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
2003년 5월 23일, 나는 F1비자, 아이들은 나의 가족 자격으로 F2 비자로 입국하였다. 미국 간호사 채용 회사에서 중개해 준 B어학원에서 F1 비자를 받게 해 주었다. 이 어학원은 하루 6시간 수업 일정이 짜여 있었고 level test에 따라 반이 배정되었다. B 어학원의 선생님들은 매우 훌륭했다. 한국에서도 영어 회화 학원을 몇 달 다녀보았지만 거기서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학생의 출신 국가에 따라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중점을 두고 가르칠지 파악하고 수업 일정을 짰다. 예를 들면 베트남 언어에는 미래와 과거시제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문맥을 통해 그 말이 과거인지 미래인지를 이해하므로 영어를 배울 때 시제에 대해 가장 곤란을 느낀다고 한다. 거의 첫 시간에 나는 will, be going to, shall, would, should, must 등등의 조동사를 배웠고 그 차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B 학원에는 독일, 일본, 태국,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과 섞여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영어 발음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차이를 악센트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이 외국인과 대화할 때 그들이 우리의 영어능력에 대해 판단하는 일차 기준은 얼마나 이 악센트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듯했다. 나는 내 악센트는 별 문제없는 줄 알았고 내가 인식했던 젤 큰 문제는 표준 영어로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캘리포니아에서 어떻게 다양한 악센트를 가진 사람들의 영어를 알아듣느냐였다.
B 학원에 다녔던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 대부분은 20대 후반 혹은 30 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고 이 학원의 학비를 계속 감당할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다수의 간호사들은 곧 근처의 다른 어학원으로 옮겨갔다. 훨씬 값싸고 수업시간은 짧고 교육의 질은 나빴지만 그곳에서도 F1 비자를 받도록 해준다고 하였다. 그들은 어학연수를 '영어를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미국에 들어오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든다. 나는 계속 B 학원에 머물렀고 선생님 중 한 분에게 부탁하여 따로 개인 수업도 받았다. 나는 시험도 시험이지만 일을 하다가 의사소통이 안될 경우 책임질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이제 나와 두 아이의 운명이 나의 영어 능력에 달린 마당에 모든 것을 투자해서 영어능력을 향상해야 했다. 미국 도착 후 1년을 영어 공부하는 기간으로 계획했으나 채용 알선 회사 사장님은 우리가 온 두 달 후부터 채용 면접을 보라고 독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휘력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듣기 능력이 형편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 시절 배운 영어는 문법 중심이었고 독해력 중심의 영어였다. 그때는 듣기를 배우거나 시험 칠 시설도 각 학교에 없었다. 대학 전공 서적 중 많은 과목이 영어 책을 사용했고 병원에서 20여 년간 일 할 때도 영어를 많이 사용했으나 실제 영어 발음과는 딴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일할 때 오히려 이게 내 발음의 발목을 잡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Carotid Artery를 나는 캐로티드아테리라고 또박또박 한글 읽듯 발음하여 듣는 사람들이 'What?' 하게 하곤 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대부분 내가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었지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만약 못 알아들으면 상대방은 다시 묻고 나는 다른 말로 설명해 주면 되는데, 내가 몇 번을 반복해 물어도 계속 내가 못 알아듣는 경우엔 답이 없었다. 일할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건 대개는 외국 출신의 의사로부터 전화 오더를 받는 경우였는데 재빨리 나는 다른 미국인 간호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전화를 넘겼다. 착한 나의 동료간호사들은 이런 경우 내 전화 부탁을 거절하는 이가 없었다. 내가 알아듣기만 하면 내 대답이 엉망의 발음과 단어가 뒤바뀐 순서로 나오더라도 대충 상대는 이해하기 마련이었다.
