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의 추억, <타워링>
고교 시절에는 재난영화와 공포영화가 많이 등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전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영상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특수촬영 기술이 발전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본 재난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면 <타워링>을 꼽을 수 있다. 영화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타워링>을 보기 위해서 당시 즐겨보던 스포츠 실황 중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타워링>이 보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를 들라면 배우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폴 뉴먼, 스티브 맥퀸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였는데, 거기에 텔레비전 드라마 주연급 배우들에다 추억의 고전 영화배우들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배우들이 줄줄이 걸려있는 것을 보니 메가톤급 영화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거기에다 고층빌딩에서 벌어지는 재난이란 점에서도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스포츠 중계 운운하는 얘기부터 하는 게 웃기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프로복싱의 인기는 대단했었고, 세계 타이틀 매치라면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던 시절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시합의 실황 중계를 보지 않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프로복싱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영화 <타워링>을 볼 결심을 한 이유는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생각나지 않는다. 결과론이지만 그 선택은 좋은 판단이었기에 위로가 되었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 타이틀 매치는 국내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 매치로서는 최악의 시합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도전자인 우리나라 선수와 챔피언인 외국 선수가 벌인 것은 복싱이 아니라 씨름이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클러치(껴안기)로만 일관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그래서 같은 시간이기에 고민 끝에 선택했던 <타워링> 감상의 기억이 더더욱 선명하게 남았을 것이다. “잘한 선택”이었다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을 계속 머리에 담고 있으려는 욕심에.
<타워링>은 1974년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개봉하여 그해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늦은 1977년에 개봉되었지만, 그해 관객 동원 1위를 기록했다. 신문에서는 1위 <타워링> 40만, 2위 <킹콩> 38만 3천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오멘>, <실버스트릭>, <써스페리아>가 4, 5, 6위에 올랐을 정도로 재난이나 공포영화가 많이 등장했고 흥행에도 성공한 해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흥행 성공에는 영화로 보는 상황이 실제에 가깝게 그럴듯해 보인다는 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영화 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의 것과는 비교할 바 못 되지만 당시의 잣대로는 가슴을 졸이며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럴듯한 영상이 스크린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상영 당시 “보신 분의 평이 정확합니다”라는 문구가 <타워링>의 신문 광고 카피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타워링>에 등장한 빌딩의 높이는 138층이었다. 그때로서는 세울 수 없었던 건물이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163층의 ‘부르즈 할리파’로 20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123층의 ‘롯데월드타워’로 2016년에 완공되었고, 세계에서 여섯 번째 높은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세계 곳곳에 100층이 넘는 고층빌딩이 많은 지금도 138층을 넘는 건물은 전 세계에 하나뿐이다. <타워링>을 볼 당시에 138층이라고 하면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머나먼 미래의 건물로 생각될 정도였다.
<타워링>에 나오는 건물을 영화에서 ‘글라스타워’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벽이 온통 유리로 되어있는 느낌으로, 서울에는 그런 명칭을 사용하는 건물도 존재하고 내가 사는 도시에도 그렇게 반짝거리는 70층 넘는 고층 아파트도 있다. 그때로서는 글라스타워라는 말도 그렇고 그런 식으로 꾸며진 빌딩 자체가 판타지로 생각될 정도였으니 그런 엄청난 빌딩이 화재로 한방에 끝장난다는 소재는 ‘천국에서 지옥으로’라는 부제를 달아도 될 정도로 느껴졌다. 그만큼 엄청난 볼거리랄까 상상 거리를 제공한 영화가 <타워링>이었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영화이기도 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환성을 지를 만큼 호화스러운 건물 앞에 데려다 놓고는 그 모든 것들이 화마(火魔)에게 야금야금 먹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게 만든 것은 동병상련 인간들의 필사적인 의지 때문이었고 그 속에 영웅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타워링>에서의 영웅은 건축가 더그 로버츠(폴 뉴먼)와 소방대장 마이크 오핼러한(스티브 맥퀸)이다. 대부분 마이클 오핼러한 소방대장이 더 매력적이라는 분위기였다. 더그는 자신이 설계한 빌딩이 사장 짐(윌리엄 홀든)과 사위 로저(리처드 체임벌린)의 비리로 인해 화재가 일어난 일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동분서주하는 역할로 보일 수 있지만, 마이크는 직업적 책임감을 가진 것은 물론 인류애적 희생정신으로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눈에 그렇게 평가되었다는 사실은 영화 뒷얘기에서도 나타난다. 폴 뉴먼은 스티브 맥퀸의 캐릭터가 더 높게 평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중에 후회했다고 하니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스티브 맥퀸이 연기한 오핼러한 소방대장일 수밖에. 그러니 대본에는 답이 있었다는 생각도 드는데, 폴 뉴먼이 숫자에 속았다는 뒷얘기의 내용도 재미있다. 더그와 마이크의 대사 수가 동일하다는 말에 두 캐릭터의 무게를 비슷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불나기 전과 불난 후의 상황이란 무게도 다르고, 묵직한 상황에서 누가 중심에 설 수 있는지 다를 수밖에. 소방대장은 불난 후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상황에 등장하는 히어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얘기다.
