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먹고살기
미국에 와서 우리가 먹었던 첫 식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마중 나와 주셨던 간호사 채용회사의 사장님께서 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제팬타워에 있던 한국음식점에 가서 늦은 점심 겸 저녁을 사주셨다. 우리는 당시 3인분만 시켜서 나와 둘째 아이는 떡국 1인분으로 나눠먹었다. 그래도 미국 식당의 1인분은 너무 양이 많아서 다 먹을 수 없었다. 지금은 어딜 가든 거침없이 1인분을 싹싹 비우는 나를 생각하면 이런 걸 적응했다고 해야 할지. 당시 사장님은 1인분을 사가면 세끼는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아무튼 이 식사 이후 나와 아이들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온전히 나에게 달린 여러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에는 조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때 먹었던 조식은 나중에 내가 여러 호텔들을 경험하며 비교해 보아도 훌륭한 것으로 여러 종류의 달걀과 각종 페이스트리며 지은이가 좋아하던 소시지와 주스 커피 등등으로 5일 동안 질리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호텔 편의점에서 샀던 샌드위치나 호텔 근처에서 샀던 피자, 치킨 등을 점심이나 저녁식사로 먹으며 5일간의 호텔 생활을 했다. 이때 처음 사 먹은 M회사의 피자는 내 입맛엔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피자가 고급음식이었고 토핑도 훌륭했고 모차렐라 치즈도 듬뿍 들어간 고소한 음식이었는데 M 피자는 맛없는 빵 위에 끔찍하게 짠 토마토소스와 냄새나는 토핑들이 얹힌 상태여서 나는 너무 실망했지만 새로운 건 뭐든 좋아하는 지은이는 맛있게 남김없이 먹어주었다. -초고를 읽은 지은이가 자기는 그냥 남은 음식을 먹은 거지 맛있게 먹었던 게 아니라고 항의했음을 밝혀둔다.
버클리에 아파트를 구해 이사한 후 나는 장을 보러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왼쪽으로 갔더라면 곧 발견했을 식품가게들을 못 찾고 오른쪽 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마침내 주유소 편의점을 발견했다. 물건들의 포장이 낯설어 이게 무엇인지 알려면 한참 동안 서서 암호 같은 영어들을 읽어야 했다. 하염없이 서 있던 내가 이상했는지 가게 주인이 내게 와서 무얼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소금을 찾는다고 했는데 나의 'salt'는 그의 귀에 'salt'로 입력되지 못했고 몇 번의 반복 끝에 'S, A, L, T'라고 한 후에야 그는 내게 작은 식탁용 소금병을 찾아 주었다. 내가 그에게 요리용의 큰 소금 봉지를 묻자 그는 grocery store로 가라고 충고했고 어디로 가면 되는지는 가르쳐주지 못했는데 그 근처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엔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아파트 옆 집에 살던 착한 흑인 할머니, 그녀는 내게 자기를 E라고 부르라고 했었는데 , E가 왼쪽으로 가면 식품가게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꼭 한국에서처럼 버클리 동쪽의 좁은 거리엔 작은 상점들이 줄줄이 모여 있었다. 작은 빵가게에서 갓 구운 빵들과 접시만 한 초콜릿쿠키를 팔았고, 치즈와 커피를 팔던 가게에서 난생처음 커피콩과 커피 가는 기계를 샀는데 가게 주인은 친절하게 치즈 종류와 커피 가는 기계 사용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가장 큰 가게였던 채소 가게에서는 엄청 당도 높은 과일과 싱싱한 야채들을 살 수 있었는데 입에 넣으면 그냥 녹아버리는 멜론은 천상의 맛이었다. 늘 붐비는, 줄 서서 번호표 뽑고 필요한 고기를 말하면 준비해 주는 육류가게도 있었다. 육류가게에선 납작하게 눌러주는 닭가슴살이며 각종 스테이크용 고기, 특별한 햄과 베이컨들을 부위별로 팔고 있었는데 부위별 이름이 영어로 뭔지 몰랐던 나는 그냥 손짓으로 이거 혹은 저거 주세요 하곤 했다. 처음 대형 슈퍼에 갔을 땐 물건들을 계산한 후 점원이 내게 빠르게 뭐라 물었는데 그게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Beg your pardon?'을 수 없이 한 후 그는 그냥 포기하고 물건들을 넣어주었는데 그제야 나는 그게 'Paper or plastic?'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엔 이걸 더 이상 묻지 않고 bag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California에서는 plastic bag사용을 규제하기 위한 법이 만들어져 봉지 한 개에 10 센트를 내야 한다. 종이 봉지는 무료다.
아파트에 인터넷이 연결되고 한국 식품점을 찾아낸 후엔 먹고살기가 훨씬 쉬워졌고 한국에서 같이 일했던 후배가 찾아와 나를 데리고 코스트코에 가서 처음으로 코스트코 카드를 만들게 도와준 후엔 값싸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동네 가게들은 품질은 좋았으나 가격은 엄청 비쌌다.
