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2

<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265~268

by 미르mihr



«돈 후안은 단언했다.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을 멈추어야 한다고. 세상을 멈춘다는 것,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현실이 변경되는 와중에 있는 어떤 의식적 상태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보통은 연속적인 해석의 물결이, 그것에게 낯선 상황들의 합주에 의해 방해받기 때문이다.»


«Don Joan affirma que pour voir il fallait nécessairement stopper le monde. Stopper le monde exprime parfaitement certains états de conscience au cours desquels la réalité de la vie quotidienne est modifiée, ceci parce que le flot des interprétations, d'ordinaire continuel, est interrompu par un ensemble de circonstances étrangères à ce flot.»






13년 전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어린 딸 둘과 터키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있었다. 하루는, 조금 긴 여행에 지친 나와 아이들을 달래주려고 동네 목욕탕으로 향했다.


"얘들아, 물놀이하러 가자."


아이들은 '물놀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군소리 없이 나를 따라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지도를 보고 도착한 곳은, 말이 동네 목욕탕이지 (물론 주요 관광지가 아닌 시골마을인지라, 가격도 동네 목욕탕만큼이나 착했다!) 오백 년도 더 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석조건축물이 아닌가!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곳은 정말 터키의 시골 마을이라서 그들과 우리가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우리는 터키어라곤 인사말 밖에 몰랐다. 당시엔 구글번역기나 파파고도 상용화되지 않았던 시절. 그들은 터키어로 나는 한국어로... 그때 어린 딸들은 내게, "엄마 왜 자꾸 한국말로 해?"라고 물었다. 나는 "재들이 터키말하니깐, 나는 한국말해야지"라고 논리적으로 답했다... 어찌어찌 돈을 내고 목욕탕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우선 작은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옷 갈아입는 시늉을 하는 걸 보니 탈의실인 듯한데, 우리만 쓰는 이런 널찍한 사적인 고급 탈의실이 이렇게 싼 가격에 제공된단 말인가. 그 후, 우리는 본격적인 목욕탕으로 안내를 받았다. 아무리 평일 낮 시간이라지만, 아무리 시골 마을이라지만, 목욕탕 안에는 우리 말곤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싼 값에 목욕탕을 독차지한 우리는 신이 나서 물놀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목욕탕인데... 탕이 없다!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터키탕은 증기탕'이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진짜였단 말인가. 물놀이하겠다고 따라온 아이들은 점점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쩐다. 정신을 차리고 자옥한 증기 속에서 살펴보니, 다행히 고풍스런 대리석 벽에 고풍스런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우리네 목욕탕에 있는 그 흔한 싸구려 플라스틱 대야는 없지만, 수도꼭지 바로 아래에 겨우 종아리만큼은 담글 정도로, 물을 받을 수 있는 고풍스런 문양의 대리석이 대야(?) 모양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거라도 감지덕지하며 어린아이들과 물을 받아 놀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목욕탕 안으로 들어오는 그들-현지인 여성들은 속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를 바라보며 의아한 미소를 짓는 그들에게서 의아한 눈길을 떼지 못하던 내게, 안내하던 분이 웃으며 다가와 고풍스런 대리석 침상으로 나를 끌고 가더니, 누우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곤 갑자기 내 몸의 때를 마구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화를 내야 하나 싶었지만 너무 시원하게 밀어주는 바람에, 나는 그만 '에라 모르겠다'! 그 모든 의아함과 (그녀의 무례함과 벌거벗은 나의) 무례함에 대해 망각한 채, 그녀의 손에 나를 맡겨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녀들에게 의아함과 무례함을 느꼈을 때, 그녀들도 우리에게 의아함과 무례함(혹은 무식함?)을 느꼈을 테지. 내 안에 그 순간이 아직도 멈춰있듯, 그녀들 안에도 그 순간이 멈춰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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