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의 추억, <죠스>
<죠스>는 욕심이 어떤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영화였다. 물론 그것은 스스로가 일으킨 인재(人災)였다. 욕심이란 다른 게 아니라 영화를 많이 보려는 욕심이었다. 엄청나게 기다리던 <죠스>가 개봉한 그 시점에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도 동시에 개봉된 것이다. 영화를 오늘 보고 내일 볼 만큼 넉넉한 시간을 갖기는 힘든 시절에. 고민한 끝에 하루에 몰아보기를 결심했던 것은 한 마디로 과욕이었다. 몰입해서 두 편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그날로선 없었던 것이다. 컨디션 때문이었는지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과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기대했던 <죠스>는 머리를 감싸 안고 볼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제임스 본드의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작별하기 무섭게 <죠스>와 만나겠다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대를 한껏 안고 보러 갔던 <죠스>는 제정신으로 보지 못했다. 너무 머리가 아파서 끝까지 보고 나올 생각만 했었지만 차라리 안 본 것만 못했다. <죠스>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끝나기만을 기다렸으니까. 그것은 즐거움으로 이어졌던 영화감상 이력에 오점으로 남은 소위 흑역사였다.
<죠스>, 얼마나 기대하고 고대하던 영화였는지 모른다. 신문에서는 엄청난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천재 감독이 나타났다... <죠스>가 엄청나다는 얘기를 심심하면 늘어놓으니 그 영화가 궁금하고 보고 싶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 인기가 좋아서 그런 건지 비싼 영화라서 그런 건지 우리나라 차례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겠고, 심심하면 비슷한 제목을 단 짜가 영화까지 등장하니 헷갈리기까지 했다. 사실 '짜가'라는 말을 쓰기는 그렇지만 당시 우리나라 관객으로서는 언제 그 영화가 들어오나 하고 있었고, ‘죠스’라는 제목으로 확정되어 있던 시기도 아니었다. 아가리, 백상어, 백상아리, 식인 상어 등등 온갖 단어들이 그것을 지칭하는 듯 사용되고 있었다. 비슷한 제목이 보이면 “아! 그 영화인가?”하는 착각을 충분히 불러일으킬 만한 시기였기에 비슷한 영화가 보이면 그런 의미를 담은 대화를 나누었던 건 사실이다. 그 대화란, “진짜가?”란 질문에 “가짜다!”라고 대답했던 걸 말한다. 그랬던 대표적 영화가 <백상어>와 <상어 이빨>이었는데, 특히 <백상어>의 광고 카피는 그 의도가 수상해 보일 정도였다. 영화 <죠스>는 우리나라 상영 전에는 <아가리>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화제의 백상어다!
사람만을 노리는 식인 상어의 거대한 아가리!
이것은 진짜 백상어 아가리!
<죠스>는 1975년에 세상에 나와서 그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1978년에야 우리나라 관객들이 볼 수 있었으니 참 오래도록 기다린 셈이다.
<죠스>에는 주인공급 인간이 세 사람 나온다. 경찰서장 브로디(로이 샤이더), 상어 사냥꾼 퀸트(로버트 쇼), 해양학자 후퍼(리처드 드레이퍼스)가 그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다수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당사자는 브로디였다. 비겁한 정치꾼과도 싸워야 하고, 동네 주민들과의 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상어를 잡기 위해 고용한 외지인들도 다독거려야 하고, 결정적인 것은 주민들의 밥그릇이 달린 현장에서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놈이 나타났으니 치안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느닷없이 등장한 그놈의 백상아리를 없애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브로디가 바다에 대해서도 바다생물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란 점이다. 세 사람 중 나머지 두 사람은 바다에 대한 전문가였다. 퀸트는 해군 출신으로 끔찍한 전쟁의 상흔을 가진 데다 상어 사냥꾼인 만큼 바다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고, 후퍼는 해양학자인 만큼 바다에 대하여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물을 싫어해서 헤엄조차 못 치는 브로디가 어지간한 바닷사람도 당해내지 못하는 백상아리를 어떻게 당해낸다는 말인가. 바로 그 점이 <죠스>를 흥미롭게 지켜보게 만드는 기본 요인이었다. <죠스>는 나약한 인간 브로디와 거대한 백상아리 죠스의 한판 싸움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거대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었던 셈이다.
