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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고민하는 슈퍼맨

영화단상 / 슈퍼맨 (2025)

by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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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Superman, 2025)


“슈퍼맨”이란 이름으로 수없는 만화와 영화를 보아왔다. 그런데 또 새로운 슈퍼맨 영화를 만든다기에 도대체 어떤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지부터 궁금했다.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조렇게 별의별 걸 다 만들어왔지만 아쉽게도 갈수록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나 싶어서. 관객들은 취향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고 평가하고 있겠지만 요즘은 그놈의 평점이니 관람평이니 온통 실시간으로 올라오니 그것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보니 까칠한 눈길 속에서의 성공이란 더욱더 머리 아프달까 머나먼 길이 되어버린 느낌이 적지 않다. 문득 들여다본 기사에서 최근의 슈퍼맨에게 뭐라고 하는 걸 봐버렸기 때문에 삐져나온 말이다. 거기서 얘기하기로는, 2025년에 나타난 슈퍼맨이 미국에서는 쌩쌩 날아다녔다는데 그 외의 지역에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하여튼 오랫동안 빼먹지 않고 봐온 슈퍼맨이 돌아왔다고 하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에 처음 들어온 슈퍼맨다운 슈퍼맨은 1978년에 날아온 슈퍼맨이다. 이 슈퍼맨이 최초의 슈퍼맨은 아니지만 슈퍼맨같이 움직인 최초의 슈퍼맨이었기에. 존 윌리엄스의 음악도 웅장하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바람에 영화도 보고 OST 음반까지 사서 들었으니 그 정도면 제법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의 얘기다. 타이틀롤임에도 불구하고 신인이라서 이름을 첫머리에 올리지 못했던 크리스토퍼 리브는 딱 보는 순간 정말 슈퍼맨 같았고, 정말 클라크 켄트 같았다. 정말로 저런 존재가 있다면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화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겠지만, 그런 인상을 확 풍겨오기는 힘들 텐데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슈퍼맨이 크리스토퍼 리브를 지나, 브랜든 라우스 - <슈퍼맨 리턴즈>의 슈퍼맨 –를 지나, 헨리 카빌 - <맨 오브 스틸>부터 <저스티스 리그>까지의 슈퍼맨 - 까지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빨리 때로는 힘들게 지나가는 모습을 다 보았다. 그때마다 슈퍼맨도 클라크 켄트도 각각의 얼굴도 성격도 세계관도 달랐다. 크리스토퍼 리브와 브랜든 라우스는 만화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낙관형 슈퍼맨으로 보인 데 반해, 헨리 카빌은 외모부터 행동까지 진지함이 주를 이루는 고뇌형 슈퍼맨이었다. 문제는 슈퍼맨이 고뇌에 빠지면서 그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이 가볍지 않아서였는지 계속 지켜볼 마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12년이 지난 후에야 새로운 슈퍼맨이 나타났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슈퍼맨 (2025)>의 슈퍼맨은 분명히 새로운 슈퍼맨이었다. 느낌으로 보자면 헨리 카빌보다는 크리스토퍼 리브에 가까운 슈퍼맨으로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슈퍼맨이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패배했다면서 눈밭에 피를 흘리며 뻗어버린 모습으로 시작하는 슈퍼맨 이야기를 상상하고 싶겠는가. 바로 이런 부분이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고전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생각할 정도라고 하니 엎어지고 터지고 깨지더라도 어떻게든 극복하고 회복하는 새로운 모습에 환호를 보낼 수 있겠지만, 지구의 희망으로 등장하여 악당들을 시원하게 물리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만 보자면 답답해 보이는 면이 다분히 보인다.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달린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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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들려오는 소문보다는 재미있게 <슈퍼맨 (2025)>을 보았다. 흥미로운 구석도 다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번에 등장한 슈퍼맨 캐릭터는 슈퍼히어로의 모습보다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우선 슈퍼맨 역할의 데이비드 코런스웻의 외모부터가 지금까지의 슈퍼맨보다 소박하달까 그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만화같이 혹은 조각같이 뚜렷한 특징을 가진 지난 슈퍼맨보다는 무난한 인상의 슈퍼맨이란 느낌이었다. 그런 이미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기분은 슈퍼맨을 키운 지구의 부모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글렌 포드, 에바 마리 세인트, 다이앤 레인, 케빈 코스트너 같은 배우들이 슈퍼맨이자 클라크 켄트의 지구에서의 부모 역할을 맡았었다. 모두가 젊은 시절에 잘 나갔던 유명 배우들이다. 그랬던 만큼 인물도 느낌도 훈훈한 사람들이다. 이번에 부모 역할을 맡은 배우들을 보면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톱스타 출신 배우가 아님은 물론 그들처럼 세련되어 보이는 외모도 아닌 데에다 등장하는 시간도 짧다. 다정하고 좋은 부모일 거라는 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전해 주지만. 이런 설정부터가 슈퍼맨이 얼마나 평범한 인간으로 자랐을지를 확실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걸로 생각된다. 지구에서도 시골의 소박한 부모 밑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왔기에 인간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설정이다. 순박하고 서민적인 부모와 이웃을 보며 자라온 슈퍼맨이기에 누구보다도 그런 평범한 인간들의 기대와 희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설정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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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슈퍼맨에 실망한 관객이 내놓을만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들었다. 천하의 슈퍼맨이어야 하는데 얻어터지는 장면도 많고, 다른 이에게 맡기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활약 또한 기대보다 저조했다는. 그렇게 보자면 분명히 그렇다. 슈퍼맨으로서의 느낌도 여유도 기대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순박한 서민형 슈퍼맨을 내세운 게 약점으로 느껴질 수 있는 면에 대한 지적이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이번 슈퍼맨이 드러낼 원초적 결함 때문에 귀족적이고 특별하고 강함보다는 서민적이고 평범하고 부드러움을 내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슈퍼맨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만들어진 결함이었지만.


