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혼돈의 수렁
나의 영어 수업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의 첫 영어 선생님은 은퇴를 앞둔 윗머리가 시원하신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다. 그분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분의 얼굴은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그분이 맨 처음 내 이름을 알파벳으로 써 주셨는데 난 아무 의심 없이 그 알파벳을 그 후에도 영자 이름을 써야 할 때면 그대로 사용했고 여권을 신청할 때도 그대로 적어 넣었다. 한국인들이 흔히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쓸 때 각각의 한글 글자마다 대문자로 쓰는 실수를 하는데 나 역시 그리 하였다. 세 글자인 한국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대문자로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두 개의 first name을 쓰는 실수를 저질렀고 다행히 미국 정부는 내가 쓴 그대로 내 이름을 인정해 주었다. 그 후 미국에서 은행이나 기타 많은 곳에서 자기들이 이해하는 대로 내 이름을 짜깁기해서 여러 종류의 first name이 만들어졌다. 이건 컴퓨터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는데 종이에 쓸 때는 두 개의 first name을 쓸 수 있었지만 어떤 프로그램들은 두 개의 first name을 허용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가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마다 조금씩 내 이름의 표기가 다르다. 어떤 회사는 나의 세 번째 음절의 이름을 middle name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어떤 회사는 셋째 음절의 대문자를 소문자로 고쳐 first name을 하나로 길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의 무지가 초래한 혼돈이다. 한국 정부는 내가 빈칸으로 남겨둔 middle name에 발급 당시 가족이었던 전남편의 성을 넣어 주는 불필요한 친절도 베풀어서 수년 후 여권 갱신 시 삭제하였다.
2000년대 초 한국의 영어학원에서는 다들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이 관행이었다. 나는 내 이름을 Ally라고 만들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했던 미국 드라마의 여주인공의 드라마 속 이름이었다. 'Ally의 사랑 만들기' 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방영되었었고 여주인공 Ally McBeal 역은 여배우 Calista Flockhart 가 맡았는데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나는 이 이름을 미국에 온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는데 문제는 내가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듣는 미국인들은 'What?' 하고 되묻기 일쑤였다. 나의 Ally는 그들에게 Ellie나 Aly로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지금도 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나는 이름을 법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로 직장에 취업한 이후에도 몇 년간 Ally를 계속 사용했다. 친절한 인사과 직원이 직원 명찰도 그 이름으로 만들어주어 한동안 나 자신은 발음하지 못하는 Ally로 불렸다. 그러나 몇 년 후 내가 일하던 병원이 의무기록을 전산 체제로 바꾸면서 전산상 내 이름은 유두리를 허용하지 않는 컴퓨터에 의해 법적인 이름, 원래의 한국 이름이 되었고 동료 직원들의 혼돈을 줄이려면 나는 법원에 가서 Ally로 이름을 바꾸거나 내 법적 이름으로 명찰을 바꾸어야 했고 그렇게 나의 Ally 시대는 끝이 났다.
나의 본명은 한국인에게도 그리 듣기 좋거나 부르기 쉬운 이름은 아니다. 어릴 적 나는 이런 이름을 지어 주어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게 한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본 적도 없는, 혹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종갓집 큰할아버지를 미워도 했다. 그러다 고교시절 엄마는 점쟁이에게서 '유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왔다. '응답하라 1988'의 성덕선이 입시를 위해 성수연이라고 부르려다 실패했듯이 새로 지어온 예쁜 이름은 나와 엄마 이외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 그대로 지워졌고 나는 여전히 '똥례'로 불렸다. 고교시절 아주 착했던 한 친구만 나를 가만가만 '동례'라고 불러 주었다.
미국 직장에서 다시 본명을 사용하도록 강요한 인정머리 없는 컴퓨터 시스템에 나는 가운데 한 글자만 가지고 나를 부르라고 타협했고 사람들은 내 영문자대로 'Dock'이라 부르게 되었다. Dock은 미국에서 의사를 줄여 부르는 'Doc'과 발음이 같다. 누군가 나를 보며 'How are you, Dock?' 하면 내 주변에 있던 의사 누군가가 대답하기 일쑤였다. 혹은 정말로 그 의사에게 한 인사인지 누가 알겠는가. 환자들도 내가 가서 ' I'm your nurse, Dock.' 하고 인사를 하면 ' Nurse Doc'하며 웃음부터 터뜨렸다. 가끔 환자 중에 그게 나의 진짜 이름인지 아님 내가 의사로 불리고 싶어 지어낸 이름인지 물어오는 경우도 있어, 시간이 허락하면 내 이름의 유래와 한자말의 말 뜻까지 설명해 주었고 그들은 흥미 있는 척 들어주었다.