<죠스>의 원작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 내용을 소개한 글을 잠시 들여다보니 영화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런 분위기라면 브로디 서장의 애틋한(?) 활약이 빛을 잃을 것만 같았다. <죠스>에서 브로디라는 캐릭터가 없다는 가정을 할 수가 없었다. 다소 딱딱해 보이긴 하지만 상냥하고, 믿음이 가고, 가정적이고 거기다가 마음 약해 보이는 면까지 보이니 인간이라면 응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런 매력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끝까지 손에 땀을 쥐며 그를 응원했었고 결국은 그가 이겨냈다는 안도감을 가지며 편안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죠스>에서는 브로디 가는 곳에 항상 죠스가 있었다. 죠스는 넓은 바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리의 눈은 브로디를 따라다녔으니 브로디 가는 곳에 죠스가 있었다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여튼 영화 속에서 죠스가 무슨 짓을 벌일 때마다 그 영향이 브로디의 표정으로 드러나곤 했는데, 그 표정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첫 장면에서 죠스에게 당한 여학생의 일부분이 발견될 때가 그 표정의 시작이고 죠스를 제압한 후 기뻐할 때가 그 마지막에 해당된다.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그 표정들 속에서 그의 마음이 읽히는 듯 느껴지는 감정이 재미있더란 것이다. 그중에는 흔히 돌리 줌(Dolly Zoom)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촬영된 - "죠스 샷"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 - 유명한 장면도 들어있다. 관객의 시선은 브로디에게 집중되는데, 완전히 심리적으로 멘탈이 나간 걸로 보이는 표정을 잡은 장면이다. 바짝 긴장하여 주시하고 있었던 중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죠스의 퍼포먼스를 보았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브로디의 아들 마이클이 당할 뻔했을 때였다. 그때 브로디는 이놈의 자식 기어이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스파게티 웨스턴 총잡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보였다. 난감, 당황, 분노, 공포, 희열로 이어지는 브로디의 표정 시리즈는 이 영화의 전개를 차례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었다.
브로디는 뉴욕 출신이면서도 복잡한 도회지보다는 자연경관이 좋은 조용한 시골을 택해서 살고 있다. 별일 없이 조용히 편하게 지내길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처럼.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자연에 가까워지고 싶다고들 말한다. 귀농이나 귀촌도 그런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온갖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자연에게 물어서 결정한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텐가? 보통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다는 얘기 많이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나 싶어서. 자연은 인간이 원한다면 무조건 벗이 되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에게 별로 해주는 것 없이 뜯어만 먹고사는 인간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싫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나온 지도 참 오래되었다. 아직도 자연은 아무 말 없이 인간 곁에 있어 주어야만 하는 존재처럼 구는 인간의 오만한 행동은 그치질 않고 있다. <죠스>의 브로디도 그래서 수영도 못 하는 주제에 바닷가로 오는 만용을 부린 거 아닐까. 하지만 그런 자연의 일부인 백상아리를 만나서 제대로 고생한 셈이다.
자연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죠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함을 그린 영화로 봐도 좋을 듯하다. 인간은 제들 놀이터 만들 생각에만 급급하지만, 그곳이 놀이가 아니라 삶의 터로 삼고 있는 생명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을까. ‘죠스’ 역시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먹이를 찾아 나선 동물인 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죠스>가 상영된 지 벌써 50년이다. 지금의 바다는 거대한 백상아리로 인한 피해보다는 인간이 배출한 폐기물로 인한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죠스에게 해를 입을까 봐 걱정한 곳은 조그만 시골 마을 아미티였지만, 쌓여만 가는 폐기물로 인한 걱정은 전 세계가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생각마저 든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건강하고 크게 자란 백상아리 죠스가 멀쩡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환호하며 맞게 되지 않을까, 라는.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죠스가 있더라도 건강한 자연이 버티고 있으면 아미티의 걱정일 뿐이고 브로디의 활약으로 끝날 일일 것이다. 자연 훼손으로 인한 걱정거리가 넘쳐나서 슈퍼맨의 활약이 필요한 일로 키우지 않으려면, 지금 인간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너무 기대한 나머지 무리하게 봤다가 두통만 안고 돌아왔던 <죠스>의 첫 감상 경험은 너무나 아팠다. 왜 그런 문제작을 재미있게 지켜보지 못했을까, 라는 자책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무조건 많이 보는 게 최고인 줄 알았던 영화감상에도 신체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컨디션이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죠스>가 그런 우중충한 상태로 마음속에 담겨있었다면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대견스럽게도 그것은 세월 지나면서 극복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죠스>를 정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더니 생각보다 쉽게 잡혔으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더운 여름에 시원한 공간에서 큰 화면으로 편한 시간에 마음 다잡고 감상했더니 문제없이 그때 놓친 재미를 붙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트라우마로 남을 뻔한 심리적 상흔은 말끔히 없어졌다. 이제 <죠스>의 감상은 매년 여름이 되면 자연스럽게 실행에 옮기는 연중행사가 되어버렸다.
뽀빠이같이 생긴 아저씨가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시금치 통조림 먹고 힘내는 아저씨를 아는 사람은 한방에 앗! 했을 정도였으니까. IMDB에 찾아보니 언크레딧이긴 하지만 이 아저씨의 이름도 도날도 풀(Donald Poole)이라고 나와있다. 뽀빠이 분장을 시켜서 출연시킨 배우일까? 아니면 뽀빠이 분장을 좋아했던 사람이어서 출연시켰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