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또는 짐 8

애완견의 생활

by 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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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캐나다의 언니 집에서 개 같이 살고 있다. 개 같이란 용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설명이 필요하다. 야생 들개처럼 이 아니고 사랑받는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애완견으로 살고 있다. 언니가 '산책 가자' 하면 얼른 따라나서고 음식 차려 놓으면 먹어 준다. 심지어 간식도 챙겨 준다. 저녁이 되면 언니가 선택한 채널로 드라마를 보다가 졸리면 자러 간다. 문단속을 한다거나 쓰레기통 내놓는 날을 챙기는 건 주인 몫이다. 나의 가장 큰 역할은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거라 영낙없이 애완견 생활이다. 참 좋다.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음식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책임을 벗었다. 누군가 내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남이 해 주는 음식'이 나의 답이다. 게다가 언니는 정말 요리를 잘한다. 언니가 만든 나물 반찬은 엄마가 해 준 것보다 더 맛있다. 혼자 살면서 요리하기 싫어, 씻기만 해서 혹은 열기만 해서 먹는 거 위주로 먹다가 언니가 건강과 심지어 나의 까다로운 입맛까지 고려하여 골고루 준비한 음식을 먹다 보니 60여 년 묵은 뱃살마저 줄은 것 같다. 아마도 요즘엔 한밤중에 일어나 컵라면이나 우유 빵 죽을 먹는 일이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실은 딱 한번 먹긴 했다. 솔직함은 나의 미덕이자 무던한 사회생활을 저해하는 단 하나의 결점이다.) 혹시 체중 감소라는 그 일어나기 어렵던 일이 생긴 건 단지 언니집에 있는 체중계와 내 집에 있는 체중계의 차이로 밝혀질까 두렵다. 나는 식탐이 있는 데다가 나의 외모 따위에 신경 쓸 만큼 섬세한 여자는 아니어서 일부러 먹는 걸 줄인 건 20 대에 한번 해 본 단식투쟁 때 외엔 없다.


언니랑 나는 2년 5개월 차이로 같은 부모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자매들이 그렇듯 우리는 같은 것도 많고 다른 것도 많다. MBTI로 보면 언니는 E___이고 나는 I___이다. 이미 40년째 퇴화해 온 나의 두뇌로는 첫 번째 알파벳만 기억해 내는 것도 기특하다. 아무튼 언니는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게 더 좋다고 한다. 그게 혼자 있는 게 더 좋은 내가 늘 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한 달이 넘도록 언니네 집에 머무르는 이유다. 우리의 다른 가족들은 내가 심장 시술을 한 언니를 돌보러 와 있는 줄 안다. 나의 개똥철학 중에 '세상 모든 일엔 동전처럼 양면이 있다'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나의 고독한 평안과 자유를 포기한 대신 개 같은 무책임의 가벼움과 맛있는 음식을 얻었다. 오늘 저녁은 김밥이다.

언니랑 산책을 나가면 이주일 걸음을 걷도록 신경 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원래의 구부정한 걸음으로 걷게 되고 순식간에 “펴” 하는 명령어와 함께 언니의 등짝 후려치기가 날아온다. 폭력적인 주인 앞에선 알아서 기는 게 상책이다. 이주일 걸음은 나의 등짝을 구출할 뿐 아니라 기분도 좋게 해 준다. 혹시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주일 씨는 사십여 년 전 유명했던 코미디언으로 다리를 꼬며 어깨와 팔을 흔드는 경보 걸음으로 대히트를 쳤었다. 지금 우울하신 독자가 있다면 일어서서 이주일 걸음으로 몇 걸음 걸어보시라. 최고의 우울치료제를 발견하실 거다.

어제는 근처 숲 속을 걷다가 마주친 사람들에게 '봉주루' 한 후 나도 이제 불어를 할 줄 안다며 낄낄거렸다. 이 동네 사람들은 불어를 주로 사용한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올 무렵 언니네는 퀘벡으로 이민을 왔다. 언니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쌍둥이인 줄 알 거라며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 멀리서 언니의 친구가 언니 이름을 부르며 내게로 달려온 적도 있었다. 내 눈에는 언니는 엄마를, 나는 아버지를 닮아서 그리 쌍둥이 같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엄마는 늘 내가 언니와 어떻게 다른지를 강조하며 키웠다. 물론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완벽했던 첫째 아이보다 부실했던 둘째에 대한 실망이고 꾸지람이었다. 그 탓으로 나는 언니를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이며 자랐다. 열등감을 조장하는 엄마의 험한 양육에도 불구하고 내가 번듯하게(?) 성장한 건 나의 굳건한 정신력의 승리며 기적이다. 존경할만한 언니를 가진 것도 쬐끔 기여했을 거다. 어릴 때부터 언니가 읽던 모든 책들을 따라 읽으며 자란 덕택에 나중엔 내 또래 누구보다 광범위한 독서량과 독서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도 언니의 한마디 때문이다. 언니가 내게 브런치에 글을 쓰라고 권했을 때다.

" 난 글도 못 쓰는데 어떻게,,,,"

" 아냐, 너 잘 써."

언니가 잘 쓴다고 하면 잘 쓰는 거다. 절대복종은 애완견의 생존에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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