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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콘클라베인가?

영화단상 / 콘클라베 (Conclave, 2024)

by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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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Conclave, 2024)


언젠가부터는 보려는 영화의 정보를 애써 알아보지는 않고 영화를 보러 가게 되었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면서, 짧은 시간에 수많은 영화 중에 가능한 알아보고 선택하려고 애써봤자 기대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는 걸 느끼면서부터 그런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2025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작 중에 어떤 영화인지 알고 싶어 질 만큼 궁금한 영화가 보였다. 포스터와 거기에 실린 배우의 복장을 보니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 영화의 제목은 <콘클라베>였다.


콘클라베. 새 교황을 뽑기 위한 전 세계 추기경들의 모임이란 사전적 의미도 있지만, 어원은 Cum Clavis라는 라틴어로, “열쇠로 걸어 잠근 방”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왔다갔다하며 이것저것 다 보면서 딴생각하지 말고, 그 속에 갇혀서 제대로 된 교황을 뽑는 데에만 신경 쓰라는 재촉 같아 보인다. 콘클라베 기간을 두고 하루 이틀 사흘 날짜를 붙여서 그날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며 긴장을 이어가는 방식은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했다. 새 교황 뽑는 일과 관련하여 누군가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상황이 아님에도 하루하루를 조바심치듯 지켜보게 만드는 내러티브의 짜임새 덕분이었다. 교황 선출에 대한 추기경들의 미묘한 심리를 침묵 속에 지켜보는 정도로 예상했던 <콘클라베>를 범죄 영화 보듯 긴장해서 지켜보게 만들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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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를 본 카톨릭계의 반응은 어땠을까? 픽션이긴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흔들릴 수밖에 없는 권력과 탐욕에 관한 얘기를 거기다 갖다 붙였으니 말이다. 추기경이란 높은 자리까지 오른 카톨릭 신부들이 교황이라는 자리를 눈앞에 두고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진 영화다. 처음에는 대의를 위해 몸 바칠 각오로 똘똘 뭉친 것처럼 혹은 자리에는 전혀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굴던 추기경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세속적 언사, 과거의 흑역사, 교황 자리를 노려서 획책했던 일로 대부분 교황 후보에서 밀려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영화 개봉 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정말로 콘클라베에 참석했던 유흥식 추기경이, “영화 <콘클라베>에서는 교황 선출 과정이 대단한 투쟁처럼 묘사되고 정치적 야합이 이뤄지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형제적이고 친교적이고 아름다웠다... 콘클라베에 참가한 한국 성직자로서 이를 솔직하게 증언할 수 있다.”며 언급한 걸 보면 신경이 쓰이긴 쓰였나 보다. 확증편향이란 전문용어가 알려질 정도로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는 최근의 추세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화 만드는 동안 <대부>를 여러 번 봤다고 밝혔으니, 권력에 대한 음모와 탐욕 그리고 그에 따른 고민을 기본으로 두고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콘클라베>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인 추기경은 두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 다 처음에는 전혀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콘클라베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은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랄프 파인즈)이고, 한 사람은 죽은 교황이 생전에 의중 결정 추기경으로 임명한 인물이라면서 조커처럼 등장한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카를로스 디에스)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고개가 끄덕여지는 장면을 꼽으라면, 이 두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로렌스 추기경은 콘클라베가 시작되는 첫날, 베니테스 추기경은 마지막 날인 셋째 날에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콘클라베가 시작되는 날, 한 유력 후보로부터 무엇인가를 확신한 데서 비롯되는 오만이 느껴지자, 형식적 강론을 멈추면서까지 로렌스 추기경이 애써 밝힌 소신은 이런 것이었다.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화합과 관용의 적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조차 마지막까지 확신하지 못하셨다며, 십자가에서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라던 부르짖음을 그 예로 들었다. 믿음이 의심과 함께 있기에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될 수 있지, 확신이 있고 믿음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니 믿음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의심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를 범하면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교황을 선택하자고 한다.


콘클라베 셋째 날, 이슬람 세력의 폭탄 테러를 지적하며 종교 전쟁이 필요하니 저 짐승들과 싸울 전쟁을 이끌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한 추기경의 주장이 있자, 베니테스 추기경이 밝힌 소신은 또 이런 것이었다.


전쟁을 얘기하던데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근무 지역 카불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크리스천과 무슬림들의 시신을 보았으니까. 우리가 싸울 대상은 망상에 빠진 이들이 아니고 우리 개개인의 마음이다. 증오에 굴복하여 편을 갈라서는 안 되며, 모든 이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과거의 전통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일 미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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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모든 일에는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다. 하지만 그런 찬성과 반대가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확신과 증오에 찬 목소리로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편은 가르려 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 선택지가 될 수도 있고. <콘클라베>에서 보았던 모습의 얘기다. 현재 세상의 모습과 확연히 겹쳐 보이지 않는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한 끝에 의견도 개진하고 결정 또한 내려야 할 텐데 말이다. 이 영화에서 그걸 실천에 옮기려 노력하는 로렌스 추기경과 베니테스 추기경의 모습은 우리 세상이 나아갈 길을 보는 듯했다.


<콘클라베>를 다 보고 나서 들었던 단순 명료한 느낌은, 결국은 해낼 수 있는 사람이 해내기에 세상이 굴러가는구나, 였다. 세상에는 영웅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것처럼 명성이나 전설을 낳는 화려한 역할도 있지만, 드러나지는 않아도 영웅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사람 역시 있다는 게 새삼 느껴져서다. 무슨 깜냥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위치에 오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데에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는 있다. 갖추어진 능력을 어디에 쓰느냐의 문제니까. <콘클라베>의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마음만 먹었으면 교황으로 선출될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상황을 놓고 고민한 끝에 맡은 역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균형 잡힌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은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선출된 새 교황의 드러내지 못할 구석까지 안고 가야 했기에 더욱더 그래야 했다. 교황이 되는 것보다 어려우면서도 손에 쥐는 건 아무것도 없는 역할을 해낸 것이다.


콘클라베가 끝나고 새 교황도 선출된 다음 날, 빛이 들어오는 창을 열고 내다보니 수녀 세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온다.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웃으며 지나간다. 그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로렌스 추기경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멋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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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는 말

먼 곳에서 수녀 세 사람의 모습을 잡은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수녀 세 사람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보는 순간 마지막 장면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콘클라베 자체가 가부장제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마지막 장면은 미래를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이사벨로 롯셀리니가 연기한 아녜스 수녀도 그런 상징성을 내포한 역할이었다. 수녀의 일을 추기경에게 맡기기 싫어하는 면도 보였고, 마지막에는 마음먹고 가차 없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교황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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