칼-엘은 크립톤이라는 외계의 별에서 왔기에 지구에서는 슈퍼맨이 되었다. 원래 부모의 고귀한 신분에다 넘사벽의 힘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지구에서야 신의 위치에 올라선 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크립톤의 부모는 지구인의 안녕은 안중에도 없이 아들 칼-엘(슈퍼맨)의 성공만을 바랄 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태생부터가 대단했던 슈퍼맨의 정체성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러자 죽도록 슈퍼맨을 미워하는 천재 지구인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의 주장이 먹혀들기 시작한다. 슈퍼맨은 어디다 쓸지도 모를 엄청난 힘을 가진 위험한 외계인일 뿐이라는 논리다. 그때 슈퍼맨이 꺼낸 카드가 바로 협업 즉 단합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자신을 철저히 연구하여 첫 패배를 안긴 렉스 루터 때문에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에서 꺼낸 카드였다. 홀로 외로이가 아니라 메타휴먼들, 슈퍼 독(Super dog)의 도움을 청하고 보통 인간들의 도움을 얻어 같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특별나고 걸출한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에서 성장한 만큼 이 땅의 위기를 이겨내야만 하는 인간의 입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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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스스로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지를 홍보하는 장면이 있다. 슈퍼맨이 부모의 모습을 보며 안정감을 찾는다는 설정으로 처음과 끝부분에 배치된 장면이다. 영화가 시작한 무렵 슈퍼맨이 보았던 건 크립톤에서 떠날 때 칼-엘에게 메시지를 실어 보낸 실제 부모의 동영상이었는데, 끝날 무렵에 슈퍼맨이 보는 건 클라크 켄트로 성장할 때의 모습을 지구의 부모가 찍은 동영상이었다. 크립톤은 태어난 별이었을 뿐 자신이 살아온 곳은 지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곳 출생이어서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란 얘기다. 대단한 부모로부터의 특별한 출생보다는 평범한 부모로부터의 소박한 사랑에 무게를 둔 것이다. 특별한 힘을 가진 유별난 캐릭터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시켜 평범함을 이해하는 인간다운 캐릭터로 발전시키고 싶은 바람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역할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슈퍼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엄청나게 강한 빌런을 특출한 힘으로 상대하는 담대함만이 아니라 누구인지도 모를 보통 시민이나 길가를 어슬렁거리는 다람쥐라도 곁에 사는 이웃이라면 지켜야 한다는 순박함을 슈퍼맨에게 안겨주고자 기획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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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고자 하는 슈퍼맨의 모습에는 진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인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깨닫는 일 그리고 태어난 곳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곳을 생각해야 하는 일이 슈퍼맨에게만 필요하겠는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착각의 세계에 빠진 삶이 있는 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나 사이버 공간이란 게 생겨서 그것을 심화시키는 작용까지 하고 있으니 그런 면으로의 심각함은 더해졌다. 평범함을 벗어나 특별나게 주목받기 위한 노력이 넘쳐나다 보니 ‘관종’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나지 않았는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좋은 말씀이야 넘쳐나지만 자신을 정돈할 의지가 없는 이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일 뿐이다. 그럼에도 슈퍼맨은 엄청난 힘을 자신에게 안겨준 실제 부모의 판단까지 뛰어넘으며 자신의 위치는 인간의 위가 아니라 곁이라는 정체성을 세운다. 자신의 출신과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하고, 엄청나게 두들겨 맞으면서까지 평범과의 소통을 이루어냈다. 저스티스 갱과 슈퍼 독 크립토의 매력을 내세워 자신만이 주목받는 역할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면서 관종에서도 탈피한 셈이다. 인간이고자 하는 만큼 먼저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느라 동분서주하는 슈퍼맨의 모습을 본 것이다.


2025년의 슈퍼맨이 싸운 상대는 단순한 빌런이 아니었다.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콤플렉스(렉스 루터), 우월함을 내세워 부와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크립톤의 부모), 이기기 위해서만 달리는 맹목적 자신(울트라맨)이었다. 슈퍼맨이 그들과 싸워서 얻고자 한 것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순박한 인간들의 믿음과 사랑이었다. 비범과 자만과 유별이 넘쳐나다 보니 대우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평범과 겸손과 일상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슈퍼맨이 몸소 나선 셈이다. 절대적인 물리적 위력을 과시하며 위용을 떨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슈퍼맨이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영화 <슈퍼맨 (2025)>은 포용과 화합의 시대에 어울리는 슈퍼맨으로의 여정을 위한 이정표를 세운 셈이다. 물리력뿐만이 아니라 정신력까지 갖추어야 진정한 슈퍼맨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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