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 쥬라기 월드 : 새로운 시작 (2025)
<쥬라기 공원>에서 <쥬라기 월드>로 영토를 확장해서 나아갔으니, 다시 돌아온다면 <쥬라기 스페이스>나 <쥬라기 유니버스> 정도의 사이즈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영토는 더 이상 넓히고 싶지 않았는지 큰 틀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시작 (Rebirth)”이라는 부제만 갈아 붙이고 돌아왔다. 생생하게 움직이는 공룡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반가우나 다시 한번 세 편의 시리즈로 갈 작정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텐데. 과연 이번에는 어떤 세계관을 보일지 궁금했다.
스필버그 감독이 야심 차게 만들었다는 말에 잔뜩 기대하고 <쥬라기 공원 (1993)>을 본 지 삼십여 년이 흘렀다. 거대한 몸을 서서히 드러내며 처음으로 등장한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모습에 입 벌리고 본 지 벌써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던가. 첫 편에 이어서 나온 <잃어버린 세계>까지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공룡영화를 보면서는, 생생하게 실감 나는 공룡의 모습에만 더 이상 환호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쥬라기 월드’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관심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이란 부제까지 붙이고 수년 만에 등장하는 쥬라기표 공룡영화라고 하니 은근히 궁금해진 것은 사실이다.
<쥬라기 월드 :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간단한 느낌은 이랬다.
전체적으로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면은 부족하지만, 생생하게 실감 나는 모습의 공룡과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소동은 스릴이 가미된 재미가 느껴진다.
새로운 '쥬라기 월드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상영이 시작되자마자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쉽게도 기대에는 못 미친다는. 그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감상해 본 결과, 돈 많이 들여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블록버스터의 기본 역할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이나 그 속에서 움직이는 공룡들의 모습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것저것 비교해 봐도 구성이 비슷한 면이 있었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야 말았다. 그 영화는 다름 아닌 스필버그 감독의 출세작 <죠스 (Jaws, 1974)>였다.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고대 해양 파충류 모사사우루스부터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보트를 타고 가면서부터 우리 편 세 사람이 벌이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지금도 여름만 되면 보고 또 보는 영화 <죠스>가 생각나더란 얘기다. 우리 편 세 사람이란 조라(스칼릿 조핸슨), 던컨(마허샬라 알리), 헨리(조나단 베일리)를 말한 것인데, 그 셋이 <죠스>에서 백상아리를 잡으러 떠났던 마틴(로이 샤이더), 퀸트(로버트 쇼), 맷(리처드 드레이퍼스)이란 세 사람과 묘하게 닮은 분위기가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특수부대 요원인 조라와 경찰서장 마틴, 선장 역할의 던컨과 퀸트, 과학자 역할의 헨리와 맷으로 비교하면 기본적으로 비슷한 구석은 분명히 있다. 캐릭터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역할이다 보니 분위기적으로 우선 그런 느낌이 오더란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구성이 닮았다는 생각이 더해진 것은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이 무사 귀환하는 장면에서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한 인간이 당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되는 점도 그렇고, 자연(백상아리, 공룡)의 위험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던 인간이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서 당해가는 점도 그렇고, 그런 위험이 존재하는 곳(백상아리나 공룡이 사는 곳)을 애써 찾아간 점도 그렇다.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자꾸 그런 생각이 더해진다. 관객의 비판적 시선에서 더더욱 그런 점이 느껴지는 게 미안하게도 재미있었다. <쥬라기 월드 : 새로운 시작>의 관람평을 보니 주로 각본에 대한 지적이 많았는데, 특히 조라와 던컨의 휴머니즘적 판단이나 행동에 대한 지적이 눈에 띄었다. 돈 때문에 용병이 된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교훈과 윤리를 앞세우는 장면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신파적 냄새마저 난다는 지적이었다. 그런 지적 역시 <죠스>를 떠올려지게 했노라고 고백한다.
