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요가 수업이 있었다. 부엌 뒷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수업 시간이 다 되어 부리나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파트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그런데 아뿔싸 비가 온다. 우산을 가지러 올라갔다 오면 늦을 것 같아, 운동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그냥 뛰어갔다.
헉헉대며 요가원 앞에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있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뭐지? 벌써 시작된 건가 싶어 시간을 다시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수업시간을 착각했다는 걸 알아챘다. 늦었다고 뛰었는데, 알고 보니 너무 일찍 왔다. 한 이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는다. 그동안 뭘 해야 하나 생각하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비도 피할 수 있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어 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글에서 읽었는데, 버스 정류장이야말로 아무 일 없이 오래 앉아있어도,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곳이라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류장 앞 등받이 없는 벤치에 찻길을 등지고 앉으니, 바로 중형 슈퍼의 입구가 마주 보였다. 저녁때가 지난 시간인지라 손님은 많지 않은데, 대부분 남성들이다. 내가 장 보는 시간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데, 낯선 풍경이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 흉내를 내며, 물건을 사서 나오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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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나온 사람은 유일하게 '젊은' 남성이었는데, 아주 커다란 페트병에 담긴 콜라를 사들고 나왔다. 두 번째 나온 이는 중년과 노년 사이의 나이 든 남성이었는데, 산 물건을 그 속에 담았는지 짊어진 배낭이 무척 빵빵했다. 세 번째 손님은 중년의 남성인데, 짐 없이 가벼운 차림이다. 들어갈 때부터 입구 쪽 행사 상품으로 놓인 묶음으로 된 과자 봉지를 만지작 거리더니, 나올 때는 한 손에 그 과자 봉지들 묶음과 다른 손에 맥주캔 한 묶음을 들고 있다.
네 번째 손님 역시, 퇴근복장의 중년 남성. 비닐봉지 속에 막걸리 세 통이 너무 잘 보였다. 그 옆에 네모진 플라스틱 포장은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이리라. 다섯 번째 손님도 역시, 슈퍼 앞에 자가용을 세우고 급하게 들어간 퇴근길의 중년 남성. 역시 맥주 캔 한 묶음과 과자 안주다. 여섯 번째 손님은 할머니와 귀여운 손녀 그리고 아마도 그 귀여운 아이의 아빠인 일가족이다. 젊은 아빠가 커다란 봉지를 들고 가는데, 뭔가 많이 샀다.
일곱 번째 손님은 특이하게(?) 중년 여성이었는데, 콩나물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나온다. 오늘 저녁 찬거리로는 이미 늦었는데, 내일 아침에 (술 사가는 저 많은 중년 남성들을 위한) 콩나물국을 끓이시려는 걸까? 여덟 번째 손님도 자가용을 끌고 온 퇴근길의 중년 남성이다. 또 맥주와 과자일까 기대했는데, 투명한 소주 한 병을 소중하게 들고 재빨리 나오더니 다시 차를 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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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퇴근길에 종종 오늘 저녁 반찬은 뭐냐고 미리 물으면서 바로 그 슈퍼 앞에 차를 세우고 저녁 찬에 맞춰 술을 사 오곤 하는데 오늘 보니, 다른 집 남편들도 다들 비슷하게 살고 있나 보다. 요가를 하는 내내, 남의 집 남편들이 식탁에 앉아 곪아터진 속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혼자 소주며 맥주며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너무 쓸쓸하지 말라고 (내 남편인양) 말을 걸어 본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또 정신없이 바빴어?... 점심은 뭐 먹었어?... 몸에 더 좋은 것 좀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