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갈았다

by 미르mihr

4월 16일.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오늘 기분이 좋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우연히 매우 끔찍한 뉴스를 보고 말았다. 안 되겠다 싶어, 욕실 청소를 했다. 그러면 안 좋은 기분이 조금이라도 씻겨 내려가지 않을까 해서. 그러다 도서관에 가는 시간을 놓쳐버렸다. 물론 도서관이야 하루종일 열려있지만, 글이 잘 써지는 자리는 문이 열리자마자 금세 사라진다. 자리를 잘못 잡으면 글쓰기는커녕, 신경만 곤두세우다 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집에서 글을 쓰기로 했다.


오늘 쓰기 시작한 글은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시리즈의 네 번째 글인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명제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란 자유롭게 마음먹는 게 아니라,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잘 써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잘 떠오르지 않아 주방으로 갔다. 글이 막히는 동안 홀짝거릴 페퍼민트 차를 우려 보온병에 담는데, 내게 말을 걸어오는 엄마 말의 뉘앙스가 이상하게 좀 삐뚜름하다.


"도서관에도 안 갈 거면서, 차는 뭐 하러 보온병에 담아?"


음, 뭐지?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고민을 이어가야 하므로 다시 방으로 들어와 글을 쓰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글이 잘 안 되던 판에, 엄마의 삐뚜름한 목소리까지 따라 들어오니 글이 잘 이어질 리 없다. 에잇! 글쓰기를 잠시 미루고, <<에티카>> 겉표지에 그려진 스피노자 얼굴을 보면서, 나의 최애 스승님과의 대화를 시작해 본다.


'선생님, 엄마가 또 왜 저러실까요?'

'그걸 몰라서 물어?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많이 들어갔던 '안 갈 거면서'를 잘 생각해 보슈~'


아, 바로 그거였군!


*


아이들이 좀 자라서 둘 다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문화센터에서 사진 수업을 받았다. 사진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매주 특정한 주제에 맞춰 사진을 찍어오게 했는데, 한 번은 '노랑'을 찍어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두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키면서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오늘은 어떤 노랑을 찍어볼까나. 그런 내 앞에 노란 유치원버스들이 나타났다.


앗, 노랑이다! 유치원 버스를 어떻게 찍으면 좋을까 생각하며, 이런저런 다양한 각도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때 유치원 버스 창문에 비친 엄마들의 얼굴을 보고 말았는데, 버스 안에서 엄마에게 손을 흔드는 어린아이들의 억지웃음과는 아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정말이지 화~안~한 미소였다. 조금 전 아이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보냈던 나 역시, 저렇게 (감출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지었을 테지! 비정한 모정이로다! 그러나, 그 또한 자연의 이치가 맞도다!


스피노자가 이끄는 '영원의 상' 아래서 자연의 법칙을 관조한 나는, 벌떡 일어나 하릴없이 동네를 한 바퀴 돌다 오기로 한다. 글 쓴답시고 예민하게 구는 딸 때문에, 좋아하는 음악을 (귀가 점점 어두워지니) 아주 큰 소리로 틀어놓고 듣지 못하게 된 엄마에게, 단 몇십 분이라도 온전한 '자유 시간'을 돌려드리기로 한다. 그런데 나의 자유는?


*


동네를 걷다 속옷 가게에 들러, 목이 긴 양말을 요리조리 살피며 고른다. 양말의 목이 다 늘어났다던 큰 딸의 말이 떠올라서다. 맘에 딱 드는 고상한 양말이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 종류가 있어 선택의 자유를 잠시 누려본다. 돌아오는 길에는 화장품 가게가 보인다. 마침, 아이 크림을 다 쓴 게 기억나 거기에도 들른다. 직원이 내가 쓸만할 것이라며 두 가지를 권해, 나는 그중 하나를 고를 자유를 또 누린다. 집에 돌아와 점심 준비를 하는데, 또다시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는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의 음악에 대한 자유-의지는 나의 부재에 달렸고, 나의 글쓰기에 대한 자유-의지는 엄마 목소리의 미세한 뉘앙스에 좌우되며, 좋은 양말과 얼굴을 보호할 자유-의지는 고작 내게 제시되는 상품의 가짓수에 달려있었다. 그런 생각을 따라가며 파를 써는 데, 부엌칼이 오늘따라 무척 무뎌서 생각도 따라 무뎌지는 것 같다. 우리 집 칼을 갈아주는 사람은 시아버지다. 지난번 생신날 모일 적에 칼을 가져오라셨는데, 일부러 안 가져갔었다. 생신날 그런 걸 해달라 하는 것도 그렇고, 이제 칼 정도는 내가 갈아야지 싶기도 했다.


오래된 칼갈이 용으로 만들어진 스테인리스 봉을 꺼내 칼날을 갈아본다. 서로 비슷한 스텐과 스텐이 마찰하며 찌~잉 찌~잉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찬장에서 옹기 밥그릇 하나를 꺼내 뒤집어 유약이 안 발린 받침 쪽에 대고 물을 뿌려가며 다시 칼을 갈았다. 시아버지의 숫돌만큼은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싸~악 싸~악 소리가 나니 기분도 따라 싸~악 싸~악 나아지는 것 같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갈아 준 것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날카롭게 잘 갈아져서 놀람과 동시에,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온 것만 같았다.


칼을 갈 줄 알게 된 내게는, 이제 언제든 원하는 때에 날카로운 칼을 쓸 수 있는 (필연적) 자유가 생겨났도다! 그러니 또 도서관에 안 갈 거면, 칼을 갈 것! (죄송합니다~~~ 아재 개그의 필연성에 매인 몸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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