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미국 병원 8

채용 과정

by 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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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가기 전 간호사 채용 회사의 사장님이 내게 물으셨다.

"뉴욕으로 갈래요, 캘리포니아로 갈래요?"

"캘리포니아요."

지금 생각해도 그건 내가 살면서 해 온 수많은 선택 중 '참 잘했어요' 등급을 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다. 그때는 동쪽보다는 서쪽이 인종차별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고른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간호사의 험난한 근무여건을 생각하면 내가 새크라멘토로 간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간호사 노동조합에 관해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내가 아는 한 북부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 간호사에게 가장 대우가 좋고 일하기 좋은 곳이다.


미국에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사장님의 강권에 못 이겨 첫 번 채용 면접을 보았고 채용 제안을 받았지만 지은이가 로스앤젤레스로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시 석 달 후 이번엔 새크라멘토에 있던 병원으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채용 알선 회사의 사장님이 준비한 두 대의 대형 SUV에 나눠 타고 우리는 새크라멘토에 있던 C병원의 헤드쿼터에 도착했다. 20여 명의 간호사들과 거의 동 수의 매니저들이 커다란 콘퍼런스 룸에 모여 앉아 면접 질문들을 던지고 대답했다. 흔히 한국의 드라마에서 채용 면접 장면에서 묘사되는 강압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때 분위기는 자주 웃음이 터지는 친목회 같은 것이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의료법이 바뀌어 병원들은 신속하게 많은 간호사들을 필요로 했다. 병원들은 새로 채용하는 간호사들에게 이사 비용과 sign on bonus까지 제시하며 경쟁적으로 간호사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나도 이사 비용과 보너스 $5000를 오리엔테이션을 끝내고 정식 직원이 되었을 때 받았다. 보너스는 만약 2년 내에 사직할 경우 토해 내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32시간 밤에 일하는 조건으로 심장집중관리병동(cardiac telemetry unit)에 채용되었다. 로스앤젤레스지역의 병원이 제시했던 임금보다 시간당 $10가 더 많았다. 한국에서는 알바 자리가 아니면 채용 시 얼마를 받을지 보수를 확실히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미국에서는 채용을 제시하는 편지(job offer letter)에 시간당 임금과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해야 하는지를 명시해 놓는다. 이때 임금을 더 달라고 흥정할 수도 있다. 내가 일했던 병원은 모든 간호사가 입사와 함께 조합원이 되는 유니언샵이 적용되고 임금도 단체협약에 근무 연차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덕택에 나는 한국에서의 임상 경력을 100퍼센트 인정받았고 그게 로스앤젤레스 병원의 임금 수준과의 차이를 만든 것 같다.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일주일에 12 시간씩 3일 일하는 데를 선호했는데 오직 소수의 병동만이 8시간 교대였고 나는 8시간 근무를 원했다. 같은 병원 안에서도 병동에 따라 8시간 혹은 12시간 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적은 시간을 일하기를 원해서 당시 나를 뽑았던 매니저가 주 8시간 4일 일하는 근무조건을 제시했던 것이다. 미국의 간호사들은 모두 시간당 임금을 받는다. 같은 병동에 채용되었던 다른 한국 간호사들은 모두 주당 8시간씩 5일 일하는 조건이었다.


한국에서는 간호사를 채용하는 책임과 권한이 대부분 인사과에 있었다. 특채를 하건 임용시험을 보고 뽑건 각 병실의 관리자들은 인사과에서 보낸 간호사를 데리고 일해야 한다. 미국에서 내가 일했던 병원에서는 직원채용은 전적으로 병동 매니저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때 한국에서 오는 간호사들을 대규모로 채용하며 특별 오리엔테이션까지 주자는 방침은 병원장급의 상부에서 결정되었겠지만, 실제로 누가 채용될지, 어느 간호사가 어느 부서로 채용될지 하는 문제는 각 매니저들에게 달려 있었다. 내가 알기로 당시 면접을 본 간호사들 중 채용되지 못한 간호사도 있었다. 내가 채용되었던 C병원은 새크라멘토 카운티에서 네 개의 병원을 운영했고 각 병원은 200-350병 상의 규모였다. 두 개 병원의 매니저들은 한국 간호사들을 채용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고 우리는 두 개 병원에, 한 병동에 3-4 명씩 채용되었다. 한 병동은 30-40 병상 규모였고 심장집중관리병동에서는 이전에는 한 명의 간호사가 5명의 환자를 간호했으나 법이 바뀐 후론 4명의 환자까지만 돌볼 수 있었다. 심장원격관리를 하지 않는 병동에서는 한 명의 간호사가 5명의 환자를 돌본다.

내가 일하던 첫 해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이미 4명의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나의 상급자인 supervisor가 내게 다섯 번째 환자를 맡겼다. 이미 다른 한 간호사가 다섯 번째 환자를 맡고 있었다. 빈 병실이 있었고 응급실에서 입원할 환자가 올라와야 했다. 그 병동은 30개 병실이 있어 7명의 간호사가 4명씩의 환자를 맡으면 두 개 병실이 남는다. 나는 다섯 번째 환자를 맡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옆에서 다른 한국 간호사가 그냥 하라고 속삭였다. 그녀가 나보다 먼저 다섯 번째 환자를 맡은 간호사였다. Supervisor는 내가 환자를 거부한다고 밤 번 간호과장에게 전화보고를 했다. 잠시 후 밤 번 간호과장이 올라왔고 우리는 모두 병동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밤 번 간호과장은 다섯 번째 환자를 맡는 건 불법이라는 내 주장을 확인하며 병동내 모든 간호사가 4명의 환자를 맡고 있고 빈 병실이 있어 더 환자를 받아야 한다면 그다음 환자는 supervisor 가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 이후로 우리 병원에서 어느 간호사에게도 환자가 심장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면 다섯 번째 환자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supervisor가 그중 손이 덜 가는 환자를 맡고 신환은 일반간호사가 받는 방법으로 처리되었다.


