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
나의 미국으로 가는 첫 발걸음은 대한간호협회지가 이끌었다. 2001년 말, 나의 모든 상황이 혼돈에 빠져 있었을 때, 어느 날 보수교육을 받으러 갔던 곳에서 간협신문을 읽게 되었다. 그 당시 간협신문은 일반간호사들은 따로 구독료를 내고 구독하지 않으면 손에 넣기 어려웠는데 아마 그때 교육이 간호협회 건물에서 열렸던 건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강의실 입구에 귀하디 귀한 간협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신문에서 미국 간호사 채용 알선 회사의 광고를 보았고 이거야 하는 생각이 번개치듯 내 머리를 쳤다. 강의가 끝난 후 곧장 그 회사로 전화를 하고 찾아가 사장님을 만났다. 세련되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신 사장님은 아주 친절하게 모든 과정을 설명해 주셨고 그날부터 나는 미국이민을 위한 일들을 하나씩 시작했다.
NCLX 시험공부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다. 간호협회신문에는 NCLX 시험을 위한 학원 광고가 여럿 있었고 나는 그중 교통이 가장 편리한 곳을 찾아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면 으스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건 사실이었다. 전체 이민 과정 중 NCLX 시험이 가장 쉬웠으니까. NCLX 학원을 몇 달 다닌 후 -3개월 과정이었는지 6개월 과정이었는지 이제 기억이 흐릿하다- 여러 서류를 챙기고 시험 등록을 하고 괌에 시험을 보러 갔었다.
NCLX 시험은 당시엔 미국 영토 안에서만 칠 수 있었다. 괌에는 NCLX 시험 치러 오는 간호사들을 위한 여행 프로그램이 있었다. 관광 안내원 일도 겸하시는 교포 분이 공항에서 간호사들을 모아 식당, 호텔, 시험장 등등 안내해 주셔서 편히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시험을 쳐야 할 날 새벽에 엄청난 태풍이 불어 섬 전체에 전기가 끊어졌다. 관광 안내원은 그 아침에 모든 도로가 통행 금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에 오셔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전기도 수도도 일반 가정은 다 끊겼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복구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NCLX center는 문을 닫았고 시험도 못 치고 호텔 방에서 엄청난 태풍 한 가운데에서만 볼 수 있는 대단한 광경들을 목격하며 사흘을 지냈다. 그 방은 한쪽 벽이 완전히 통유리로 되어 있었고 베란다도 있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앉아 있기 딱 좋았다. 난생처음 비가 수평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아직 뿌리 뽑히지 않은 야자수들도 완전히 수평으로 누웠다가 다시 설 수 있다는 것도 목격했다. 물론 견디지 못하고 뿌리 뽑힌 나무들도 있었다. 호텔에는 자가발전 시설이 있어 전기도 수도도 끊기지 않았다. 나는 창 밖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다가 지루해지면 반지의 제왕을 시청했는데 그때가 자막 없이 미국영화를 처음 본 것 일거다. 솔직히 10%도 알아듣지 못했었다. 나중엔 집중 안 되는 시험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3일 일정이 5일로 늘어난 후 간신히 다시 비행기가 떠서 돌아올 수 있었다. NCLX center에서 다시 시험 일정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 그쪽에서 보낸 이메일이 해독이 안되었고 , 'You are going to be told that 어쩌고' 했던 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후배에게 전화를 하고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렵던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 다시 시험일을 잡고 다시 두 번째로 괌에 갔다. 이번에는 날씨가 화창했고 나의 시험은 90문제 후 끝났다.
NCLX 시험은 그 당시에 문제 은행 방식이면서 동시에 난이도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기초 지식을 평가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 문제들을 정답을 맞히면 복합적인 지식을 평가하고 상황 판단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로 넘어간다. 문제들은 레벨 1,2,3으로 난이도가 분류되어 있어, 레벨 1의 문제를 모두 맞히면 레벨 2로 옮겨가고 틀리면 다시 레벨 1의 문제로 돌아가서 풀어야 했다. 오답과 정답이 적당히 섞이면 풀어야 하는 문제 수가 최대 250 문제까지 늘어날 수도 있었다. 최소한의 문제 수가 90 문제였는데 나는 90 문제 후 시험이 끝났다. 마지막 10 문제가 기초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불합격이 확실하고 상황 판단을 묻는 문제라면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시험 친 후 느낀 결론은 학원에서 제공해 준 기출문제풀이가 도움이 되기도 하였으나 나의 이십여 년의 임상 경험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시험 친 한국 간호사들 중 한 분이 250 문제를 푸느라, 같은 차편으로 돌아가는 일행이 그분이 끝내고 나올 때까지 몇 시간 기다린 일이 있었다. 그분은 임상 경력 없이 대학원 졸업하고 어느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시는 분이었는데 NCLX 시험은 단순히 교과서적 지식만을 묻지 않으므로 그분은 아마도 기본 지식 관련 문제는 맞히지만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대표적 사례가 아니었을까 싶다. 몇 년 후 미국 NCLX 당국에서 한국의 학원들이 기출문제를 수집하여 교육한다는 걸 알고 문제은행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뉴스를 들었으니 정말 한국의 학원강사님들은 대단하신 분들이었다. 두 번째 괌에 갔을 때는 시험 친 다음 날 바다에 나가 스노클링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NCLX는 뉴욕 주의 간호사 면허 시험인데 만약 내가 타주로 가기를 원한다면 다시 시험보지 않고 각 주의 간호협회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면 그 주에서 일할 수 있는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증명서와 교과 과정을 영문으로 제출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 고등학교 졸업증명서와 고등학교 교과 과정까지 영문으로 발급받아 제출해야 했던 것은 뜻밖이었다. 캘리포니아 간호사 면허는 그런 서류들을 제출한 후 별문제 없이 받을 수 있었다.
괌으로의 여행은 난생처음 영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환경 속에 들어간 것이었다. 호텔 직원들과의 대화가 100% 불가능했을 때 나는 괌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고 착각했었다는 걸 고백한다. NCLX 시험을 치고 돌아온 후에는 영어 회화 공부에 집중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에서의 영어 회화 학원 수업들과 영어 회화 테이프 듣기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자막 없이 좋은 영화를 되풀이로 듣는 게 아마 훨씬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간호사 채용 알선 회사에서 요구했던 서류 중에 토플 시험이 있어 토플 시험도 치렀다. 그때 사장님은 토플 점수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게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점수는 미국 이민국에서 요구하는 점수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사장님은 영어 시험은 미국 가서 일하다 보면 다 통과하게 된다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대학을 입학한 후엔 내 인생의 시험은 이제 다 쳤다고 생각했었다. 수간호사 시험을 쳤을 때도 난 그게 내가 치는 인생 마지막 시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새로운 삶의 여정을 가기 위해선 가장 어려운 시험, 미국에서 간호사로 취업 이민을 허락받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영어 시험이 아직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