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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Nov 26. 2024

디어 헌터가 불렀던 노래
"마이 홈 스위트 홈"

고교 시절의 추억, <디어 헌터>


<디어 헌터>는 인생의 영화로 불러도 될 만큼 큰 울림을 준 영화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1979년 3월 3일에 개봉하였는데,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5개의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뉴스에서 접한 것은 같은 해 4월 11일 자 신문에서였다. 그때 <디어 헌터>가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상영 중인 극장에서 광고로 싣기까지 했었다. 잘 나가는 외국영화라면 몇 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었던 당시로서는 그런 일 자체가 신기하게만 여겨졌다. 아쉽게도 <디어 헌터>의 우리나라 등급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기 전에 <디어 헌터>를 감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더욱더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등급 외 관람을 눈감아주던 재개봉관에 가사 밤에 혼자 보았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 많은 걸었던 것 같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해야 할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화」라고 하면 일단 전투를 치르는 장면이 많아야 하고, 그 전투 속에서 무언가 영웅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 있어야 하는 불문(不問)의 원칙이 있었다. 그래야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 즉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월남전 영화로 유명한 <디어 헌터>는 전투 장면도 별로 없고, 그 속에서는 감동을 얻어낼 수도 없었다. 감동은커녕 봐 내기 힘들 정도로 곤혹스러운 장면의 연속이었다. 포로 생활로 인한 모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흔히 전쟁 영화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디어 헌터>가 처음 개봉했을 때는 그다지 관객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차츰 관객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아카데미 작품상 소식을 듣고 나서는 더욱더 많은 관객이 들게 되어 3개월 이상 상영하는 히트작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신문에서는 우리 관객들이 상에 약하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었다. 어쨌든 결과론이긴 하지만 처음에 관객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흔히 말하는 전쟁 영화에서 기대하던 모양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용감하고 멋있게 싸우고, 전우 간에 브로맨스가 넘치고, 뭔가 중요한 상황이 벌어지고, 어느 순간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과묵한 히어로의 장렬한 퍼포먼스... 전쟁 영화 팬이라면 대략 그런 것을 원하기 마련이었는데 <디어 헌터>는 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었다.



디어 헌터 (The Deer Hunter, 1978)



처음 <디어 헌터>에 대한 소식은 미국의 자존심에 관련된 영화로 보는 시선으로 전해졌다. 당시까지 미국에서는 월남전 얘기를 하는 것이 터부시 되어있었을 정도로 상처와 좌절로만 인식하는 분위기였지만, <디어 헌터>가 나오면서 그 아픔을 달래는 차원으로까지는 진전한 듯한 느낌을 전했다.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월남전의 실패를 극복하고자 하는 형식으로 보는 듯한 투로 들리기도 했다. 고교생 입장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릴 때부터 맹호부대나 백마부대 군가도 알았고, 월남으로 떠나는 파병 군인 아저씨들을 항구에서 배웅한 경험도 있어서 월남전이라면 낯설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거기까지였다.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당사국인 미국인들이 그 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만 알고 있었으니 거기 사는 사람들은 고기도 초콜릿도 많이 먹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밖에 못해봤다. 그런 상태로 <디어 헌터>를 보았으니 참 혼란스럽기도 했고,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도 처음 알았다. 따지자면 어릴 때부터 젖어 있던 전쟁 영화 판타지에서 벗어나서 그것이 남기는 아픔이 무언지를 생각하게 해 준 영화가 <디어 헌터>였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전쟁의 아픔이 그려진 영화는 있었지만, <디어 헌터>에서 받은 느낌은 너무나 놀랄 만큼 구체적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 간에 벌어진 일이란 설정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릴 적 친구들과 그런 시련 뒤에 그런 비극까지 맞아야 하는 상상을 해봤기 때문이다.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지내는 모습이 훨씬 많이 그려진 <디어 헌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나라 개봉 시 <디어 헌터>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기 때문에 개봉관에서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초조하게(?) 기다리다 재개봉관에서 보게 되었는데 평일 밤에 같이 갈 친구를 찾기가 힘들어서 그냥 혼자 가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디어 헌터>라는 말만 나오면, 기가 막힌 일을 만났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하나 있다. 물론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은 전혀 아니지만 영화와 영화음악을 좋아했던 소년에겐 그것조차 내게 벌어진 축복이라고 자축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알았던 영화의 주제곡에 관한 것이었다.


