못 가게 만드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비 오는 오늘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수고하며, 감자전을 부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 생의 남은 날 동안에도 새로운 추억을 요만큼 만들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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