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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Jun 07. 2024

죽음의 달빛에 꿋꿋이 저항한
작은 꽃 몰리

영화단상 / 플라워 킬링 문 (2023)


플라워 킬링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 2023)


마틴 스콜세시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 (2023, Killers of The Flower Moon)이 개봉되었다. <아이리시맨 (2019)> 이후니까 4년 만이다. 1942년생으로 이미 여든을 넘겼는데도 작품을 쉴 틈 없이 만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도 무려 2억 달러짜리 영화라고 하니까 놀랍지 않은가. 살아있는 최고의 감독이라는 찬사를 수시로 듣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엄청난 제작비까지 감당해주는 제작사가 있다니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블 영화를 테마파크에 비유했다가 논란을 겪기도 했을 정도로 전통적인 영화의 정신을 지켜가는 스콜세시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도 대작을 만들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이 가능한 것은 그의 능력과 경력에서 비롯된 신뢰감 덕분일 것이다. 


스콜세시 감독은 이번 영화를 “사랑, 권력, 배신 그리고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리고 또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이 너무 ‘백인 남성 이야기’에만 집착해 온 점을 깨달았고 그런 점이 염려된다고도 했다. 그런 언급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이번 영화의 인상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면으로 보인다. 인종주의의 최일선에 서 있는 백인 우월주의 그 중에서도 남성에게 중심을 두었다는 것은 백인 남성을 홍보한 셈이 되었다는 고백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백인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 인디언을 선택하였고, 그중에서도 남성 아닌 여성이 중심에 서 있는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랑, 권력 그리고 배신이라는 테마가 배치되어 있고. 


<플라워 킬링 문>은 미국의 흑역사 한 줄기에 대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았던 주민들(오세이지 인디언)이 어떤 질곡의 세월을 보냈는지 그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오세이지 인디언들을 쫓아 보낸 땅이 돈뭉치(석유)를 뿜어내는 바람에 생긴 아이러니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상황을 지켜보면 시작점은 코미디 그 자체다. 인디언들은 온갖 호사를 누리는데 백인들은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믿고 살았던 무리와 인간의 손으로 부를 창출한 무리의 성정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오세이지 인디언으로부터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꽃이 활짝 피는 시기에 뜨는 보름달(Flower Moon)을 잔혹함의 상징으로 본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이란 5월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하는데, 커다란 식물의 번식이 빠르면 작은 식물이 도태되어 버리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인이 인디언을 핍박하는 정도가 극에 달한 상황을 빗댈 수 있는 말이다. 극악한 백인 남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오클라호마 목장주 윌리엄 헤일과 전쟁에서 돌아온 그의 조카 어니스트 버크하트로 대변되는데, 그 역할은 스콜세시 감독의 페르소나로 알려진 로버트 드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맡아서 자신들의 이름만큼 해내고 있다. 순수하면서도 강단 있는 오세이지 인디언 여성 몰리의 역할은 릴리 글래드스톤이 맡고 있다. 그녀는 인디언 혈통을 가진 배우로 스콜세시 감독이 오세이지 공동체의 자문을 얻어서 기용했다고 하는 만큼 그런 역사 속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저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버트 드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칭찬해야 본전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연기자들이다. 그것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릴리 글래드스톤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연기한 몰리는 표정이나 몸짓을 잘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조신한 성품을 가진 캐릭터다. 가족을 차례차례 잃어가는 와중에도 의심 가는 남편의 사랑은 믿고 싶은, 종족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데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문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냉정한 마음과 차분한 표정을 잃지 않는 캐릭터다. 약하면서도 순수하고 꿋꿋한 몰리를 지켜보고 있는 내내 긴장되고, 답답하고, 슬프고, 안타까은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플라워 킬링 문>에 몰리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벌어진 광폭(狂暴)한 사건에만 눈이 갔을 것이다. 몰리란 인물이 있었기에 스콜세시 감독이 이 영화의 설명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울림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틴 스콜세시 감독이 스스로 짚었던 염려 - 항상 백인 남성이 주체인 영화를 찍었던 사실 - 를 해소해 보려는 느낌이 오는 작품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미쳐 날뛰는 백인 남성들이 있었고, 그들의 악랄함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지만 그 만행은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세상을 조용히 바라볼 뿐인 인디언 여성 한 사람이 등장하여 그들이 숨기려 애썼던 탐욕과 배신의 장면을 펼쳐서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악의 무리들이 짓밟히고 부서지는 통쾌한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마틴 스콜세시 감독이 마블 필름과 다르게 정의하고 싶었던 시네마가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시원한 결말이나 명쾌한 결론을 보여주기는 힘든 서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런 것 말이다.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도 인상적이었다. 


보태고 싶은 말 

영화가 3시간 30분 정도라면 너무 길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틴 스콜세시 감독은, “TV 앞에서는 5시간도 앉아 있잖아요? 영화도 좀 존중해 주세요.”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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