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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아범 일기 Jan 12. 2024

#1 크린, 유토피아

(632일째 기록)

(632일째 기록)

 빨래를 좋아한다.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만들고, 가지런하게 접으면 마음도 단정해진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때, 이것만큼은 내 맘대로 만들 수 있음이 위안이 된다. 생각대로 깔끔해지는 옷과 수건이 나만의 유토피아가 된다. 고쳐 말하면, 유토피아가 되었다. 지난 주말까지는.



 세탁기의 고장을 처음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느 기계처럼 껐다 켜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탈수가 안 되는 상황이 며칠 지속이 되고 A/S를 요청해야겠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행동에 나섰다. 아이와 둘만 있는 상황이었지만, 잘 해결할 수 있을거라 자신했다. 안고 있어도 안아달라고 말하는 20개월 아기를 호기롭게 세탁기 위에 앉히고 작업을 시작했다. 왼쪽 아래에 있는 탈수 필터를 꺼내서 먼지를 제거한 후 다시 끼우면 정상 작동될거다. 대신, 물이 조금 나올 수 있으니 물받침을 준비해라. 상담원의 친절한 말처럼 부드럽게 일이 진행되면 좋겠지만, 일은 말처럼 되지 않았다. 탈수필터를 꺼내니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과 먼지덩어리. 물바다가 되는 세탁실에 발을 담그며 제일 먼저 걱정된 건 세탁기 위에 앉아있는 아이였다. 혹여나 놀라서 떨어지면 어쩌나. 세탁실 밖에 세워 놓으면 안아달라고 발을 동동구를텐데. '어떻게 하지?'를 연발하며 수건을 적셔서 대야에 담아 퍼내기를 여러 번. 그보다 더 많은 한숨이 나오기 시작한다. 생각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빨래는 물바다가 되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하는 아이는 안아달라고 성화였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괜찮아? 고생했어." 헐레벌떡 달려온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응. 나 진짜 고생 많았어." 퉁명스럽게 대답할 일이 아닌데, 왜 그랬을까. 아내의 세탁물 때문에 탈수필터가 막혔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짜증을 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했으니, 남편의 짜증을 받을 수 없을텐데 아내는 함께 화를 내지 않았다. 되레 자리를 피하고, 아이와 놀면서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줬다. 그제야 눈물이 터졌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 왜 나는..."


 회색빛 물이 서서히 빠지고, 먼지와 세제 찌꺼기가 남았다. 마음의 소용돌이도 가라앉으면서 하나의 문장이 남았다. 혼자가 아니야. 빨래로 나만의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세탁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하는 대상이 작은 균열이 나도 무너질 수 있음을 곱씹는다.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도,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가족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는 아내. 고사리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해주는 아들. 가족의 손결과 숨결로 버텨왔다. 다시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결국, 잘 되기 위한 과정이란 걸 믿는다. 직접 고친 세탁기로 깨끗해진 세탁물처럼.


 + 물바다를 보고 무너진 건 멘탈만이 아니었다. 손에서 놓친 탈수 호스 마개가 사라졌다.(!) 그걸 찾기 위해 얼음같이 찬 흙탕물에 손을 담가 뒤졌다. 당시 입었던 옷의 주머니를 모두 뒤졌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세탁기 밑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개를 찾고 느꼈다. 뭔가 하려면 끝까지 하는 나의 의지력을. 올해는 어떤 일이든 시작의 끈기를 잊지 않고 이루리.


#봄아범일기 #크린토피아 아닌 #크린유토피아 #탈수대재앙 #될놈될 #세탁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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