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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Oct 01. 2024

부재(不在)를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원문)


L'absence amoureuse

va seulement dans un sens,

et ne peut se dire qu'à partir de qui reste

- et non de qui part :

je, toujours présent,

ne se constitue qu'en face de toi,

sans cesse absent.

Dire l'absence,

c'est d'emblée poser que

la place du sujet et la place de l'autre

ne peuvent permuter; c'est dire :

<< Je suis moins aimé que je n'aime.>>



(나의 번역)


사랑의 부재(不在)는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떠나는 자가 아닌,

남겨진 자가 되기 시작할 때에만 말할 수 있다.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끝없이 부재하는 '너'와 마주해서만 성립한다.

부재를 말한다는 것. 그것은,

주체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서로 치환될 수 없음을

단숨에 가정해 버리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내가 받는 사랑은 내가 주는 사랑보다 (언제나) 더 작다>>



(기억하고 싶은 단어)


* aller dans un sens : 한 방향으로 가다

   (réf.) aller dans un tout autre sens : 정반대 방향으로 가다


* à partir de : (시점, 기점) ~로부터

* d'emblée : 단숨에, 곧바로

     (embler는 원래 '강탈한다'는 뜻인데... 강탈은 '단숨에' 하는 게 맞지 ㅋ)  


* permuter : (직무) 교대하다, (위치) 서로 바꾸다

     (per- '대량의', '많은'의 의미  

      + muter (주로 견책성 인사) '전출시키다' )



(10줄 단상 fragments)


모든 사랑 노래의 절반은, 실상 '이별' 노래다. 사랑이 떠나가지 않는다면, 이 세상 노래 중 절반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사람들은, 노래하는 주체(sujet)가 되기 위해서 이별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는 부재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떠난 그 사람-타자(l'autre)의 부재만 있다고 한다. 떠난 자는 말이 없고, 남은 자만이 노래와 이야기의 뜨개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는 직녀(les Fileuse)다.


내가 좋아하는 들뢰즈는, 생물학적 여성도 '여성-되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만약 철학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냥 이리저리 쓸려가다가 끝나버리는 생을 살지 않겠다면 말이다. (떠나는 그를 따라 가지 못하고 혹은 따라잡지 않고) 이별-결별하고, (기다림을 핑계로)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려 퍼올리고, 그것들을 조물조물 만지작대면서 (떠난 이와 상관없이) '나의 고유한 관점에서' 재생성하는 역사. 롤랑 바르트를 읽다 보니, '여성-되기'란 혹시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자 되기'가 아닌가 싶다.


사랑 노래의 나머지 절반은 '구애'의 노래다. 아마도, 떠난/떠날 자들이 새로운 직녀들을 향해 부르는 온갖 (지켜지지 않고, 배신이 예정되어 있는) 달콤한 '약속'의 노래들. 그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그런데 사랑의 시작과 사랑의 부재 사이에서, 노래는 사라진다. 그러니 사랑이란 어쩌면 시작과 끝에만 있는 것인지도! 오호통재(嗚呼痛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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