학원 선생님들은 영어 능력을 빨리 키우려면 영어만 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아이들과 집에서 영어를 사용하라고 권했다. 나는 영어 읽기 능력을 빨리 키워야 하는 큰아이와는 영어 원문의 HARRY POTTER를 하루 한 시간씩 같이 읽었고, 겨우 초등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하다 이민 간 둘째 아이와는 한글로 된 책들, 파브르곤충기나 역사책들을 하루 한 시간 같이 읽었다. 하지만 집에서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이민 2세대인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건 부모들이 자녀와 한국어로 의사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들이 한국어를 잃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다녔던 한국인 교회의 아이들 중에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어서 지은이와 지아의 유창한 한국어를 신기해했다. 내가 만났던 이민 1.5세대의 한국인들은 거의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그 당시 미국에 간 한국 간호사들에게는 빅뉴스가 있었다. 어학연수로 일단 미국에 왔다가 미국 병원으로부터 영주권 스폰서를 받아 취업비자를 받은 후 2년 이내에 영어 시험을 통과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데 , 영어능력 인정 기준이 그전에 인정해 주던 쉬운 방식(이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이 없어지고 토플과 IELTS 두 가지로만 하도록 변경되었던 것이다. 간호사 채용회사 사장님은 재빨리 우리 간호사들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IELTS 학원으로 옮기게 했다. 토플보다 IELTS가 합격점을 받기 쉽다고 했다. 이때가 2003년 11월 경으로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버클리의 B 어학원에서 6개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IELTS어학원에서 두 달을 공부한 후 새크라멘토로 이사했고, 2004년 2월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크라멘토에는 K 어학원 밖에 없었는데 모든 수업은 나의 직장과 같은 시간 대에만 있어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한 나는 갈 수가 없었다. 나는 K학원에서 만난 선생님께 사정을 말하고 개인 수업을 해 달라고 졸랐다. 그분은 곤란해했지만 결국 승낙하여 일주일에 두 번 선생님이 우리 집에 방문하여 한 시간씩 수업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IELTS를 가르쳐 본 적이 없다면서도 IELTS 책도 구하고 내가 시험기준에 가장 미흡한 부분이 뭔지 찾아 그쪽을 키우는 수업을 하려고 노력하셨다. IELTS는 듣기 영역, 독해 영역, 쓰기 영역에서 6.5 이상, 말하기 영역에서 7.0 이상을 획득해야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달 후 내가 시험장에 갔을 때 말하기 시험관은 IELTS 학원에 두 달 다닐 때 가르치신 선생님들 중 한 분이어서 친근한 느낌과 함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말하기 시험 도중 그 전날 개인교습시간에 배운 중복 비유와 반어법이 들어간 표현을 써먹을 수 있던 기회가 있었고 그 걸 내가 말했을 때 시험관 선생님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시험 결과를 받아 들고 모든 영역이 합격점인걸 확인했을 때 나는 마구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젠 미국에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같이 학원을 다녔던 간호사들 중 몇몇은 끝내 영어 시험의 문턱을 넘지 못한 분들도 있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2년 미국에서 살다 보면 영어를 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나처럼 새크라멘토로 온 뒤에도 영어 선생님을 찾아내어 공부하는 간호사는 없었다. 낙방하신 분들 중 일상 회화는 잘하지만 쓰기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는 분이 있었는데 그건 논리적 사고능력이 결여되어 논술 시험을 실패하는 경우와 같았다. 말하기 역시 단답형의 일상 영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복잡한 구조의 영어 문장으로 적절한 수준의 지적 표현을 써서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간호사 중 한 분은 남편과 두 아이 시어머니까지 이주하여 미국에서 집까지 샀지만 결국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온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분은 몇 년 후 한국에서 IELTS 시험을 보고( 미국의 시험 기준 변경 후 한국엔 IELTS 학원이 생겼다) 영주권을 받아 미국에 돌아왔다. 어떤 분은 혼자서만 미국에 와서 영주권 획득 후 남편과 자녀의 영주권을 신청해서 몇 년 후 미국으로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분은 결국 시험에 실패한 후 당시 전도사였던 남편이 선교 이민을 신청하는 형태로 미국에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내가 채용되었던 병원은 한꺼번에 20여 명의 한국 간호사를 채용했고 우리의 언어 적응 시기를 고려하여 최대 6 개월까지 수습기간으로 해 주었다. 우리 중 반 정도가 6개월 후에 남아있었다. 해고된 대부분은 영어능력 미숙을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