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공립학교 7

미술교육

by 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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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둘째 아이, 지아는 미술 천재다. 이리 시작하면 혹자는 자기 아이가 천재라고 믿는 부모가 열에 아홉 일 것이라고 일축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지아는 미술 천재 아동이었다. 그 애가 세 살 때 그렸던 강아지 그림을 나는 오랫동안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이마다 보여주고 자랑하기 일쑤였다. 다섯 살 때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후 컴퓨터 패드에 그렸던 제주 바다그림은 내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노을 진 항구의 배, 항구 주변 언덕에서 자라던 선인장들, 파도를 막는 나지막한 돌담들까지 그 아이의 섬세한 관찰과 표현은 엄마를 충격과 감동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 애는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에 대해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배운 바 없이 혼자 놀며 익히고 그린 것이었다.

7살에 엄마 따라 미국에 온 후 같이 놀 친구가 없던 대부분의 시간을 지아는 몇 시간이고 혼자 그림 그리며 놀았다. 지아는 미국에 온 첫 해엔 영어를 배우고 학교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늘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며 엄마를 위로하는 용감한 딸이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학교 가기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직장생활이 자리 잡은 후 그 아이가 갈 수 있는 미술학교를 찾았다. 한국에 있는 예술 중고등학교 같은 학교로 아이를 보내려고 하였으나 내가 가진 정보력으론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집 근처에 있는 미술 관련 프로그램들을 찾아다니게 했다. 새크라멘토에서 내가 찾은 미술교육들은 대부분 4주 혹은 8주 정도로 계획된 아트센터나 갤러리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4학년 때부터는 담임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로즈빌에 있던 A 미술학원을 중학교 때까지 다녔다. A 학원에서 지아는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그렸던 유화 그림 중 하나는 K어린이 병원 개관 시 그 병원에 걸리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림을 보러 가진 못했다. 어린이병원의 입원실은 일반에게 자유입장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받았던 미술교육은 나름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한국 학부모들이 갖는 일류병에 걸려 있었고 내 천재아이는 최고의 미술대학에 가야 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가르치는 방과 후 프로그램으론 불안했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모두 그 근처의 community college에서 미술을 공부하신 분 들 이어서 내가 어느 미술 대학이 좋은지 어느 대학을 목표로 준비를 해야 할지 물었을 때 community college에 좋은 program들이 있다 할 뿐, 나의 성에 차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캘리포니아 공립학교에서 미술 과목은 거의 미미한 수준으로 초등학교에서는 강당에서 전 학년이 모여 다 같이 그림 그리는 특별 이벤트 외엔 수업이랄 게 없었다. 중학교 (6,7,8학년) 재학 중엔 미술 수업이 없었던가 혹은 한 학기가 있었던 것 같고, 고등학교에선 초급 미술, 고급 미술을 수강한 후 2년 동안 IB 미술을 수강했었고 마지막 학기엔 스튜디오 아트 시간이 한 시간 배정되어 혼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IB Art에서는 매년 학생들의 작품을 Community Gallery에 전시하곤 했고, 새크라멘토 시에서 하는 Art festival에 참여하여 지아의 그림이 상을 받기도 하였다. 새크라멘토 미술관 역시 매년 고등학생들의 작품을 모아 특별전시를 해서 지아의 그림이 전시되는 영광스러운 기회도 있었다.


학교 성적도 곧 최우수학생 수준이 되어 4학년 시험 후엔 GATE(Gifted and Talented Education) 학생으로 선발되어 여름방학 동안 GATE 학생들만 갈 수 있는 영재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6학년 진학 시부터 IB program(International Bachelor's program)에 참여하여 , 지아는 IB Art와 영어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IB 학점을 대학 학점으로 인정받아 대학의 마지막 학기에는 거의 삼분의 일정도로 등록금을 절약하며 대학을 마쳤다.


