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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Nov 12. 2024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고교 시절의 추억,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은 너무나 유명한 문학작품이자 이미 유명해져 있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당시 남자 고교생들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던 영화보다는 ‘줄리엣’으로 부각된 그녀에게 눈길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68년에 제작된 영화의 주제곡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줄리엣 역할을 맡았던 그녀의 사진은 이미 사방팔방에 붙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올리비아 허시 - 당시에는 올리비아 핫세 – 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서는 책을 읽지 않았어도 이미 결말을 다 알고 있었으니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감상하러 간 영화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으니 관심거리가 ‘줄리엣’이라고 말하더라도 실제 눈길은 오직 ‘올리비아 허시’를 향하고 있었다.


1969년에 개봉했을 때의 신문 광고

     




지금까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각색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세어보겠다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 더하여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나 드라마도 참 많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챙겨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1936년과 1954년 그리고 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와 1996년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1996)> 정도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을 맡은 배우로 관심을 끌었던 영화는 단연코 1968년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우선 원래 배역에 맞게 가장 어린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었을 당시의 신문 기사에는 “세계 최연소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소개하며, “16세의 레오나드 위팅과 14세의 올리비아 허시는 기성 배우에게서 볼 수 없는 티 없이 순박한 얼굴과 기교 없는 연기를 보여줘 신선감을 주었고”라고 평하고 있었다.


1969년 경향신문 칼럼


고백하지만 고교 시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간다기보다 올리비아 허시를 보러 그리고 ‘What is a youth?’를 들으러 가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이미 그녀와 그 노래는 너무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여고생들은 올리비아 허시 자리에 레오나드 위팅을 넣어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이미 아는 사람 다 알았던 배우와 노래를 내 눈과 내 귀로 확인했다는 인증을 받고 싶다는 셈이었다. 물론 그녀의 사진이야 여기저기 어지간히 붙어 있어서 많이 봤지만,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울고 웃고 숨 쉬며 걷고 뛰는 생생한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극장에서 보는 것 말고는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시절이라서 영화를 봐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1968)




<로미오와 줄리엣>은 워낙 많이 들어서인지 내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워낙 젯밥에만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주변 친구들 모두 기대하고 간 만큼이나 만족했던 포인트는 줄리엣 즉 올리비아 허시의 외모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하니까. 그런데 이 지점에서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진 생각을 털어놓고 싶다. 그때 우리가 끌렸던 건 영화 속 줄리엣이 아니라 올리비아 허시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방향이 바뀌더라는 얘기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캐스팅이 적확했다는 방향으로 말이다. 생각나는 대로 따져보자면 이런 식의 논리다. 우선 올리비아 허시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떠들썩하게 이름을 알렸지만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그만큼 화제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썸머타임 킬러(1972)>나 <그레이트 후라이데이(1976)> 등 ‘올리비아 핫세’라는 이름을 크게 걸고 개봉하여 나름의 흥행 성적을 올린 영화도 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할 영화들은 전혀 아니었다. 인지도에서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런 영화에서 올리비아 허시의 모습은 줄리엣 역할 때만큼 예쁘지 않았다. 시쳇말로 세월 즉 나이 탓도 있겠지만 캐릭터 연출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줄리엣으로 등장시킨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판단과 작품 속에서의 조율이 그녀를 더욱더 예쁘게 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자면 올리비아 허시보다 줄리엣이 더 예뻤다는 것이다. 그녀를 줄리엣으로 잘 치장시킨 다음, 줄리엣의 매력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도록 꾸며진 무대에서 연기하게 했던, 감독의 연출 덕이었다는 생각이다.



