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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혹은 짐 5

창고가 필요하세요?

by 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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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40여 년간 참 자주 이사를 다녔었다. 지금 세어 보니 13번 정도 된다. 그러다 보니 이사 갈 때마다 버리는 물건들이 많았고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는 늘 쓰레기가 되어 사라졌다. 당장 필요한 몇 가지만 챙겨도 이삿짐은 너무 많았고 새로운 공간은 늘 좁았다.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읽으며 그리운 날들을 회상하는 따위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었다. 미국에서 난생처음 '내 집'을 샀을 때 나는 내 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를 성인이 된 후 발견하는 기쁨을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의 미술 작품, 노트들, 학교 성적표들은 나의 염원을 담 듯 상자에 담겨 쌓여 있다. 특히 미술을 전공한 둘째의 작품들은 여러 상자가 되어 주차장 여기저기에 쌓여 있다. 은퇴를 한 후에 몇 번이나 나는 버릴 것들은 버려야 한다며 안 쓰는 걸 찾아서 버리려 했지만 겨우 한번. 고장 난 혹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와 전화기들 온갖 케이블 선들을 모아 낡은 TV와 함께 전기제품 버리는 곳에 찾아가 버렸을 뿐 버릴 것을 구분해 낼 능력의 부족과 버릴 수 있는 힘이 부족함을 절감했을 뿐이다. 한국에서 해외 이사 서비스로 가져 왔던, 아이들이 읽었던 만화책들, 세계여행이야기며 과학 만화, 유아용 그림 동화 들은 아이가 셋이나 있던 교회전도사님께 드렸다. 책장 하나 분량은 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한 때 나의 피아노 선생님이셨다.


미국의 단독 주택에는 집마다 주차장이 있는데 여기가 보통 일차적으로 창고 역할을 하게 된다. 내 집 주차장에는 당장 쓰지 않은 물건들,예를 들면, 언제 또 필요할지 모르는 새것이나 진배없는 여분의 신발들, 여행용 가방이라든가 크리스마스 장식들, 스키 장비, 쓰고 난 페인트통들, 정원 손질에 필요한 기구나 비료들, 혹시 반납할 경우에 대비해서 버리지 않고 남겨둔 포장 상자들이 삼면 벽을 가득 채우고 차를 세울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원래는 차 두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인데 이제 한대만 간신히 들어간다. 심지어 내 아이들의 친구들의 물건도 여기 두고 가기를 청하면 거절할 수 없어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 주인이 언제 올지 오기는 올지 알 수 없는 채로. 집집마다 주차장이 있지만 차를 주차장에 넣지 않고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주차한 차들이 많은데 그럴 경우 그 집 주차장은 이미 상자들로 가득 차서 차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 온 후 놀랐던 것 중의 하나는 누구나 빌릴 수 있는 창고가 엄청 많다는 것이다. 도시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심지에도 빨간색이나 짙은 주황색으로 문들을 페인트칠 한 창고들이 끝없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업종이고 풍경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집도 한국의 집보다 몇 배는 큰 집들에서 살면서 또 무슨 창고가 저리 많이 필요한지, 아무튼 사용자가 있으니 그 많은 창고들이 존재할 터이다. TV 쇼 중에는 '창고전쟁'(Storage Wars)이라는 프로그램까지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창고 주인이 일정 기간 이상 창고 사용료를 내지 않은 창고의 물건들을 경매에 넘긴다. 경매 참여자는 무엇이 창고 속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채 경매에 참가하고 낙찰된 후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여 돈 될만한 물건들을 팔아 이익을 챙긴다. 창고 주인은 경매로 못 받은 창고 사용료를 보전하고 청소비를 아낄 수 있다. 그 쇼의 재미는 창고 속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물건들 혹은 보물들을 발견하는 데 있다. 물론 운이 나쁘면 경매 가격만큼 손해 보고 끝날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사람들이 그리 많은 창고들을 이용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아이들은 내 집을 자기들의 창고로 이용한다.


둘 다 대도시에 살며 작은 아파트를 렌트하고 있다 보니 공간이 넉넉지 않음은 십분 이해한다. 처음 이사를 나갈 때도 당장 필요한 것들만 챙겨 갔을 뿐 아니라 가끔 집에 올 때면 버리기는 아깝고 당장 쓰지 않게 된 물건들을 가지고 와 슬그머니 자기들 방에 놔두고 간다. 옷장에도 당장 입지 않는 옷들이 쌓여있고 책상 서랍이나 책장에도, 물론 주차장에도 나와 아이들 물건이 쌓여 있다. 신발장에도 나와 아이들이 더 이상 신지 않는, 버리기는 아쉬운 신발들이 한가득이다. 나의 언니는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 근처에 살고 계신데, 언니네 집은 삼층 단독주택이다. 겉에서 보면 2층이지만 지하실이 있어 실은 3층 공간인데 그 집에도 지하실 대부분은 상자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집을 떠난 후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언니 말씀이 "이 중에 내건 한 개도 없어" 하셨다. 두 조카들이 남겨 놓고 간 물건들이다. 아마 돌아가신 형부의 물건들도 모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앞 집에 어마가 살 때 그 집에 가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집은 침실이 4 개인데 두 부부가 사용하는 방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침실엔 모두 상자들로 가득했다. 어마 부부가 돌아가신 후 그들의 자녀는 그 집을 팔았고, 나는 그 많은 상자들은 어찌 되었을까 궁금했다.


집을 정리하는 건 너무 어렵다. 분류도 안되고 판단도 잘 안된다. 이 걸 버려야 할지 나중에 아쉬워하지 않을지 정말 내가 이걸 다시 필요로 하는 날이 있긴 할지, 나도 남들처럼 garage sale을 해야 할지. 어쩌면 정리라는 건, 물건을 버리는 건 욕심을 버리는 일이고 정을 떼는 일인 듯하다. 마당에서 잡초를 뽑아내며 아쉬워하지 않듯, 쓰지 않는 물건을 하루에 하나라도 뽑아내겠다고 결심한 지 오래 건 만 쌓인 물건은 감당할 수 없이 너무 많다. 얼마 전엔 가구를 옮기느라 십 년 넘은 세금 보고 서류들을 파쇄하느라 몇 시간 고생했다. 게으름이라는 걸 부정할 순 없지만 이것들은 나의 역사인데 하는 아쉬움과 짐일 뿐이라는 이성 사이에서 오늘도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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