예술학교를 찾지 못한 대신 나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베이지역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을 찾아내었다. 미술학원들끼리의 경쟁도 심각해서 온라인에 각종 비방 글이 난무하기 일쑤였다. 겨우 한 곳으로 마음을 정하고 찾아갔던 곳은 헤이워드 주택가 가정집에 집의 한 부분을 화실로 만들어 아이들이 모여 그림 그릴 수 있게 하고 아무 간판도 없이 운영하는 1인 학원이었다. 선생님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했고 조각을 전공하신 분이었다. 미국에서 좋은 미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잘 아실 것 같았다. 이후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왕복 4시간 걸리는 대장정을 지아와 함께 했다. 마지막 1년은 지아가 운전면허를 따서 혼자 다닐 수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아침에 7시 전에 집을 나서서 학원에 도착하면 9시, 오후 4-5시까지 지아는 그림을 그렸고 나는 차 안에서 책을 읽거나 주변의 거리들을 탐색하기도 하고 점심을 사다 나르기도 했다. 이때 우연히 들른 재활용 옷가게에서 값싸게 산 원피스는 아직도 나의 최애 여름옷이다. 근처 거리에서 발견한 한국 떡집도 내가 자주 들렀던 곳이다. 때로는 토요일에만 장이 열리는 farmer's market에 가서 어슬렁거리며 배를 채웠고 때로는 근처 도서실에서 책 세일 하는 걸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11학년 여름방학 때는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방학 미술 수업에 6주간 참여하기도 했다. 많은 훌륭한 미술 대학 중에서도 RISD가 최고라 들었고 여름학교에 참여하면 혹시 대학 입학 전형 시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오래된 학교의 기숙사엔 냉방 시설도 없어 지아는 그곳에서 무덥고 힘든 여름방학을 보냈고 나중에 그 학교에 지원하긴 했지만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진 않았다. 지아와 나는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있는 몇 개의 미술 대학을 방문하여 학교 탐방도 하였다.


Portfolio Day 행사도 참여했다. 당시 행사는 샌프란시스코 미술 대학에서 열렸고 우린 아침 일찍 준비해서 갔지만 근처에 주차장이 없어 간신히 주차를 하고 뛰어 갔던 기억이 있다. 미술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나름 열심히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가슴 두근거리며 줄 서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여러 유명 미술대학의 입학 사정관들이 각각의 부스에 앉아 학생들의 작품을 보고 무얼 더 준비해야할지 충고도 해주고 학생들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말해주는 행사였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일년에 한 번 있는 기회여서 학생들은 자기가 관심있는 학교의 입시 사정관의 의견을 들을 기회를 하나라도 더 갖기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처음엔 지아랑 같이 줄을 서있다가 나중엔 지아가 한 학교의 부스에 줄 서있는 동안 다른 학교의 줄에 서서 지아가 한번이라도 더 기회를 갖도록 도왔다. 인기 학교의 줄은 아주 길어서 한번 줄에서 기다리면 다른 기회들을 다 놓칠수도 있었다.


미국의 입시는 12학년 가을에 시작하여 다음해 12학년 봄에 모든게 결정된다. 지아는 몇 개의 대학으로부터 장학금 제안과 함께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그중 뉴욕에 있는 V 대학을 선택하였다. 지아는 Illustration을 전공할 계획이었고 그 학교가 Illustration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이유였다. 나는 내심 가까운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 중 하나를 가기를 바랐지만 지아의 선택을 존중하여 주었다.


지아는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LA에 살고 있다. 나의 브런치 글에 있는 삽화들은 지아의 작품이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의 힘들었던 일들을 때로는 돌이켜 본다. 가령 지아가 한국에 있는 예술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갔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기도 하고 때로는 헤이워드까지 몇 년간 그림 그리러 다닌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었을까 하기도 하고, 5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학교를 포기하고 굳이 IB program을 찾아 멀리까지 통학해야 했을까 하기도 한다.


다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땐 그게 최선이라 믿었고 힘든 길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지아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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