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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May 19. 2024

스잔나, 샨샨, 청춘무곡 & 리칭

그 시절의 추억 그리고 영화, 리칭의 <스잔나>


스잔나 (珊珊, 1967)


1970년에 개봉한 홍콩 영화 <스잔나>의 바람은 엄청 거셌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나이에도 그걸 느낀 이유는 그 영화에 나온 노래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희한한 발음의 노래가 온 동네를 휘졌고 다녔을 정도였으니까. 그때 들은 걸 지금 써보라고 해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울려 퍼진 그 노래의 제목은 ‘청춘무곡(靑春舞曲)’이었다.


‘청춘무곡’이란 노래는 초등학생 수준의 귀에 확 와닿는 노래는 아니었어도 박자도 빠르고 멜로디도 밝아서 최소한 재미있는 노래라는 생각은 했다. 형이나 누나가 부르는 걸 흉내내서 부르는 친구들이 많았었는데, <스잔나>가 엄청 히트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와서 동생들에게 자랑삼아 노래를 불러댄 결과였다. 웃기는 건 부르는 친구마다 한글로 써보라면 하나같이 가사가 달랐다. 제대로 된 발음도 모르면서 들리는 대로 불렀던 엉터리 가사였다는 얘기다.



‘청춘무곡’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스잔나>가 알고 보니 아주 슬픈 영화였던 사실도 아이러니였다. 그렇게 슬픈 영화를 보고 왔다면서 어쩌면 그렇게 흥겨운 노래를 쉬지도 않고 불러쌓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관심을 끌었던 <스잔나>라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기회는 공짜표 덕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어른들 따라서 같이 가게 되었는데, 영화의 내용보다 ‘청춘무곡’이란 노래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가 제일 궁금했다.


<스잔나>가 시작하면서 등장한 주인공 샨샨(리칭) -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제목에서 따온 이름 ‘스잔나’로 불렀지만 실제 이름은 ‘샨샨’이었다 - 은 비슷한 또래였다. 그래서인지 샨샨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홍콩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산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음식, 옷차림, 자동차, 거리의 여기저기... 모든 게 다 우리보다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대도시는 제법 본 눈에도 한눈에 우리보다 나아 보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환경에 더 눈이 갈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 샨샨에게 지고 시작한 셈이었다. 시골아이가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를 보고 별 생각할 것도 없이 기가 죽는 그런 감정이랄까.



<스잔나>의 주인공 리칭(李菁) 이전에는 동양계 외국 배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연 배우 리칭을 보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익숙한듯하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궁금하던 ‘청춘무곡’을 율동을 곁들여 부르는 리칭의 모습을 보자 왜 발음도 이상한 저 노래가 우리나라 곳곳을 휘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리칭의 매력이 빵 터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리칭’과 ‘청춘무곡’ 그리고 이국적 풍경이 당시 <스잔나>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그런 이미지가 얼마나 진하게 느껴진 건지 감사하게도 리칭이 꿈에 나타나기까지 했었다. 여기까지가 어린 시절 예기치 않게 만났던 <스잔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스잔나>를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예전의 홍콩영화 DVD가 발매되면서 수많은 당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속에 있는 리칭 주연 영화들을 보니 난생처음 본 홍콩영화 <스잔나>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잔나>의 샨샨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가 지나서 다시 만난 <스잔나>다 보니 그때는 알지 못했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유명했던 ‘청춘무곡’은 여전히 경쾌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렇게만 들을 노래만은 아니었다. 가사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태양은 다시 뜨고 
꽃은 다시 피지만
아기 새 멀리 날아가면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아
아기 새야 날아가지 마라
네가 가면 청춘도 가버리니까


아기 새가 멀리 날아간다는 건 세월이 그만큼 흐른다는 얘기니, 세월이 흐르면 청춘은 가버리는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날아가지 말아 달라고 새에게 부탁하고 싶을 만큼 애절함을 담아서. 리듬은 경쾌하지만 청춘의 무상함을 담고 있는 따지자면 슬픈 노래였다. 샨샨의 정신이 혼미한 모습이 처음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니 슬픈 결말을 예고하는 노래이기도 했던 셈이다.



<스잔나>를 다시 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샨샨이 죽어가면서도 연기했던 <홍루몽(紅樓夢)>의 여주인공 ‘임대옥(林黛玉)’에 대한 것이다. <홍루몽>을 읽어보지 않은 탓에 임대옥이란 캐릭터를 몰랐기에 일찍 죽는다는 점에서 샨샨과 닮았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스잔나>의 장면을 보니 그렇더란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신문칼럼에 임대옥이란 이름이 보여서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서 찾아보고는 무릎을 쳤다. <스잔나>의 샨샨이 <홍루몽>의 임대옥에서 비롯된 캐릭터라는 걸 그제서야 알아챈 것이다.


정리하자면, 임대옥은 미모와 재능을 두루 겸비했지만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격에 부귀공명이나 세속적 관습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샨샨 역시 성격은 괴팍하고 까칠하지만 수학이든 노래든 못하는 게 없는데다 죽음을 앞두고도 무대에 서야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니 그이가 그이 아니겠는가. <스잔나> 탄생의 근원지가 바로 <홍루몽>이었던 것이다.


<스잔나>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칭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 마지막이 너무 쓸쓸했다는 기사를 보니 <스잔나>가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스잔나>를 보니 예전 모습 그대로의 청순한 샨샨이 여전히 발랄하게 ‘청춘무곡’을 부른다. 외로운 말로(末路)를 걷다가 쓸쓸하게 마지막을 맞았다는 리칭의 청춘은 바로 저 샨샨이었는데. 샨샨은 청춘을 아쉬워하며 떠났지만 리칭은 가버린 청춘을 아쉬워하며 떠났을 것이다. 스잔나, 샨샨, 리칭을 알게 해 준 ‘청춘무곡’이 참 슬프게 느껴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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