왜 그랬는지 나름의 핑계를 대기 위해서 <죠스>에서 주요 인물들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선장 퀸트는 그야말로 돈 주면 상어 잡아주겠다는 상어 사냥꾼으로 보였지만, 알고 보니 2차 대전 참전 시에 수백 명의 전우들을 상어에게 잃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온 인물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상어 사냥이란 그 복수로 볼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한 캐릭터다. 맷 후퍼는 순수한 과학자로서 상어를 연구하는 해양과학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전문 분야라는 이유로 목숨을 건 여정에 동행한 데다, 백상아리를 제압할 다른 방법이 없자 철창을 이용해 백상아리에게 다가갈 최후의 전사로 나서기까지 한다. 작은 어촌 경찰서장 마틴은 그야말로 FM 공무원의 전형이었다. 엉터리 정치인들 때문에 위험을 알면서도 해수욕장을 개장했다가 마을 사람들이 상어에 습격당하자, 그 책임감에 못 이겨서 죽음을 불사한 항해에 돌입한 것이다. 한마디로 다들 한 성격 하면서도 교훈, 윤리 그리고 신파에 어울릴만한 감성도 가진 캐릭터들이었다는 것이다.
억지 같은 추리를 해보자면 이렇다. ‘쥬라기 월드 시리즈’를 새로 시작하면서 갖추고자 한 것은 레트로 감성일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쥬라기 공원’의 창업자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성공시켰던 ‘상어의 추억'을 불러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시대의 변환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관객들의 감성을 끄집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죠스>를 떠올리는 감상에 젖다 보니, 그와 동시에 따라 나온 교훈도 있었다. 자연에 대한 오만은 그릇되었다는 당연한 말이 그것이다. 상어가 먹이를 찾는 곳을 굳이 해수욕장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다. 바다는 상어가 사는 곳이지 인간이 사는 곳은 아님에도 억지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두뇌가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간으로서는 자연으로부터 봉변을 당한 셈이고.
<쥬라기 월드 : 새로운 시작>의 초반부에 의미심장한 대사가 있었다. 그 대사를 그대로 기억하진 못하지만, 대략의 내용은 기억한다. 인간이 똑똑해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걸로 착각하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공룡은 인간에 비해 지능이 낮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살았던 기간은 1억 수천만 년에 이를 정도다. 지금까지 인간이란 종이 살아온 세월은 수십만 년에 불과한데 말이다. 과연 인간이 공룡만큼의 세월을 살아낼 수 있을까, 라는 내용의 대화였다. 과연 인간들은 자신들이 멸종된다는 생각을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환경 운운하며 힘들어하고 있는 것만 보면, 공룡만큼 살아남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인간의 오만으로 보인다면 너무 겸손한 것인가.
새롭게 시작한 ‘쥬라기 월드’의 영토는 공룡의 것이었다. 인간이 그 속에 잠입해서 그들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거기 사는 공룡에게 따귀를 된통 맞고 나온 셈이다. 그걸 근근이 마치는 데에 따른 희생을 생각하자면. 그들의 혈액 샘플로 좀 더 오래 사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만큼 오래도록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자면 갈 길이 너무나 멀고도 멀다. 지구의 나이를 24시간으로 볼 때, 공룡은 오전에 1시간 이상을 살다 간 셈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인류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은 1초에 불과하다고 하니까.
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대로 공룡을 살려놓았다고 한들 그 공룡에서 무언가를 탐한다 한들 모든 게 다 인간의 오만이다. 예전의 메가 히트작 <죠스>의 기운이 느껴진 것도 같은 맥락이어서 일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이 자연에 있다는 건 누구라도 안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굳이 이런 모양의 영화에 어울리느냐는 지적을 들으면서까지 윤리나 교훈이나 감상에 젖은 신파 냄새를 피우는 것은 어리석으면서도 똑똑하다고 들떠있는 인간들의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싣고 싶은 측면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걸 좀 더 앞뒤가 들어맞게 실었다면 짠한 감성을 불러낼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