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의 추억, <킹콩>
<킹콩>이란 희한한 동물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마 최초로 영화에 등장한 1933년판 <킹콩>의 기사를 잡지나 신문에서 보거나 혹은 TV에서 소개하는 형태로 접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동물의 발상 자체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존재할 거라는 믿음 비슷한 걸 가졌던 적은 없다. <킹콩>이 개봉하기 무섭게 열심히 달려가서 봤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킹콩’을 가깝게 알고 지낸 건 아니었다. 종이 만화나 TV 만화를 열심히 본 기억도 없고, 동화나 소설을 읽고 가슴이 쿵쾅거렸던 기억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킹콩>의 등장을 그렇게나 기다렸던 것처럼 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부터가 미스터리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보면 ‘킹콩’이란 말을 처음 본 것은 아마 ‘새소년 클로버 문고’로 나왔던 ‘영화 이야기’라는 제목의 단행본에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는 유명한 배우나 영화를 많이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그 시점으로 봐도 고전 영화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그 책을 보며 “아하, 이런 영화가 있었구나, 이런 배우가 있었구나.”하며 영화 감상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거기에 <킹콩(1933)>이란 영화가 소개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 보고 ‘킹콩’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쎄 기억이란 게...
1970년대야말로 SF영화가 제대로의 틀을 잡기 시작한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도 공상과학영화들은 존재했지만 그런 소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해서 그냥 속아주는 느낌으로 보는 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리우드 SF영화들은 소위 B급 영화(B Movie)로 탄생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돈을 들여서 실패하는 곤란을 피해 가고 싶었던지 저예산 B급 영화로 특수촬영이나 효과를 미리 시험하는 듯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킹콩 영화’의 오리지널이라고 볼 수 있는 1933년에 제작된 <킹콩>도 B급 영화로 분류된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킹콩>은 B급 영화이면서도 할리우드의 특수효과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인 시발점이었고, 오늘날의 영화가 스토리보다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는 기원이 된 것이 <킹콩>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특수효과와는 달리 <킹콩>의 위대함은 그 거대한 주인공의 ‘연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당시 두말없이 <킹콩>을 보러 간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킹콩’이라고 하면 볼거리로나 캐릭터로나 유명한 지 오래되었다는 얘기다. 하여튼 <킹콩>을 포함해서 <죠스>, <슈퍼맨>, <스타워즈>, <에어포트 75>, <대지진>, <타워링> 등 캐릭터나 상황을 쉽게 표현하기 힘든 영화들이 대거 1970년대에 개봉되었다. 이런 영화들은 예전의 B급 영화처럼 저예산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기술의 발달로 드디어 SF영화나 재난 영화가 예산으로 따지자면 A급으로 등장해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같다는 것만 하더라도 신기했던 시절이었으니까. 만화 같은 느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던 그림들이 드디어 스크린 위에서 실제 같은 위용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눈과 귀로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킹콩>도 그런 영화들 사이에 늠름한 자태로 서 있었다.
<킹콩>이란 영화는 커다란 몸집을 과시하며 당대 최고의 빌딩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킹콩의 존재 자체가 볼거리이기도 하지만 '미녀와 야수'형 러브스토리로 포장한 전략이 최고의 포인트였다. 오리지널 영화부터 ‘미녀와 야수’의 각색으로 보는 면이 컸고, 대사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야수를 죽인 건 미녀였다.”라며. 1976년 영화에서도 “우리 시대 위대한 러브스토리 중 하나”라는 선전 문구를 사용했다. 재미있는 건 우리나라 광고에는 그런 문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길”이란 문구가 그때 주로 사용된 광고 카피였다. 여주인공을 좋아하게 되고 결국은 그녀를 지키며 희생하는 것이 <킹콩>의 중심인데, 어째서 그런 내용을 전혀 비추려 하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은근히 눈길 가는 구석이 보이는 부분이다.
애초에 <킹콩>의 수입을 허가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영화진흥공사가 사전 심의를 하는 과정에서 ‘수입 부적합’이라고 판단했다면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진흥공사 측에서는 “보여주어도 좋고 안 보여주어도 좋은 오락영화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서는 수입이 부적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댔다. 그런 상황에 대해 심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둥 수입가가 비싸서 그렇다는 둥 말도 많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심사하여 수입 금지는 해제되었다고 발표한다. 참으로 웃기는 촌극이지 않은가. 뻔한 영화 한 편으로 시비를 걸어 놓고는 별다른 이유나 해명 한마디 없이 수입시켜 주면 되지 않냐로 끝이라니? 불필요한 일을 쓸데없이 벌였음이 틀림없다.
