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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미국병원 4

보험회사가 왕?

by 새 날

요즘 한국에서도 의사 대란으로 많은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도 의사가 매우 부족하여 보통 주치의를 만나려면 전화로 예약하고 이삼 주일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주치의들 중 더 이상 신환을 받지 않는 의사도 많다. 아무도 그 의사들에게 하루 진료하는 환자 수를 늘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정신과 의사를 보려면 의뢰서 없이 신청할 수 있지만 한 달 이상 기다린다. 응급실에서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면 내가 일하던 병원의 경우 화상 원격 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료 시 선택할 수 있는 의사는 내가 가입한 보험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내가 지난 이십 년간 가입했던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종류의 보험은 전문의 진료 (심장내과, 신경과, 호흡기내과, 정형외과, 일반외과 기타 등등) 시 주치의의 의뢰를 거쳐 보험심사를 하고 보험회사가 승인하면 해당 과목 진료 의사 사무실에서 내게 전화하여 진료 날짜를 잡는데 이 과정은 보통 한 달 이상 걸린다. PPO(Preferred Provider Organization) 종류의 보험을 갖고 있다면 굳이 주치의의 의뢰를 받지 않고 바로 내가 원하는 병원의 원하는 의사에게 진료를 신청할 수 있다. PPO 종류의 보험이 물론 훨씬 비싸다. 65세 이후에 메디케어를 가입하고 부가로 가입하는 PPO보험들은 환자의 나이가 증가함에 따라, 가진 질병에 따라 보험료를 매년 증가시킨다.

미국에는 의료보험 중개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워낙 제도가 복잡하다 보니 새로 의료 보험에 가입할 때 중개인을 만나 상담하는 것은 필수 과정이다. 나는 메디케어에 가입할 때 며칠 동안 You선생 사이트에서 여러 중개인들의 교육을 받으며 어떤 보험에 가입할지 심사숙고했다. 한번 결정하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K 보험에서 제공하는 HMO 보험과 메디케어 약보험, 치과 안과 보험 등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중개인들은 PPO 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하고 있었으나 200 달러에서 시작한 보험료가 해마다 올라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 지인의 남편은 올해 85세가 되었는데 한 달 PPO 보험료가 500 달러가 넘었다. 나는 HMO보험은 사회보장국에서 세금 형태로 공제하는 비용 외에 보험회사에 내는 비용은 없으니, PPO에 가입할 때 내야 하는 보험료와 나의 의료비 차액만큼 다달이 저축을 해서 언젠가 심각하게 의료비를 낼 때가 되면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장애가 없는 혹은 만성 질병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애 마지막 6-12개월에 대부분의 의료비를 소비한다. 보험료를 200 달러에서 시작해서 500 달러까지 다달이 저축한다면 10-15년 후엔 수만 달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험회사의 배를 불리지 않겠다는 이 도박은 내가 얼마나 빨리 죽느냐에 따라 현명한 선택이 될 수도 혹은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빨리 죽는다면 아직 저축한 연금이 남아 있을 것이고 오래 살게 된다면 저축액이 늘어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의 대부분의 보험회사는 응급이 아니라면 기본방사선 촬영과 물리치료 과정 없이 MRI 촬영을 승인하지 않는다. 보험회사의 사전 승인 절차는 한국에서 온 나의 눈에는 불필요하게 치료를 지연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값비싼 신규 약물의 경우에도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항암제의 경우 환자와 보험회사 사이에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얼마 전 미국의 가장 큰 의료보험회사의 CEO가 총격을 당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이 그 범인에게 공감했던 건 다 이유가 있다. 심지어 환자가 응급실에 왔을 때 응급실 직원은 그 환자의 보험회사에 연락해야 하고, 응급실 의사는 필요한 일차 처치 후 그 환자의 보험회사가 지정한 병원으로 이송이 가능하면 이송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새크라멘토에는 네 개의 대형 병원 시스템이 있다. 여기서 대형병원은 입원실 250-300 병상 규모이니 한국의 동네 병원 수준일 것이다. 아무튼 각각의 병원 조직들은 자체적인 보험을 가지고 운영하는 경우가 흔하다. 내가 C보험을 가지고 있을 때는 C 병원에서 수술이나 응급 치료등을 해야 했는데 이제 K보험으로 바꾸었으니 앞으로 병원 신세를 질 일이 생기면 K 병원으로 가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큰 보험회사인 United Health Care는 전국 규모의 광범위한 조직을 가지고 많은 병원과 계약하고 있으므로 이런 회사의 보험에 가입하면 미국 내에서 여행 시에 어디를 가더라도 In Network Care를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일했던 직장에서는 B와 C, 두 개 의료보험만 가입할 수 있었고 UHC 보험과 현재 내가 가입한 K 보험은 내가 일하던 직장 의료보험에서 가입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노동조합들이 회사와의 근로 조건 체결 시 의료보험회사 선택의 확대 등을 놓고 싸우는 건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보험회사에 따라서 피임을 보험에 포함하지 않거나 성전환과 관련된 치료를 배제하는 등 차이가 있고 포함하는 지역도 한정한다. 캘리포니아에서만 영업하는 의료보험에 가입했다면 캘리포니아에서만 커버하고 미시간 주에서 진료 시 무보험자가 될 수 있다. 각 주 정부에서 저소득자에게 지원해 주는 무료 의료 보험의 경우에도 타 주에 가서 진료받을 경우 무보험자가 된다.

몇 년 전 무릎이 아팠을 때 나는 2주 걸려 주치의를 만나 진료를 하고 방사선 촬영을 하고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두세 달 후 통증은 계속되어 다시 주치의를 찾았고 이번엔 물리치료처방을 받았다. 보험회사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고 물리치료사도 늘 부족하므로 물리치료사와 약속을 잡기까지는 다시 한 달이 걸렸다. 두 달의 물리치료가 끝나도 내 무릎 통증은 여전했다. 다시 위의 절차를 거쳐 주치의를 만나 나는 MRI촬영을 요구했다. 보험회사에서 승인을 받고 MRI를 촬영하고 무릎연골파열이 발견되어 정형외과 의사에게 의뢰가 보내졌다. 다시 몇 달을 기다려 무릎 수술을 하기까지는 처음 주치의 진료를 본 날부터 거의 일 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진통소염제를 콩알 먹듯 먹어가며 12시간씩 뛰어다니며 일했다. 여기엔 물론 내 참을성이 크게 한 몫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느 날 내가 병원에서 일할 때 나와 같은 무릎 연골 파열 진단으로 응급실에서 입원한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무릎을 구부리거나 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나는 나도 저럴 수 있었는데 하고 때늦은 후회를 했다.

내 참을성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내가 둘째를 분만하러 병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가는 길에 양수가 터졌었다. 내가 간신히 벽을 붙잡고 걷다 쉬다 하며 산과 병동 산모 진료실 진찰대에 누웠을 때 한 산모가 소리소리 지르며 휠체어에 실려 들어왔다. 의사는 조용히 다리 벌리고 누워있는 나를 힐끗 보더니 나보고 내려오라 하고 그 산모 먼저 눕혀 먼저 진찰했다. 그 산모가 분만실로 간 후 의사는 내게 물었다.

"진통이 얼마 간격으로 와요?"

"30초 미만인 거 같아요."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다시 눕게 하고 보자마자 간호사에게 소리쳤다.

"응급, 응급!!!! 아기 머리 crowning 됐어요, 빨리 분만실로!!!!"

아기가 나오기 직전까지 신음소리 하나 없이 참기만 한 내 죄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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