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의 추억, <황야의 무법자>
<황야의 무법자>는 오직 ‘전설’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영화였다. 이 영화에 이어지는 영화였던 <석양의 무법자>는 TV에서 볼 수 있었지만, <황야의 무법자>는 볼 수 있는 길이 없었으니 너무도 궁금해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1966년에 처음으로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그 휘파람 주제곡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그것 때문에라도 궁금한 영화였다. 다시 수입되어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다른 생각 없이 드디어 그 유명한 <황야의 무법자>를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서부영화’ 혹은 ‘서부극‘ 하면 미국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 그 나라를 무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니까. 그런데 언제 적부터인가 서부극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 탄생했다. 외국에서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했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마카로니웨스턴’이라고 불렀었다. 마카로니웨스턴은 일본 영화평론가로부터 시작된 제명이라고 하는데, 우리보다 영화 수입이 빨랐던 일본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서부극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1966년에 ‘이 주일의 영화’라는 신문 칼럼에서 <황야의 무법자>를 소개하면서는 “이제서부극(伊製西部劇)”이라는 원천적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문자 그래도 ‘이탈리아제 서부극’이란 얘기다. 하여튼 영화 좀 보겠다고 극장을 기웃거릴 즈음에는 그런 성향의 서부극이 눈에 많이 띄었다.
<황야의 무법자>는 최초의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외의 나라에서 상영된 것으로는 <황야의 무법자>가 최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그런 서부극을 만들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본 그런 스타일의 서부극이니까 관객들에게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본 동네 형들은 휘파람으로 그 테마음악을 불어가면서 그 서부영화 참 특이하고 재미있었다고들 했었다. 그러니 그 얘기를 넋 잃고 듣고 있었던 동네 꼬마들에게는 ‘전설’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그런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기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그걸 확인할 기회를 고교 시절에야 얻게 된 것이다.
<황야의 무법자> 즉 스파게티 웨스턴 스타일 영화가 처음으로 개봉하고 1년이 지난 1967년도 신문에 실린 칼럼 한쪽을 발견했다. 제목을 “무법자”라고 달고 있는 칼럼이었는데, 첫 구절부터 요즈음엔 이탈리아제 서부극이 유행이라서 그런 서부극이 아니면 서부극이 아닌 것 같다면서 시작하니 흥미가 당겼다. 그 이유를 들면서, 말보다는 총이나 주먹이 빠르다는 사상(?)이 미국판보다 이탈리아판 무법자가 더욱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의 욕구불만을 더 잘 해소시켜 주는 주인공이 바로 이탈리아판 무법자이기에 이탈리아제 서부극이 히트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도 순수 서정시와 같은 영화가 잘 팔리는 시대가 아쉽다, 고 말을 맺었다. 세월이 지나도 지금도 통할 수 있는 비슷한 분위기의 흐름 같은 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지금은 감독으로서의 명성이 더 커 보이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때 달러박스를 안겨주는 배우로 유명했었다. 나오기만 하면 관객들이 좋아하는 그런 배우 말이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이 영화 <황야의 무법자>부터였는데, 그의 주연 데뷔작이기도 했다. 그전까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드라마 <로하이드>의 목동으로 알려진 정도였다. 그런데 <로하이드>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에릭 플레밍을 비롯하여 헨리 폰다,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같은 배우들이 모두 거절한 배역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아서 성공시킨 것이다. 이젠 고정관념으로조차 작동을 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빠진 <황야의 무법자>는 생각할 수도 없지만, 맡을 뻔했던 배우들이 연기했더라면 어떤 이미지의 주인공이 탄생했을지 궁금하긴 하다.
<황야의 무법자>를 보았을 당시의 느낌은 솔직히 좀 오묘했다. TV에서나마 이 영화의 후속작인 <석양의 무법자(1965)>를 봐버렸기 때문에 영화의 톤이나 주인공의 이미지가 그다지 다르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다 보고 나서는 <석양의 무법자>가 전체적으로는 더 재밌었다는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설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다. 하지만 전설을 전설답게 대하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는지 그런 의미로 다가오는 장면들도 여럿 있었다. 우선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주제곡이 붙은 오프닝 타이틀이 나올 때 뿌듯했었다. 드디어 이 영화를 보게 되는구나 싶어서. 그다음에 역시나 했던 장면은 처음으로 나오는 건플레이(gunplay) 장면에서였다. 속사로 여러 발을 쿠당탕탕 쏘면서 한꺼번에 상대방 넷을 단번에 해치우는 장면이다. 꼭 보고 있는 사람이 총을 쏘는듯한 각이었기 때문에 옛날 신문 칼럼의 말처럼 욕구불만이 해소될 만큼 호쾌한 느낌이었다. 이런 연출력으로 영화를 성공시켰구나 싶은 마음이 이 장면 한방에 들어올 정도로.
<황야의 무법자>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역시 마지막 결투다. 전설로 이 영화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기도 했고, “윈체스터가 이기느냐? 콜트 45가 이기느냐?”라는 광고 문구로까지 선전되었던 장면이다. 조(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권총이냐 라몬(지안 마리아 볼론테)의 장총이냐의 대결이다. 상대방의 심장을 맞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듯 오만한 총잡이의 심리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보기 나름 그 과정이 유치하게도 우스꽝스럽게도 보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스파게티 웨스턴의 매력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찾는다는 면에서. 정통 서부극에서는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었기 때문에 고민스러운 점이 있었다. 악의 비열한 수에 걸려 선이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은 일종의 게임으로 보인다. 선악 구분도 쉽지 않은 총잡이 간의 싸움이 기본 설정이니까. 이 영화의 제목처럼 “한 움큼의 돈다발”을 위해서 싸우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다른 고민 없는 게이머의 입장처럼 그냥 이기면 되는 것이다. 시원하게 이기면 더 좋고.
라몬, 내 가슴을 쏴라!”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황야의 무법자>가 전설이 된 이유는? 복잡하게 생각지 않으면 아주 쉬운 질문이다. 당시로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도 할 수 있는 세 사람이 그 영화에서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음악 엔니오 모리코네가 그들이다. 그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세 사람이 만나서 성공시킨 작품이 <황야의 무법자>였는데, 세 사람 중 누가 빠졌어도 결과물은 달랐을 것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 무법자의 새로운 이미지 그리고 달라진 서부극에 대한 새로운 음악의 표준이랄까 패러다임이 <황야의 무법자>라는 그들이 함께 작업한 결과물에 의해 생겨났다. 그 이후 오랫동안 스파게티 웨스턴을 만들 작정을 한 팀들은 세 사람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들이 같이 만든 영화에 대해서도 전범(典範)을 대하듯 하는 태도를 보였으니까. 그래서 세 사람 각각이 그 영화를 만들 때 얼마나 친했는지 얼마나 많은 의견을 나누었는지와는 별개로 그들이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그런 영화가 탄생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만큼은 분명히 든다.
세르지오 레오네(1929-1989), 엔니오 모리코네(1928-2020),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현재)라는 거장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때의 전설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총잡이 영화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나름 끼어드는 것도 <황야의 무법자>란 요리의 고명이다. 그들은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입에 올리지 않고, 현재 그들이 하는 일만 보여주는 방식으로 끼어든다. 그들 모두 별다른 설명은 없어도 주인공 편에 서 있는 것도 막연하게나마 주인공이 좋은 사람일 거라는 뉘앙스를 은근히 풍기는 데 한몫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