<디어 헌터>하면 생각나는 주제곡은 당연히 ‘카바티나’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기타 연주곡이다. 라디오로 들었던 영화음악 시간에는 그 주제곡 속에 배우들의 대사가 들어있는 스크린 사운드트랙을 많이 들려주었었다. 그것은 마이클(로버트 드니로)이 노크를 하자 린다(메릴 스트립)가 “열려 있어요!”라고 하지만 계속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는 놀라면서 “오, 마이클!”하고 반기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 전에는 주제곡 ‘카바티나’가 계속 흐르고 있었고. 그 사운드트랙을 너무나 많이 되풀이해서 들어서 귀에 못이 배길 정도였다. 그런데 극장에 들어선 순간, 정확히 그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스크린에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 들어도 가슴이 아릿해 오는 ‘카바티나’의 기타 멜로디와 함께 말이다. 당시 재개봉관에서는 영화 상영 중에도 들어갔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었던 일이다. 그런 기적(?)에 흥감한 나머지 그 시간의 영화를 다 보고 그 뒤에 시작하는 마지막 상영까지 보고 집으로 가는 모험을 단행(斷行)해 버렸다.



<디어 헌터>를 생각하면 제일 많이 생각나는 장면이 그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주제곡이 너무나 어울리는 장면이라서다. 그것은 일종의 세뇌랄까 요즘의 시쳇말로 가스라이팅 때문일지도 모른다. 라디오로 들으며 그 부분을 녹음해서 마르고 닳도록 계속 들었던 게 그렇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외의 이유를 들라면 마이클의 행동이 그런 생각에 방점을 찍었다는 생각이다. 마이클은 고향에 도착해서도 친구들의 귀환 축하 파티가 열리는 집을 일부러 패스하고 모텔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날 근처 언덕에서 친구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다가는 내려가서 문을 두드렸고 그 집에 살고 있던 린다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집은 마이클과 닉이 살던 집인데, 베트남에 가면서 린다에게 빌려준 집이었다. 마이클이 애써 조용히 맞은 그 상황이 전쟁으로 인하여 얽혀버린 그들의 청춘, 우정,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이란 현실을 다시 마주한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음악과 어우러진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고 그 여운이 참 길게 갔었다.


<디어 헌터>는 닉의 장례식을 마친 친구들이 테이블에 앉아 생각지도 않았던 ‘God Bless America’를 부르고 나서 “닉을 위하여!”라며 건배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장면에 대하여, 전쟁의 상처를 가지고도 좌절하지 않고 ‘비바 아메리카’ 노래를 부르더라고 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세 시간 동안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도 그렇게 느껴질 수 있나 싶었다. <디어 헌터>를 몇 번을 봐도 그것이 나라를 찬양하는 노래로 들리지는 않아서다. 전쟁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친구를 묻고 와서 마주 앉은자리에서, 바로 그 전쟁에서 불구가 된 친구도 함께 한 자리에서, 굳이 국가 찬양의 목적으로 노래를 부르고자 했겠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위로를 받아야 할지조차 막막했을 그들이.



이 영화의 결혼식 장면에서 건물 양식, 음악과 춤 등을 보면 러시아식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고 베트남에서 병원에 있는 닉에게 군의관이 러시아 이름이냐고 묻는 장면도 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러시아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란 얘기다. 즉 이 사람들은 모두 러시아 이민자나 그 후손들로 철강 노동자 역할로 살아가는 소시민이었다. 문제 삼은 미국 찬양가 ‘God Bless America’를 작곡한 사람은 저 유명한 ‘White Christmas’의 작곡자이기도 한 어빙 벌린(Irving Berlin)이며, 이 사람 역시 러시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이 미국 사람이 아니라 러시아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연관성을 지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면도 재미있지 않은가. 의도적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어 헌터>의 마지막 장면, 닉의 장례식 후에 모두가 함께 앉은자리에서의 풍경은 참 슬퍼 보였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일상처럼 얘기를 나누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서로 현재의 아픔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듯 말하고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말이다. 결국 한 친구가 울먹이며 흥얼거리는 ‘God Bless America’의 멜로디를 따라 다 함께 노래 부르며 죽은 친구를 위해 건배하는 정지 화면이 문자 그대로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외쳐 부르고 싶었을 가사도 그 노래 속에 들어있다. 한 구절을 고르라면 마지막 구절이지 싶다.


God bless America, my home sweet home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내 고향 아늑한 내 집




보태는 말

<디어 헌터>는 미국의 유명한 평론가의 한마디에 치명타를 맞았다. 그 시절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때까지 좋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디어 헌터>는 그 한방에 그로기 상태를 맞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은, 베트콩을 마치 그들이 사디스트여서 의식적으로 고문과 죽음의 놀이를 즐기는 것 같이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그것이 물살을 타게 되자 <디어 헌터>에 대한 비난은 정말 거세게 퍼져나갔었다. 감독인 마이클 치미노는 정치적이거나 논쟁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다는 반박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터진 둑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 연출작이었던 <디어 헌터>로 대박을 터뜨리긴 했지만 아쉽게도 그것으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오르막은 끝이었는데, 지나서 생각이지만 대단한 성공에 이어진 거센 후폭풍이었기에 심적으로 크게 영향받지 않았을까 싶다. 돈벼락이 하늘 벼락보다 무섭다더니 성공도 갑작스러우면 세상이 가만있기가 힘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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