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 벼랑 끝에 서서 (2025)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녀는 흑인 싱글맘 저나이어 윌킨슨(Janiyah Wilkinson)이고, 투잡을 뛰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어린 딸은 선천적으로 아프다. 학교에서 식대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고 아이들 있는 곳에서 면박을 주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어느 날이다. 학교에서 아이 문제로 오라고 한다. 식대 문제인가? 직장(마트)의 매니저에게 얘기했지만, 핑계로 일 빠지 말라는 잔소리 끝에 받은 시간은 30분이다. 학교에 가보니 엄마의 돌봄이 시원찮다며 복지위원회에서 애를 데리고 간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차를 빨리 몰고 가다가 도로에서 백인 남성과 시비가 붙었다. 그 남성은 쫓아와서 저나이어의 차를 들이받고 엄청난 욕까지 쏟아부었다. 경찰에게 가자고 하니 본인이 경찰이란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백인 여자 경찰은 돈이 없다고 사정을 해도 딱지를 끊는다. 집에 가보니 집세가 밀렸다며 짐을 몽땅 밖에 내놓았다.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직장에 가서 아이 식대와 집세라도 내려고 월급을 달라고 했더니, 2시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해고라며 월급도 당장 지급해 줄 수 없단다. 그 순간 강도가 총을 들고 들이닥쳐서는 돈 내놓으라고 위협한다. 매니저는 강도에게 돈을 내주지만 그걸 막아보려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강도를 총으로 쏘았다. 매니저는 그걸 보고 경찰에게 전화하더니 다짜고짜 저나이어가 강도와 짜고 한 짓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
월급을 수표로 끊어서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려니까 신분증 없다고 안된단다. 지점장도 직원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임에도. 권총을 꺼내 책상을 두드리며 바꿔 달라고 하니 있는 돈을 다 꺼내주려고 한다. 내 돈만 바꿔 달라고 했는데... 졸지에 은행강도로 신고가 되었다. 경찰이 떼 지어 몰려와서 은행 밖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TV가 그 광경을 비추길래 보니 심각하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 한 명의 얼굴이 낯익다. 도로변에서 시비를 걸면서 죽이겠다고 소리치던 바로 그 백인 남성이다.
벼랑도 이런 벼랑 끝이 없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걸칠 자리라곤 한 움큼도 안될 만큼 힘든 상황 아닌가.
<벼랑 끝에 서서>는 우리나라 제목이고, 원제목은 <Straw>다. 붙잡을 거라곤 지푸라기 한 올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을 표현하려는 의도겠다. 참 독특한 영화를 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가슴치고 환장할 일이 짧은 시간에 촘촘히 펼쳐진다. 아픈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의 심정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이토록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일 수 없다.
모든 이가 주인공 저나이어에게 등 돌려 있는 데다 은행강도로 몰려서 경찰의 총구까지 쏠려있으니 자칫하면 죽음을 면하기 힘든 상황이다. 은행지점장 니콜과 형사 레이몬드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 애쓰는 바람에 조금 숨통이 트일 구석이 엿보인다. 그런데 딸이 폭탄 모양으로 만든 과학 시간 숙제가 실물로 오인되고 있고, 어느 순간 FBI까지 투입된다. 그 팀장을 맡은 친구는 오로지 상황을 빨리 종료시킬 생각만 하고 있다. 폭탄과 총을 든 은행강도를 무력으로 제압 즉 사살할 생각뿐인 것 같다. 한마디로 죽느냐 사느냐다. 살아도 감방 갈 건 틀림없는 현실이다. 이렇든 저렇든 아픈 딸아이는 어떡하지, 그것이 저나이어 최고이자 유일한 고민이다.
이렇게 가파른 벼랑 끝에 주인공을 세워두고는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는 게 이 영화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범죄 상황이나 스릴러 요소만 생각하면 볼만하다. 하지만 참 많은 문제가 얽혀 있는 상황이어서 단순한 은행강도 사건으로 보고 넘기기 힘들다. 개인과 엮인 사회의 구석구석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따지자면 범죄가 맞지만 얼마나 가슴 칠 상황이 많은지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그래서 어떻게 끝낼지가 궁금했다.
마지막에 받아 든 결과는 참 아쉬웠다. 그놈의 반전은 도대체 무얼 하자고 가져온 건지부터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개인과 사회가 얽힌 문제를 제시한 영화라면 좀 더 거기에 적합한 마무리가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사회적 문제 고발에 방점을 찍을 건지 아니면 그런 속에서라도 살아있는 휴머니즘에 방점을 찍을 건지 정도라도 분명히 했더라면 하는. 글쎄... 어떤 임팩트를 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정에 비해서 결과는 애매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만한 원인에 의해 벌어지게 된 복잡한 상황에서 고민한 결과가 보이지 않았다고 할까. 사회적 문제를 들추어내며 긴장감까지 갖춘 드라마로 흥미롭게 진행되었는데, 마지막에 내보인 건 고민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냥 반전이었다.
정신이 나간 탓에 벌어진 개인의 일탈이었나? 애매하게 엮인 탓에 벌어진 사회의 부조리였나? 복잡하게 얽힌 탓에 벌어진 인지의 부조화였나? 절박한 상황이라 빨려 들어가고 말았던 입구였지만 그 어려움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출구를 선택할지가 주인공의 고민이자 관객의 기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애초에 당신이 들어갈 입구가 아니었던 걸로 결말을 내버렸다.
참으로 고약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