9년 후 처음 일했던 곳이 12시간 근무로 바뀌었을 때 나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C병원으로 옮겼다. 8시간 근무의 장점이 사라진 이상 계속 먼 곳(차로 25분 거리)으로 출퇴근할 이유가 없었다. 이 때는 신규 채용이 아니고 부서 이동과 같은 형태이지만 절차는 비슷하다. 병동에 결원이 생기면 병동 매니저는 채용 공고를 사내 채용사이트에 올린다. 만약 한 달 이상 사내지원자가 없거나 지원자 중 적절한 자가 없으면 외부 채용 공고 사이트로 채용 공고를 올린다.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병동의 매니저를 찾아가 면담을 했다. 매니저는 나를 채용하기로 결정하고 인사과에 채용 의사를 보낸다. 인사과는 나의 현재 부서장에게 나의 부서 이동을 알린다.


두 번째 일터로 옮기기 전 나는 세 번 정도 심장중환자실에 옮기려고 시도했었다. 사내 채용 공고사이트에 내 이력서를 내고 이동의사를 밝히면 대개는 그쪽 매니저가 나를 면접한 후 채용 혹은 거절해야 하는데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한국에서의 10여 년 중환자실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 나와 같은 병동에서 일하던 신규간호사를 뽑았을 때조차도 내겐 면접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 신규간호사의 엄마가 어디 어디 병원의 간호부장이란 말도 들었다. 미국에서 20여 년 일하며 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그 병원의 매니저들은 신규 간호사를 잘 뽑지 않았다. 수년간의 임상 경력이 있고 그쪽 관리자의 추천서를 가져올 수 있는 간호사를 언제나 먼저 뽑았다. 한국의 대형 병원들이 늘 졸업예정자만 채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한편 내가 일하던 병원에서는 정기 부서이동 같은 건 없었다. 한국에서는 매년 2-3년마다 부서를 이동하곤 하였는데 미국에선 본인이 지원했을 때에만 부서 이동이 되었다. 내가 일했던 병동에는 20-30여 년 같은 병동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간호사를 차트 들고 의사 따라다니는 직업이 아니라 전문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는 직업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경력자를 우선해서 채용해야 하고 정기 부서 이동 같은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

가정방문간호사로 일할까 하는 마음에 그쪽에 응모한 적도 있었다. 이력서를 올린 후 나는 방문간호사 부서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기를 청했더니 다음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당시 지은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통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방문간호사로 일하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매니저에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실제로 방문간호사를 하루 따라다녀 보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러나 하루 따라다녀본 후 나는 채용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영어 듣기 능력이 커다란 장애였다. 아침마다 20여 통의 전화 메시지들을 듣고 환자들의 요구사항을 처리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전화 메시지에서 나는 낯선 환자들의 이름을 식별할 능력이 없었다. 둘째 문제는 부끄럽지만, 혼자서 혼자 사는 노인들의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미국 저소득층의 주거지는 한국 저소득층보다 훨씬 더럽고 위험했다. 거동이 힘든 혼자 사는 노인이 오물이 범벅된 침대 위에서 간호사를 맞이하기도 했고,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노인도 있었다. 그냥 나올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상황들이 너무 뻔히 보여 나는 방문 간호사 매니저의 채용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나는 수많은 방문 간호사들이 어떻게 그 일들을 감당하는지 모르겠다. 간호사가 혼자 나가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중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소송에 대처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분량의 기록을 해야 한다. 내가 따라다녔던 간호사는 하루 보통 8명을 방문하고 의무기록 정리는 나중에 집에 가서 밤늦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나처럼 융통성 없이 본 대로 기록하고 규칙대로 일하는 사람은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을 해도 못 다할 업무였다.


11년 동안 밤근무를 한 후 낮근무로 옮겼다. 미국에서는 밤근무로 채용되면 밤에만, 낮근무로 채용되면 낮에만 근무한다. 밤근무 시에는 시간당 소량의 금액이 추가로 지급된다. 지아가 운전면허를 딴 후엔 더 이상 밤근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도 다른 부서 이동과 같은 절차를 거쳤다. 사내 채용공고에 응모하고 매니저와 면접하고 채용이 결정되면 이동한다. 이동 시기는 이쪽 매니저와 저쪽 매니저가 의논해서 정하는데 보통은 새 근무 스케줄이 나올 때에 맞춘다. 같은 병동에서 낮근무로 옮길 경우엔 우선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외부로 나오는 채용 공고는 대부분 밤근무자 자리이기 쉽다..


나와 함께 채용되었던 한국 간호사들 중 20년 후 내가 사직할 때까지 남아있던 건 나까지 4명뿐이었다. 첫 해에 해고되지 않고 남아있던 간호사 중 한 명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만두었고, 내가 아는 한 명은 새크라멘토가 싫어 그만두었다. 그녀는 처음엔 로스앤잴래스에 취업했다가 그다음 산호세로 옮겼고 산호세에 아주 만족해서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 다른 두 명은 새크라멘토 내의 보수가 더 좋은 병원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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