<타워링>를 보면서 주 캐릭터인 건축사와 소방대장의 활약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은근히 인상적이면서 감동을 주는 캐릭터도 있었다. 그들은 그때로서도 올드했던 프레드 아스테어와 제니퍼 존스가 맡은 역할이었다. 왕년의 스타 두 사람은 이타주의적이고 로맨틱한 감성을 가진 인간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프레드 아스테어는 그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들이 착하고 올바른 시민의 역할을 했다면 이들과 더불어 상원의원과 시장 즉 정치인 역할로 나오는 캐릭터들도 있었는데, 그 아비규환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를 잡으려는 역할을 그들이 맡는 걸 보면 다분히 미국의 청교도 정신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름을 알만한 배우는 여럿 출연하지만 그중 첫 번째 희생자는 로버트 와그너였다. 그는 비서와의 밀회를 문제의 빌딩에서 나누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그 밀회의 장면에서는 이 영화의 주제가인 ‘We may never love like this again’의 멜로디가 조용하게 흘러나오며 이들의 사랑을 응원하면서도 슬픈 최후를 암시하는 듯도 했다. 그런데 관객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들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정황상으로는 상사와 비서의 불륜으로 보기 쉬웠는데도 그들이 나오는 장면에 우아한 음악까지 받쳐주니 그들이 죽게 된 상황이 안타까운 건지 그들의 사랑이 안타까운 건지... 생뚱맞게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불타는 글라스타워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인간들의 세속적 모습이나 그 상황을 도우려고 죽을힘을 다하는 영웅들의 처절한 모습이나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묘사가 깊지 않은 캐릭터들이 많아서 관심을 쏟고 싶은 캐릭터에는 한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사연을 나름 주고받았던 제니퍼 존스와 프레드 아스테어 커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심지어 빌딩에 불이 나게 한 원흉이자 행실로 봐서 이 영화 유일한 악인이기도 했던 리처드 체임벌린조차도 별로 입체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두 권의 소설이 원작이었던 만큼 더 많은 캐릭터의 사연이 있었더라면 하는 점이 아쉬웠다.
<타워링>은 재해의 이야기이자 과학기술 문명의 이야기이자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오만함과 무지함과 무책임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핼러한 소방대장은, 7층 이상의 화재는 대처할 수도 없는데 어찌하여 그 이상 높은 빌딩을 지었냐며 앞으로 고층 건물 지으려면 나와 상의 좀 하자고 했다. 화마가 삼켜버린 빌딩 아래에 허탈하게 앉은 더그 건축가는, 이 타버린 건물은 위선의 성지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때도 힘 있게 다가오던 대사였다. <타워링>의 주인공들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뚜렷한 대책도 없이 무작위로 수용하면서 벌어지는 폐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타워링>에서 상상했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과학기술에 기대어 살고 있는 시대다. 과연 지금의 학자, 엔지니어, 기업인, 정치인... 지금의 인간들은 그런 과학기술로 인한 폐해를 어느 정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천재(天災)도 인재(人災)도 지구 곳곳에서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으니, 지금은 1974년 영화 <타워링>에서 제기된 문제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다. 과학기술로 해결될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타워링>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쉽지 않은가. 인간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인재도 문제지만 하늘의 뜻으로 벌어지는 천재에 어떻게 다 대적하겠는가. 현재 인간이 만든 셈이지만 마음대로 추스를 수 없다면서 도마 위에 올린 과학기술이 여럿 있다. 그것들이 어느 순간 "타워링 인페르노(우뚝 솟은 지옥)"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타워링>의 리처드 체임벌린처럼 무책임하고 오만한 인간은 현재 과학기술에 대하여 어떤 주장을 하고 있을까? 과거에는 재미가 우선이었던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한 편이라도 그때 이상의 의미로 다가옴을 느낀다.
프롤로그에서 복싱 얘기를 꺼냈으니, 에필로그에서도 복싱 얘기로 마무리하련다. <타워링>을 선택함으로써 보기를 포기했던 타이틀 매치의 결과는 해당 선수와 관계자가 복싱협회로부터 징계를 받는 결과까지 낳게 했다. 선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 심판은 터무니없는 판정을 내렸다는 이유로 복싱협회는 징계 처분했다.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시합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