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딸?

by 미르mihr


도이수텝에서 뽑은 복권에는 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다. 그런 복권을 뽑은 이들 중에는 실제로 아들을 낳을 이들도 있겠지만, 갱년기를 넘어선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최고 행운의 점괘를 그냥 미신으로 치부하자니 너무 아쉬워, 나는 그곳 치앙마이에서, 과연 '아들이란 무엇인가'라는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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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아본 치앙마이 올드타운 관광객 주의사항에는 이런 게 있었다.


'여성 여행자들은 스님들의 옷을 만지거나 닿지 않도록 주의할 것!'


그런데 막상 치앙마이 올드타운을 걸어 다니다 보니, 사원이 많은 그곳은 스님들도 정말 많아서, 게다가 인도는 좁아터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많은 스님들 곁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학생들과 친구인 어린 스님도 여성인 그들과 나란히 걷지 못라고 앞 뒤로 걸어가며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그때마다 나는, '여성' 여행자 주의 사항을 떠올리며 차도로 내려서서 기다리거나, 아예 건너편 길로 건너가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도록, 그리하여 행여나 실수로 그들의 옷자락을 스치지 않도록 조심했던 것이다. 그런 것까지는, 뭐 내가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그 나라의 풍습이 그러하니 따르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드타운의 많은 사원들 중에서, 유독 입장료를 받는 멋진 사원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올드타운 정 가운데에 거대한 스투파와 함께 그 위용을 자랑하는 왓체디루앙, 또 다른 사원은 남쪽 문 밖 사원 건물 자체가 은으로 뒤덮여 화려함을 자랑하는 왓씨쑤판이다. 그 두 사원의 내부에는, 아무리 예를 갖추어 옷을 입고 입장료까지 냈더라도 여성은 들어갈 수 없는 법당이 있었기에, 그때는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돌아와 쳇 GPT에게 물어보니, 태국 불교는 공식적으로는 여성에게 승려 서품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사원은 철저하게 남성들의 공간이고, 그중에서도 승려 서품식 등이 치러지는 정화의 공간 같은 곳에는 '부정(不淨)한' 여성들의 출입이 더더욱 금지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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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태국에서의 '아들'은, 여성은 결코 될 수도 없고 가까이 가서도 안 되는, 신성한 사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왓체디루앙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스투파는 오래전 어마어마한 권세를 휘두르던 왕의 무덤이다. 그 높은 스투파의 사방 꼭대기에는 거대한 부처가 앉아, 왕이 다스려왔고 또 그 아들들이 다스릴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 태국의 사제는 권력과 이렇게 밀착되어 있으므로, '아들'이 상징하는 것은 또한 이 속세의 권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딸은'?



내가 봤던 치앙마이의 여성들은, 우선 엄청난 양의 빨래를 했다. 골목길 양지바른 곳마다 관광객들의 빨래더미를 널어놓고, 더운 한 낮 에어컨도 없는 가게 안에서 뜨거운 김을 내며 다림질 하던 여인들. 그리고 또 다른 여성들은, 온몸을 던져 피곤한 관광객들을 위해 마사지를 한다. 나를 꿈결처럼 마사지해 주던, 중년 여성 마사지사의 절뚝이던 한쪽 무르팍이여! 그들은 또 내게 맛있는 음식을 줬고, 시장터에 앉아 쉼 없이 손가락을 놀려 뜨개질을 하며 물건을 팔았고, 그러면서 내게 요가를 가르쳤다.


그들 중에는 아마, 실제로 아들을 낳은 여성도 있었겠지. 그렇다, 신성한 '아들'은 부정한 '여성'의 몸을 통해 태어난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시적'으로도 그렇다. 현실적으로 아들을 낳을 리 만무한 내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나는 그것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고되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만이, 삶의 신성함을 발견하거나 창조해 낼 수 있으리라는 의미로 해석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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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사원에 들어가려면, 여성들은 예의 바른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 한번은 그런 여성 복장 규정 표지판 설명을 재미삼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뭔가. 끈이 있는 나시를 그려놓고, '끈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쓰여 있다. 그 옆에는 또 끈 없는 나시를 그려놓고는, '탱크톱이면 안된다'라고 쓰여 있다. 옥에 티를 발견하고 혼자 웃었다. 하긴 신성한 스님들이 끈나시나 탱크톱을 분별할 필요는 없겠지.



어릴 때는 딸로 태어난 게 마음에 안들어서,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났으면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딸만 둘을 낳고 보니, 그래도 예전보다는 딸들도 살아가기 괜찮은 세상으로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하고,또 나 혼자만 아들로 태어나 혼자서만 거침없이 살기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딸들도 함께 살아가기에 좋은 그런 세상을 바라고 만드는 편이 더 낫겠다 싶어졌었다.


그런데 치앙마이에서 보니, 마음이 또 간사해진다. 외부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고, 자신의 편리에 따라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고 가리고 싶은 만큼 가리며, 커다란 배낭을 앞 뒤로 두 개씩 맨 채로 씩씩하게 긴 여행을 다니고, 무엇보다 영어를 엄청~ 잘 하는, 서양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지는 걸, 어째!


(참, 그건 그렇고, 신성한 태국 스님들께서는 대체 왜 (요상시럽게) 한쪽 어깨만 드러내고 다니시는 거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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