미국의 야채코너엔 내겐 익숙지 않은 많은 야채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어찌 먹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낯선 채소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맛있는 밥상을 준비하는 건 내겐 큰 짐이었다. 그래서 요리책을 사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재료와 양념들이 너무 많아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처럼 요리학원이 있나 찾아보기도 하였으니 여기서 요리를 배우려면 대학에 가서 몇 년간 배우는 과정만 검색이 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여러 종류의 샐러드 소스들을 사서 시도해 보았으나 그다지 입에 맞지 않아 이런저런 샐러드 소스들은 냉장고 속에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도록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 일쑤였다. 빵도 어찌 그리 거칠고 메마른지 한국에서 먹던 살살 녹아드는 부드러운 고소한 빵은 아무 데도 없었다. 요즘엔 한국의 P 제과점이 새크라멘토에 생겨 한국 수준의 흰 빵을 사는 게 쉬워졌다. 고기들은 왜 그리 두껍게만 썰려 있는지 한국식으로 요리하려면 긴 시간 칼질을 해야 불고기건 미역국이건 할 수 있었다. 요즘엔 코스트코에서 갈비찜으로 양념된 고기도 있고 샤부샤부용 얇은 고기에 김치까지 팔고 있으니 이것도 K문화가 만들어낸 변화의 하나다.
미국에 갔던 처음 몇 달간 제대로 외식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주문 시 받게 될 질문이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해도 무슨 빵으로 할지, 무엇 무엇으로 샌드위치 속을 채울지, 고기의 굽기는 어느 정도로 할지, 소스는 뭘로 할지 묻고 대답해야 했으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 모든 선택들이 암호 풀기 수준이었다. 그러다 집에 전기가 끊겨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식당으로 내몰렸던 적이 있었다. 그 아파트엔 전기 코일이 모기향처럼 둘둘 말린 cook top에 요리를 해야 해서 전기가 끊기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었다.
아파트를 계약할 때 아파트 관리회사 직원으로부터 전기 회사에 연락해서 그 집의 전기 서비스를 내 이름으로 바꾸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 전기 회사에 전화를 했으나 그 사람이 내게 사회보장번호를 물었고 사회보장번호가 없던 나에게는 계좌를 열어줄 수 없다며 전기회사 사무실에 가서 먼저 돈을 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전기회사를 찾아가서 돈을 내러 왔다고 했더니 그 직원은 요금 고지서 없이 자기들은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되지 않는 영어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설명했으나 그 직원은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Next' 하고 외쳤다. 지금은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이해하지만 그때는 나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보장번호와 계좌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고 선결제 계좌 시스템도 이해하지 못했으니 당시 나로서는 창구 직원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두어 차례 관리사무소로부터 전기회사에 전화하라는 편지를 받았지만 다시 전화해야 할 공포감에 '난 이미 하라는 대로 다 했어' 하고 묵살했다. 결국 전기회사는 우리 집 전기를 차단했고 나는 관리사무소와 전기회사를 몇 번 더 전화하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때쯤엔 나도 사회보장번호가 있었고 영어에도 쪼끔 익숙해져서 연체된 전기요금과 전기 재 개설 비용을 지불하고 다음날 전기를 다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 당시 내가 전기회사 직원이 하는 말을 좀 더 잘 알아들었더라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미국의 어느 회사 콜센터를 전화하건 최소한 30분 이상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기다린 끝에 사람과 통화하면 내가 한국에서 듣던 테이프나 방송에서 보던 식의 영어를 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매우 악센트 강한 인도식 영어나 알 수 없는 먼 나라 외국인이 말하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나왔다. 심지어 내가 일하던 병원의 전화번호 안내 콜센터도 미국 내가 아니라 인도에서 인도직원이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엔 AI가 전화응대를 하고 있는데 내가 질문에 대답하면 내 발음을 못알아듣는 AI는 'I don't understand you' 만 반복한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걸 외국으로 외주 주었던 나라에서 트럼프는 수입품엔 고율의 관세를 붙이고 앞으로는 뭐든 미국 안에서 생산하겠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힘든 일들을 해 오던 무비자 외국인들은 모두 해외로 추방하고 있으니 어찌 될지...) 당시의 나는 낯선 악센트 강한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해서 (표준어 발음의 영어도 물론 못 알아 들었지만) 나는 열심히 내가 들은 게 맞는지 반복 질문하지만 그쪽도 내 발음을 못 알아들으므로 전화 의사소통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아무튼 이날 저녁 나는 난생처음 야채가게 건너편에 있던 이탈리아 식당을 갔고 메뉴에서 뭔지 알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메뉴, 버섯 치즈 피자를 주문했는데 그건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 식당엔 많은 야외 식탁이 있었고 파라솔 아래 상쾌한 버클리의 공기 속에 아침이면 커피를 앞에 놓고 신문 보는 아저씨들이 모이는 그런 곳이었는데 그날 오후 전기가 없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그곳에서 음식을 샀고 그 후엔 fast food 식당이 아닌 미국 식당에 대해 쪼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