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269~272
추상적인 기계는 도표적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질료에 의해 작동하며, 형식이 아니라 기능에 의해 작동한다... 강렬함, 저항, 전도성(傳導性), 뜨거움, 늘어남, 빠름 혹은 늦음의 정도들 만을 보여주는 질료-내용. 수학이나 음악적 표기법처럼 "텐서들"만으로 나타나는 기능-표현.
Une machine abstraite... est diagrammatique. Elle opère par matière, et non par substance; par fontion, et non par forme... Un contenu-matière qui ne présente plus que des degrés d'intensité, de résistance, de conductibilité, d'échauffement, d'étirement, de vitesse ou de tardivité; une expression-fonction qui ne présente plus que des «tensures», comme dans une écriture mathématique, ou bien musicale.
휴가철에 떠난 먼 나들이. 고속도로는 막히고 슬슬 배가 고파졌다. 휴게소 들어가는 길도 복잡하고, 휴게소에서 파는 음식도 별로 당기지 않았다. 우리는 가장 먼저 나타난 톨게이트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낯선 소도시에서 음식점을 찾아본다. 그런데 어라? 분명 낯선 소도시인데, 왜 이렇게 낯익은 길 같지? 저 모퉁이에 무슨 카페가 있지 않았나? 그리곤, 정말로 거기에 그 카페가 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몇 년 전에도, 그 고속도로에서 바로 그 시간쯤 지치고 배고팠고, 그래서 바로 그 톨게이트로 낯선-똑같은 소도시로 들어섰던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긴 게, 순전히 우연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유사한 자극과 조건에서 비슷하게 반응하는 기계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계에겐 '우리처럼' 욕망과 의지가 없다고?
어쩌면 '욕망'이나 '의지'라는 말은, 우리가 자연적 현상에 이름 붙인 언어적 습관일지도 모른다. 들뢰즈-가타리보다 300년 전에 살았던 스피노자는, 인간도 자연 안의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물론 자연물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합성된) 운동과 정지의 비율(속도)로 분별될 뿐인 존재라고 보았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상 우리가 '자유롭게'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다만 자연의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기 존재의 힘을 크게 만들 수 있는 것과의 결합하려는, 우리 안에 내재한 자연적 힘이다. 또 삶을 변화시키려는 우리의 '의지'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앎 즉 지성이며, 그것은 결코 '자유' 의지가 아니라, 강력한 구속-단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