그랬던 나름의 이유를 추정해 본다면, 문제의 발단은 '선정성'이었을 것 같다. <킹콩>은 제작 단계부터 여주인공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그 리스트를 보면 다분히 섹슈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엠마뉴엘 부인>의 주연 여배우 이름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까. 결국 제시카 랭이 여주인공 드완 역을 맡게 되었지만, 데뷔작이라서 섹슈얼한 이미지에 대한 전력은 없었던 배우였다. 그렇지만 지금 봐도 드완의 의상이나 연기에서 다분히 선정적인 면이 느껴진다. 결정적인 한 방은 킹콩이 드완의 몸을 건드리는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꼭 장난감 다루듯 하는 느낌도 그렇지만 기어이 옷을 벗기는 데도 성공한다는 점이다. 당시 문제의 컷은 그 정도의 노출이 허락되지 않을 때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잘린 채 개봉이 되었지만, '타임'인지 '뉴스위크'인지 영어 잡지에서는 그 장면의 컷을 싣기도 했을 정도로 화제가 된 장면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영화 심의는 폭력이나 선정적인 장면에 유독 엄격했으니 그게 문제가 되지 않을 리 없다. 그것도 거대 원숭이와 인간의 애정 행위를 연상하게 되는 장면이니 말이다. 그래서 수입은 시켜 주지만 사랑이니 로맨스 운운하는 얘기는 말라는 당부(?)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는. 아직도 건재한 영화 그리고 당시 신문 자료들을 보고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려가며 재미로 써 본 소설이다.
<킹콩>을 처음 보았을 때 신기했던 것은 우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거대한 킹콩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관객의 눈을 붙잡은 캐릭터는 드완이었다. 제시카 랭은 이 영화로 데뷔했지만 청순하면서도 선정적인 매력으로 단숨에 저 배우 누구지?, 라는 생각을 낳게 했다. 그때로서는 매력적인 여배우 한 사람이 나타난 정도로 받아들였고, 그녀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녀의 연기 덕분이었다는 느낌이 짙어졌다. 당시 그녀는 만 27세로 전혀 어린 나이가 아니었지만, 성숙한 몸에 어린 마음을 가진 드완이란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제시카 랭은 그 인물의 특성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 데뷔작이라서 그녀의 연기력까지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세월 지나 <킹콩>을 보니 ‘청순’과 ‘선정’이라는 두 단어를 드완에게 동시에 붙일 수 있었던 건 제시카 랭의 연기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새삼 느껴진다.
<킹콩>에서 남자 주인공 잭의 역을 맡은 배우는 제프 브릿지스였다. 그 역시 당시에는 우리나라 관객에게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다. 그를 본 첫인상은 잘생긴 것 같지도 않고, 날씬해 보이지도 않고, 머리는 촌스럽게 왜 저렇게 길렀는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다 보니,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좋은 배우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킹콩>은 제목 그대로 킹콩이 주연이다. 등장은 좀 늦게 하지만 장렬한 최후로 관객의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면서 끝을 맺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다. 1933년판 원작에서부터 좋아하는 인간 여인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시선을 끌었지만, 1976년 리메이크작에서는 그의 마음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표정과 행동이 더해졌으니 효과도 커졌다. 결과적으로 호기심, 귀여움, 아픔, 괴로움, 슬픔 등을 엿볼 수 있었던 킹콩의 눈빛, 표정 그리고 행동은 그 커다랗고 폭력적인 야수를 마지막에는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다. 마지막에 드완을 지키려는 킹콩의 슬픈 포효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킹콩의 최후는, 별문제 없이 생긴 그대로 살고 있는 생명을 마음대로 데리고 와서는 구경거리를 만들어 이득을 얻으려 했던 인간들로 인해 벌어진 폐해였다. 자연과 생명을 자신들의 욕심에 맞추어 서슴없이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본능적으로 맞서는 자연과 생명의 대리자 역할이 킹콩이었던 셈이다.
<킹콩>의 끝자락에 왜 저럴까, 하는 장면이 있다. 킹콩이 죽고 난리 치는 언론사 인간들 속에서 슬픔으로 절규하는 드완을 데리러 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쳐다만 보고 있는 잭을 잡은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다. 왜 그랬을까? 저렇게 유명세를 치르며 살아야 할 드완을 더 이상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서? 애초에 킹콩과 연루되어 있었던 자신들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멍때림? 인간들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저렇게 가련한 최후를 맞은 거대한 생명도 있는데 드완을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는 게 양심에 찔렸나? 감독이나 각본에 의한 것인지 어떤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킹콩의 죽음과 더불어 남겨진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이 셋이 있었다. 킹콩은 죽었다. 드완은 갇혔다. 잭은? 일종의 열린 결말로 보여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킹콩>에서 킹콩이 최고로 잔인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둘 있다. 그 하나는 킹콩을 그대로 섬에 살게 두지 않고 뉴욕으로 데려온 인간을 밟아버리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지하철 속에서 드완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자를 드완인 줄 알고 집어 올렸는데 아니니까 사정없이 던져버리는 장면이다.
<마지막 황제> 등으로 유명한 존 론(John Lone)이 단역으로 출연한 모습도 <킹콩>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킹콩>으로 인종주의를 거론했던 비평가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흑과 백에 대한 논리였다. 이 장면에서는 존 론이 짜증 내는 백인의 행동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까지 그대로 보여준다. 내용상 별 필요도 없는 이 장면을 보면, 인종주의에 대한 어떤 의도라도 있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