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공립학교 9

여름방학

by 새 날

나의 두 아이들은 7살, 12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각 10번, 5번의 여름방학을 보냈다. 첫 번 여름방학은 실은 아직 정식으로 학교에 등록하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던 게 2003년 5월 23일이었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여름방학일정이 6월 10일에 시작하니 아이들은 여름학교에 갈 수 있을 것으로 한국에서 준비할 때 생각했다. 그러나 버클리 교육청 직원은 여름학교는 이미 3월에 등록이 끝난다며 내 아이들은 다음 학기에나 등록하라고 했다. 덕택에 아이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설 종일반 여름학교에서 아주 약간의 영어를 접하며 즐겁게 여름방학을 보냈다.

두 번째의 여름방학엔 작은 아이 지아는 English Learner로서 여름학교에서 반나절을 공부했다. 이 여름학교는 그때 우리가 속했던 산 후안 교육청 전체에서 영어가 제2 언어인 아이들 중 영어지진아들만 모아 학년들을 2-3개씩 묶어 한 학급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이미 취업을 해서 막 야간 근무를 시작한 참이었다. 아침엔 퇴근해서 8시까지 지아를 학교에 데려다주었고 학교가 끝나는 12시경엔 다시 집에 데려왔다. 지금 물어보니 지아는 이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는데 차라리 기억이 없는 게 다행이다 싶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에 모인 아이들 중에는 규율이나 선생님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말썽장이들이 있었고 지아가 경험한 최악의 클래스였다. 이때 지은이는 아무 여름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며 행복한 여름을 지냈다. 내가 아이의 허락 없이 등록해 준 도서실의 읽기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이었지만 "여름 방학엔 쉬어야 한다"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사보타주했다. 최근에 지은이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해 여름 나는 영주권 신청에 필요한 영어 시험을 통과하고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세 번째의 여름 방학은 2005년이었다. 지아는 우리 동네 Park District(공원지구)에서 하는 여름학교에서 여름을 보냈다. 여긴 공립학교 시스템도 아니고 사설이라고도 할 수 없다. 캘리포니아엔 동네마다 공원지구가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선 지역 내 전체 공공 공원시설들을 관리할 뿐 아니라 여러 운동, 취미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등록비를 받으며 지역 주민들의 여가 생활이 다채롭도록 돕는다. 나도 척추 강화 운동프로그램, 요가 수업, 테니스 수업 등에 지아와 함께 여러 기회에 단기간 씩 참여했었고 이 중 척추 강화 운동은 그때 배운 걸로 지금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서 꾸준히 하고 있다. 허리가 아플 때 이 운동을 하면 바로 통증이 완화되는, 내겐 '기적 같은'이 아니라 디스크가 터졌던 나를 계속 일할 수 있게 해 준, 말 그대로 기적을 일으킨 운동이다. 황당했던 건 이 여름학교에 한국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러 온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지아는 이 아이들의 통역사로 의사소통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여름방학 동안 미국의 친척 집에서 영어를 배우라고 부모는 오지도 않고 아이들만 미국으로 보낸 것이었다. 지아 또래의 두 아이는 지아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나 마찬가지로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다. 그 애들이 한 달 동안 얼마나 영어를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난 그 애들이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아동학대로 느껴졌다. 어떤 부모이길래 7,8세 아이들만 한 달씩 외국으로 보내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름학교는 9시에 시작해서 4시에 끝나는데 더 일찍 오려면 추가 비용을 내고 7시나 8시에 올 수도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이들은 모두 자기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30여 명의 저학년 아이들과 정규 교사 2명, 봉사 활동하는 고등학생 여러 명이 있었다. 여기서는 주로 게임이나 그림 그리기, 각종 강당 내 체육활동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어나 수학을 공부하는 건 전혀 없었다. 더운 여름이므로 최소한 일주일 중 3일 오후는 야외 수영장에서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고 다이빙을 하고 공놀이를 했다. 한국에서처럼 자유형이나 배영의 자세 배우기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아는 여름이 끝날 무렵 원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게 새까맣게 탔다. 이 여름에 지은이도 지아 못지않게 피부를 태웠다. 9학년이 되는 새 학기에 이수해야 할 체육시간을 여름 방학 동안 몰아서 하루 4 시간씩 매일 출석해서 마치면 정규 학기 동안 다른 과목을 하나 더 수강할 수 있다고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여름학기 수강 신청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바로 집 앞의 고등학교에서 여름 학기 체육이 이루어져 나는 통학을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아침엔 아직 시원하므로 주로 트랙에서 달리기 등 야외 운동을 하다가 마지막 시간은 거의 언제나 수영으로 마무리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수영장은 국제 규격으로 실내에 있었지만 아침 2-3 시간 야외 운동 만으로도 지은이는 새까매졌다. 피부암이 흔한 미국에서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교육을 많이 하지만 내 아이들이 그 해 여름 얼마나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은 아직 피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던 나이였고, 어릴 적 여름 방학이면 한 달 내내 변산 해수욕장에서 살던 나는 자외선 차단제 같은 건 써 본 적도 없고 어른이 된 후에도 피부 관리는 딴 세상 여자들이 하는 걸로 알았던지라 아마 아이들의 피부 따위는 내 안중에 없었을 것 같다.

