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차별?
아이들이 미국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업에 참관했다. 둘째 아이가 처음 다녔던 버클리의 초등학교 선생님은 학부모의 참관을 환영했고 교실에는 늘 보조교사와 어머니 한 분이 선생님을 돕고 있었다. 아침에는 아이들이 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아 촛불을 켜고 에릭 클랩튼의 노래를 틀어 놓고 명상을 하던 것도 신선했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수학시간이었다. 수학시간에 아이들은 모두 수학책을 펼치고 각자의 진도대로 문제풀이를 하다가 막히면 손을 들었고 선생님은 손 든 아이 옆에 가서 개별 지도를 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수학을 개별지도로만 가르치고 전체 강의는 하지 않는지 물었는데, 아이들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이들의 속도대로 지도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나의 국민학교 첫날을 떠올렸었다. 이젠 60여 년 전 일이지만 나는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 입학을 한 후 몇 달을 학교를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필요했던 예방주사를 맞은 후 후유증을 심하게 앓느라 아마 몇 달은 늦게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에 갔던 첫날이 아주 더웠던 오후반이었던 걸 기억한다. 그때는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첫 수업이 산수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은 칠판에 산수 문제들을 써 놓고 내가 앉아 있던 줄을 가리키며 " 이 줄에 앉은 아이들 모두 나와서 하나씩 풀어" 하셨고 나는 학교 첫날, 첫 시간에 전체 학급 앞에서 처음 보는 산수 문제를 앞에 놓고 손에 쥔 분필만 쳐다보고 있었다.
둘째 아이가 3학년이 되자 그 때부터 아이들은 영어와 수학시간에 반을 옮겨 다녔다. 알고 보니 아이들의 진도에 따라 영어시간에는 영어 읽기와 쓰기 능력에 따라 아이들을 A, B, C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고 수학 시간엔 다시 수학 능력에 따라 A, B, C 반으로 옮겨 가 수업을 했다. 수학 시간에 여전히 각자의 진도 대로 공부하는 건 버클리 학교에서 했던 것과 동일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 아무도 아이들이 반을 옮겨 다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어떤 아이는 영어를 잘하고 어떤 아이는 수학을 잘하고 각자 잘하는 게 다르고 책을 읽는 속도도 다르니 각자가 배우기 좋은 속도로 배우는 것이다. 내가 어느 아이에게 교실을 옮겨 다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애는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짚어야 했고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그 애를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그 애가 대답했다. "각자 잘하는 게 다르니까요" 이렇게 하다 보니 수학 진도가 빠른 아이들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수업을 들으러 가는 아이도 있었다. 둘째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학교에서 두 명의 학생은 수학시간이 되면 고교 수준의 수학 수업을 하러 근처 고등학교로 갔고, 그 애들은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근처의 대학에서 수학을 배우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였을 것이지만 요점은 개별 학생의 개별 특성에 맞출 수 있는 한 맞춘 교육을 한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에서 대수학 시간을 가면 대부분은 9학년이지만 그중 몇은 10학년, 심지어 11학년 학생도 있을 수 있다. 고교 졸업 자격시험은 최소한의 영어 수학 학습 수준을 요구하는데 그걸 실패하는 학생들도 많다 보니 11 학년이 되어도 9학년생들과 함께 수학을 배워야 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미술과 음악의 경우, 초등학교 학생 전체가 강당에 모여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렸다. 미술과 음악 선생님의 숫자가 부족하여 한 선생님이 교육구 내의 몇 학교를 돌아다니며 전 학년이 모여 배우는 것이었다. 내가 참관했던 미술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강당에 모인 아이들에게 반 고흐에 대해 이야기해 준 후 몇 장의 반 고흐 그림들을 보여주고 난 후 아이들에게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게 했다.
만약 아이가 악기 연주를 배우고 싶다면 0교시, 혹은 방과 후에 하는 학교 연주단에 참여할 수 있다. 이때 악기는 각자 준비해야 했는데 비싼 악기는 악기 가게에서 빌릴 수 있다. 물론 사교육도 많고 음악, 미술, 스포츠는 대체로 아이들의 방과 후 사교육에서 각자의 재능과 선호도에 따라 또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배운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의 대도시에는 어딜 가나 한국식의 학원들이 많이 있다.
학교에서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과 그 직후 일주일은 카운슬러 선생님들이 가장 바쁜 때이다. 학생들을 한 명씩 면접하고 학생들의 요구와 능력에 따라 수업을 바꿔주는 시기이다. 예를 들면 둘째 아이가 11학년 때 수학의 미적분 시간을 빼고 대신 두 개의 미술 시간을 들을 수 있게 요청해서 미적분 대신 컴퓨터 그래픽 수업을 들었다. 아이는 친구들이 모두 다 가는 미적분 수업을 가려고 했지만 내가 말렸다. 미술 대학으로 진로를 정한 학생이 미적분을 배워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싶었다. 그때 어떤 어머니가 카운슬러와 다투는 걸 보았다. 9학년 학생인데 아이는 음악가가 될 예정이니 미술 대신 음악을 하게 해달라고 했고 카운슬러는 9학년은 음악 수업을 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음악 수업은 그 학생이 꼭 들어야 하는 영어 시간과 동일한 시간대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 학생이 결국 어느 수업을 들었는지는 모른다. 학교도 예산이 부족하고 수업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한 과목만 바꾸는 건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아이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한국의 학교에서 어떻게 개별 학생들의 능력이 다름을 인정하고 교육 과정에 반영하는지 모르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1978년 우리 학교에는 우반이 한 반 있었다. 모든 과목에 우수한 학생들이 그 반에 속했고 한국에서 우수대학이라 여겨지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학급이었다. 그 시절 한 과목만 우수한 아이는 전혀 우수하지 못했다. 혹은 한 과목이라도 우수하지 않으면 전혀 우수하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고교 성적이 매우 우수해야 한다고 들었다. 미국의 미술 대학에서는 입학 전형 시 학생이 제출한 포트폴리오 이외에 SAT 점수가 우수할 걸 요구하거나 고교 성적이 우수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바마 시절, 그가 한국의 교육제도의 우수성을 칭찬하고 미국 교육의 질이 형편없다고 비판하며 교육 개혁을 주장했을 때 나는 '저 사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완벽한 제도는 없고 아무리 개혁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제도이지만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평균 성적으로 사람 자체를 차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너무 큰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