프랑코 제피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말 그 시대를 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시대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복식의 사람들과 그런 양식의 건물들 그리고 실내의 분위기까지 오랜 옛날 그 어딘가에 와있다는 느낌이었다. 시어적 대사 때문에 당시로서는 몰입이 힘들었던 벽을 시대적 재현이 충실했던 분위기 덕분에 넘어설 수 있었다고나 할까.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나게 해 주었던 가장무도회 장면이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때 그곳에 있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지켜보게 만들었다. 특히 미성의 가수가  ‘What is youth?’를 부를 때에는, ‘환상적(Fantastic)’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사용할 수 있겠구나, 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 톰과 제리가 만나더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춘기 시절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것으로는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을 감싸고 있었던 문화를 구경하는 정도였다. 저런 사랑도 있구나,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들이 내뱉는 우아하고 고상한 대사도 오글거렸다. 그래서 그들에게 닥쳐온 아픈 마지막에 대해서도 그렇게 슬퍼하지 못했다. 원작에 줄리엣의 나이가 13세, 로미오의 나이는 10대로 되어 있으니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 어린 사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나누는 시적인 사랑의 밀어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사랑의 과정 또한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비극적 종말 또한 지나치게 성급해서 맞게 된 결과로 느껴지기만 했다. 말하자면 흔히 영화에서 보던 그런 시작과 중간 과정 그리고 결말 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는 얘기다. 그때는 별로 따질 생각 없이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프게 느끼기 힘든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더욱더 가슴 아픈 이야기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어린 나이라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아등바등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이 처음 만나서 밤새도록 대화 나눌 때의 마음, 다시 만났을 때 좋아서 감당이 안 되는 몸짓, 친구와 친척의 죽음에 대한 대책 없는 행동과 슬픔까지 모든 게 일관되게 어린 사람들의 어린 행동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어설픈 사랑을 성숙한 사랑으로 지켜보려 했으니 이해하기 어려웠을 수밖에. 그들은 철부지 설익은 사랑을 한 것이다. ‘What is youth?’의 가사 "Cupid he rules us all."로도 표현했듯 큐피드 화살에 맞아 좋아하는 감정조차 감당해 내기 힘들 만큼 정신없는 사랑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런 마지막이 순식간에 펼쳐지게 된 것은 어린 그들에게 섣부른 선택을 하게 만든 어른들 탓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비련, 비극적 사랑의 종말, 낭만적 비극, 지고지순한 사랑, 비운의 연인(star-crossed lovers)...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에 바쳐진 일종의 헌사다. 안타깝다기보다는 우아하고 고상한 듯한 냄새가 풍긴다. 나이가 들어서야 왜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들지 않았는지 나름은 알겠다는 느낌이 왔다. 로미오도 줄리엣도 햄릿, 리어왕, 오셀로 그리고 맥베스만큼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햄릿의 대책 없는 심적 갈등, 리어왕의 섣부른 판단, 오셀로의 끝 간 데 없는 의심, 맥베스의 권력에 대한 야욕 같은 것이 로미오와 줄리엣에게는 없었다. 사랑으로 정신을 못 차리던 중, 뜻 모를 양가 싸움에 휘말리면서 제대로 각본이 짜여 있지도 않은 연극의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다. 자신들 탓은 서로를 좋아한 것일 뿐 다른 모든 것은 남들 탓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선택은 같이 갈 길이라고 생각한 죽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미련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 수 있나. 아름다운 사랑에 바치는 헌사보다는 그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두 영혼의 한이라도 풀어주어야 하지 않나.


오늘이 종말이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영원한 사랑과 진정한 자아를 찾아요.


1979년에 재개봉했을 때 신문에서 사용된 카피 문구다. 원작에 의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만난 지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닷새간의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았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닷새 만에 종말을 맞은 것이다.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안타깝고 허무한 사랑의 여정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세력과 피 터지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소년 소녀가 그렇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기에 오래도록 심금을 울리며 영원한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기억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쩔 수 없이 안타깝게 끝을 맺게 된 사랑으로 전해지고 있고 거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지나니 조금 더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싶어 진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남긴다고 그들의 못다 한 사랑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니까. ‘천추의 한’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천 번의 가을이 지나도 남을 한(恨) 말이다.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는 순간도 순간적이었고 그들의 삶이 갑작스레 끝에 가기까지의 시간도 너무나 짧았다. 한 마디로 너무나 안타깝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은 너무도 짧았고 그래서 대책이 없었고 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것을 애달프게 지켜보며 그래서 사랑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다가 계속 그렇게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의 대명사 햄릿이 말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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