우리 동네에선 first name으로 부르는 게 예의인 것 같다. 학교 선생님을 제외하고 Mr. Mrs. 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처음 보는 나이 드신 환자를 그냥 first name으로 부르는 게 감정적으로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처음엔 환자들을 Mr. Mrs. 를 붙여 호명했는데, 많은 경우 그들은 대답하며 first name으로 불리길 원했다. 한 할머니는 first name을 강조하며 그게 '나'라고 강조하셨던 적도 있어 차츰 나도 이름만 부르려 노력했다. 물론 여자 환자의 경우 Mrs. 여야 할지, Miss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럴 경우 Miss 뒤에 last name 대신 first name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한국인의 DNA를 100% 가진 나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려서야 내면의 감정적 거부감 없이 first name만으로 낯선 나이 많은 분들을 부를 수 있었다. 가끔 병원장이 병동 순찰을 오면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반갑게 'Hi, Mike' 하고 인사했는데 그것도 내겐 낯선 풍경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본인의 이름보다 사회적 위치 내지는 관계성으로만 사람을 부르는데 익숙한 나에게는 이름 하나 그들이 부르는 대로 부르는 게 그리 어려웠다.
아이들의 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나를 아이들의 성을 따서 'Mrs. Lee'라고 부르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처음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할 때 미국인들은 자기 이름부터 말하고 자기 아이가 누군지 말하는데 한국인인 나는 선생님들에게 내 이름은 생략하고 '누구 엄마'라고만 내 소개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의 고모나 작은 엄마의 이름을 잘 몰랐다. 한 번도 그들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누구 에미' 여서 어쩌다 그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문서를 발견할 때 비로소 그들의 이름을 알았다. 몇십 년 가까이 지낸 작은 엄마의 이름이 이영희였다는 걸 부고장을 받아 들고 처음 아는 식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알려줘도 거부하고 나를 'Mrs. Lee'로 부른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우리 아이들의 등하교를 도와주셨던 집사님 댁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목사였다. 그는 내가 거부하든, 이혼을 했든 관계없이 한번 결혼했었기 때문에 영원히 'Mrs. Lee'가 되어야 한다는 듯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아마 한국 이름 뒤에 붙일 호칭이 마땅치 않아 그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중에 생각했다. 다행히 그 한 번의 식사 이후에 다시 그를 만날 일은 없었다.
미국 사회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는 그들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짓는다. 내 친구는 첫 외손녀가 태어났을 때 아이 아빠 쪽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둘째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넣어주지 않았다고 무척 서운해했다. 어쩌면 가족 내의 평화를 위해 여러개의 middle name 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가끔 환자 집에 전화하여 'Is Mary available?' 하면 'Which Mary?' 하는 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할머니, 딸, 손녀가 모두 Mary 이면서 자녀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다 보니 성만 다른 여러 Mary가 한 가족에 있을 수 있다. 조상의 이름을 자녀에게 쓰는 것이 금지되는 우리 문화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결혼하면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게 관습인 미국에서 가족 관계의 변화로 인해 법적으로 last name을 바꾸는 건 간단한데 first name을 바꾸는 건 좀 더 어렵다고 한다. 범죄와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일간지에 일주일 이상 이름 변경을 게재하라고 법원에서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누군가 성을 바꾼다고 하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궁금하다. 내 남동생은 이름을 족보에 올리다가 어르신들 중 동명이 있어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그게 60여 년 전 일인데 우리 고모는 동생을 아직도 바꾸기 전 이름으로 부르신다. 고모님은 이제 96세이시다. 이 분께는 새 이름이 60년 넘는 세월 동안 입력되지 않았거나 그저 첫 이름을 더 좋아하셨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두 개의 이름이 병존해서 안될 일이 무엇인가. 나는 세례 받을 때 새 이름을 주듯이 성인이 되면 스스로 이름을 바꿀 기회를 모두에게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조선시대 내내 이건 양반 남자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일인데 나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는 과정은 자신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좋은 관습이라 생각한다. 브런치 작가로 내 이름을 '새날'로 지었을 때에는 내가 당시 즐겨 듣던 시인과 촌장의 노래 제목에서 편리하게 따다 붙였다. 만약 내가 좀 더 사려 깊고 창의적인 사람이었다면 뭔가 다른 멋진 이름을 찾아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내가 사랑하는 노래 '새 날'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