2006년 여름엔 지아는 4학년 때 친 STAR(Standardized Testing and Reporting) 성적에서 상위 5%인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GATE(Gifted and Talented Education) 학생으로 선발되어 교육청 내 4,5 학년 GATE 학생을 모아 한 학급을 만들어 운영하는 여름방학 수업을 하러 다녔다. 내가 이 수업을 참관한 적은 없고 지아도 아무 기억이 없다하므로 아이에게 지금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 학급의 목표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수업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아이들에게 복잡한 상황과 문제를 주고 서로 토론하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주된 수업이라 했었다.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한 핵심 과제였다. 예를 들면 아이들은 중세시대에 사용하던 깃털 펜으로 필기체를 쓰는 방법을 배운다. 펜의 두꺼운 쪽으로도 써 보고 얇은 쪽으로도 쓰는 연습들을 한 후 그룹을 나누어 깃털 펜과 잉크만으로 중세 시대를 주제로 한 미술 작품을 만드는 식이다. 이때 수업이 열렸던 학교는 우리 교육청이긴 하지만 우리 집에서 25분은 운전해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어서 밤 근무 후 아이를 등교시키는데 시간이 빠듯하여 평일 근무 아침마다 초조 불안을 경험해야 했고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느라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여름방학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8시간 주 4일 근무여서 주로 주말 근무를 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 이 해에 지은이의 여름 방학체육 수업도 집에서 먼 곳이었고 등하교 시간이 달라 나는 이중 삼중의 고생을 했다. 지은이에게 여름학교 기억을 말해 달라 했더니 지은이는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학교가 끝난 지 한참이 되어도 나는 나타나지 않았고 기다리던 아이는 그 땡볕 아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마 늦잠을 잔 나는 뒤늦게 학교로 가 아이를 찾다 못 찾자, 집을 향해 6차선 도로의 가장 오른쪽으로 서행 운전을 하며 아이를 만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시실 솔직히 말해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고 내게는 큰일이 아니어서 기억하지 못했는지 모르나 (무사히 돌아왔으니 무어 기억할 만한 일이겠는가) 모든 아이들이 돌아간 학교 문 앞에서 혼자 남은 지은이는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2007년 여름방학땐 아이들은 한국에서 아이들의 아빠와 시간을 보냈고 나는 혼자 남아 육체적으로는 편안한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분리불안을 겪으며 여름방학을 지냈던 것 같다. 영주권이 나온 후로는 되도록이면 아이들을 여름방학에 한국에 보내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했다. 지은이가 여름방학 수업 때문에 갈 수 없었을 때에 지아 혼자 10 시간이 넘는 긴 여행을 하곤 했는데 (아마 지은이는 고교 졸업 시까지 한두 번 밖에 한국에 가지 못했다.) 대한 항공에 미성년자 보호 프로그램이 있어 가능했다. 미국에서 소액을 추가하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이를 승무원에게 인계하고 인천공항에서 아이 아빠가 승무원으로부터 아이를 인계받았다. 아이의 좌석을 승무원실 앞에 배치하고 다른 또래 자녀가 있는 가족이 있으면 그들 자리를 지아 옆에 배치하여 지아가 필요한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집에서도 늘 그림을 그리며 혼자 노는지라 이때도 혼자 그림을 그리며 앉아 여행하는 것에 지아는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았다. 처음 여름방학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일주일 넘도록 울어 아침마다 아직도 젖어있는 베개를 보는 내 가슴이 찢어졌으나 여러 해 반복하다 보니 차츰 그 시간은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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