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보장- 사기꾼의 단골 멘트?
나는 지독한 음치에 박자 치이다. 박자를 맞추는 게 음을 맞추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 건 거실 한편에 뚜껑이 닫힌 채 서 있는 피아노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는 건 어릴 때 로망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인지 3학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벽너머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꽂혀 어둡도록 골목에 서서 피아노 소리를 들던 날이 있었다. 그날 이후 피아노는 나의 로망이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 엄마는 내게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 시절엔 돈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는데 엄마는 내가 피아노를 배울 깜이 안된다는 걸 진즉 간파하셨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소원이라고 애원하여 피아노를 딱 한 달만 배우도록 허락받았던 적이 있긴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 동안 꿈에 그리던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는데 한 달만 배운다는 이상한 학생에게 피아노 선생님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한 달 내내 한국의 피아노 바이블, 바이엘만 띵똥 띵똥 쳤다. 한 달 동안의 바이엘연습은 아직 내가 깜이 안된다는 걸 알려 주기엔 너무 부족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키보드를 샀다. 아이들 장난감 같은 키보드를 띵똥 거려 보는 걸로는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았다. 미국에 온 지 몇 년 지나 내가 여기서 계속 살 것에 확신이 생겼을 때 나는 나에게 묵직한 진짜 피아노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신문 광고지를 뒤져 이 동네에서 피아노 파는 곳을 찾아냈다. 피아노 가게는 가게라기 보단 창고 같아서 왠지 꺼림칙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성인 나의 용감무쌍이 나를 가게 안으로 떠밀었다. 엄청 친절한 가게 주인이 반갑게 나를 맞아 이것저것 보여 주고 피아노를 직접 치며 소리도 들려주고 마지막엔 망설이는 나에게 마법의 말을 휘둘렀다.
"저희는 피아노를 사간 분이 환불하기를 원하면 언제든지 샀던 가격 그대로 환불해 줍니다. 이건 평생 보장합니다. 피아노는 시간이 지난다고 낡아지는 게 아니고 소리도 더 좋아지고 오히려 값이 더 올라가니까요."
내가 피아노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망설이던 참에 '환불 평생보장'이라는 말은 나로 하여금 뜨거운 떡을 꿀꺽 삼키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이 묵직한 녀석은 내 집 거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피아노 선생님께 레슨을 받기도 하고 연습도 열심히 했지만 내가 꿈에 그리는 월광소나타는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수십, 수백 번 반복해도 한 페이지짜리 악보를 외우지 못해 매번 악보를 보고 따라가야 하는데 노안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시력이 점점 흐릿해져 가, 해마다 안경을 바꿔도 오후만 되면 모든 것이 이중으로 보이기 시작해서 피아노 연습은 쉬는 날 오전에만 할 수 있었다. 한편 깨알 같은 음표들을 보며 건반의 제 자리를 손가락으로 찾아가는 연주는 세지 못하는 박자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설상가상 손가락 관절염이 생겨 한순간 손가락을 잘못 누르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뒤따랐다. 누가 은퇴 후 젊을 때 못하던 취미 생활을 하라 한다면 절대 그 말을 믿지 마시라. 젊을 때 배우지 못한 피아노를 이제 와서 배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게 싫어, 나는 그저 난 피아노를 배울 재능이 없다고, 악보도 못 외우고, 박자도 못 센다고 하겠다.
그런데 피아노는 이제 거실 한쪽을 채우는 짐이 되어 버렸지만 환불받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내가 피아노를 산 몇 달 후 그 피아노 가게는 파산 신고를 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로망은 현실 앞에서 짐으로 전락했다.
두 번째의 평생보장이라는 말은 이 집 창문을 바꿨을 때 들었다. 1972년도에 설치된 창문은 홑겹이고 알루미늄 창틀은 누수는 없었으나 외풍을 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름철엔 에어컨을 최대로 가동해도 원하는 온도로 낮출 수 없었고 겨울엔 추위에 떨며 지내도 어마어마한 가스 값이 나왔다. 창문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건 앞 집에서 창문 교체 시공을 하는 걸 보고 더 자극이 되었다. 앞집 할머니, 어마를 찾아가 어느 회사와 했는지 얼마에 했는지, 몇 개 회사로부터 견적을 받았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도 어마가 계약했던 회사와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마는 나를 소개한 덕으로 창문 회사로부터 50달러를 받았다. 창문회사 계약서에는 '고의적이지 않은 어떤 이유로 창문이 깨지더라도 내가 이 집주인일 동안에는 평생 무료로 교체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창문을 교체한 몇 달 후 그 창문 회사는 파산 신고를 하고 사라졌다.
다행히 피아노도 창문도 산지 10년도 넘었지만 아무 문제는 없다. 피아노 회사나 창문 회사로부터 바가지를 썼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평생 보장이란 약속이 망설이는 구매자를 끌어드리는 강력한 미끼였던 건 확실하다. 그들의 파산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계획된 선택이라 믿는 건 너무 음모론적인 시각인지 모르나 거부하기 어려운 달콤한 언어의 헛헛함에 대해 생각나 써 본다. 그 장삿속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그런 말을 믿었던 나의 수진무구했던 젊은 날(?)을 탓해야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