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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아브라함 브레게를 수집하던 날들의 기록

데이비드 솔로몬스와 마리 앙뚜아네트

브레게는 왕이나 귀족들이 시계라는 소품을 신분 과시용으로 사용하게 되는 럭셔리 시계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만드는 시계의 마력은 단순히 복잡한 시계였던 것이 아니라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얇고 세련된 디자인을 가진 시계였다. 브레게 이전이나 동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마력들이 왕이나 부유한 귀족들을 단순히 시계의 구매자를 넘어 시계 컬렉터들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만 구입한 사람은 없다. 한번 구입하면 두 번째, 세 번째 시계를 구매를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바로 브레게의 마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력이 솔로몬스라는 영국의 공무원이자 과학자를 아브라함 브레게 사후 100년이 지나 브레게 최고의 컬렉터로 만들어 120여 개의 브레게 시계를 수집하고, 브레게에 대한 최초의 전기와 그의 작품들에 대해 해설하는 책을 쓰게 만든 힘인 것이다. 솔로몬스는 아브라함 브레게를 시계의 천재로 부르며 오로지 아브라함 브레게가 만든 시계만을 수집했었던 것이다. 1921년에 발매된 그의 책은 아브라함 브레게에 대해 시계 컬렉터가 처음으로 쓴 책이며, 비슷한 책들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었지만 대부분 브랜드에 대한 것이었지 시계기술자에 대한 글은 아니었다. 이는 1980년대 각종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빈티지 시계에 대해 경매에 참여하는 경매 참가자들을 위한 안내서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데이비드 솔로몬스가 수집한 브레게의 시계 중 최고의 시계가 '마리 앙투아네트'로 불리는 파텍 필립이 그리브스로부터 주문받아 제조하게 되는 헨드 그리브스 쥬니어의 컴플리케이션 이전에 거의 100년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의 명성을 가지고 있던 시계이다. 이 시계는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처럼 예루살렘의 박물관에서 1987년에 도난되었다가 20년 후인 2007년에 다시 찾게 되는 범죄 수사물의 역사까지도 가진 시계이다. 예루살렘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경매에 나올 가능성은 낮지만 만일 나오게 된다면 그레이브스 컴플리케이션의 경매 기록을 2배 이상의 가격으로 경신할 유일한 시계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브레게의 생애며 그가 만든 시계들에 대한 이야기는 스와치 그룹의 브레게 브랜드에 대한 설명이며 소더비나 크리스티의 경매 기록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이 책에서는 아브라함 브레게가 만든 시계들의 최대의 컬렉터였던 데이비드 솔로몬스(1851-1925)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이 책은 데이비드 솔로몬이 죽기 4년 전인 1921년 런던에서 1,000부만 발간된 책이다. 이 책은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수집품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친구들과 브레게를 수집하는 컬렉터들을 위해 그가 공부하며 수집한 진품을 구분하는 법을 포함하여 브레게의 시계들이 가진 기술적 특징들을 설명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책의 앞부분에 서술된 솔로몬스가 브레게를 수집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데이비드 솔로몬스는 부모가 일찍 죽고 영국의 세습 준남작이던 삼촌의 손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장난감보다는 각종 기계의 동작원리에 흥미를 느끼는 메카닉(기계기술자의 기질을 가진 사람)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Sir'라는 표기는 그가 영국 귀족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14살 때부터 시계에 흥미를 가져 런던의 중심가에 위치한 시계 판매점이며 시계 수리점을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런 과정에서 알게 된 시계 수리점의 친구를 통해 초보적인 시계 수리 기술까지도 배우게 된다.


솔로몬스는 평생 동안 시계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다양한 시계를 구입했지만 6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오랜 선망의 대상이던 브레게의 시계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게 되었다. 그리고, 60대 후반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70살의 나이로 이 책을 출판한 것이다. 파텍 필립에게 고가의 시계를 주문했던 미국의 백만장자 패커드나 그레이브스와는 다른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패커드와 그레이브스가 티파니에서 파텍 필립을 알게 되던 1915년경 솔로몬스는 65세였으며 이때부터 수십 년간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짝퉁이 많기로 유병한 브레게의 진품을 감정할 안목을 스스로 키운 후 수집을 시작했으며 단기간에 87개에 이르는 브레게 시계들을 수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솔로몬스는 패커드나 그레이브스와 달리 백만장자가 아니었다. 그의 책에는 그가 브레게의 대표작인 '마리 앙뜨와네트'를 구매할 때 그 엄청난 가격 때문에 잠못이루며 고민하던 시계 컬렉터로서의 고민이 매우 사실적으로 등장하므로 이를 그대로 인용할 것이다. 그는 영국의 세습 귀족 작위를 물려받고, 캠브리지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에서 지방 도시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영국의 여러 과학단체에서 활동한 과학자이자 저술가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솔로몬은 서문에서 이 책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당시 브레게의 사장인 '헨리 브라운'(Henry Brown)과 그의 아들인 조지 브라운(George Brown)에 대한 감사말도 포함되어 있다. 브레게는 자신이 판매한 시계들에 대해 제품 번호별로 시계의 구성, 판매 가격, 구입자 등을 기록한 상세한 장부를 남겼고, 이 자료를 브레게의 당시 사장이던 헨리 브라운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 브레게의 유산이 그의 손자를 거쳐 브레게 공방의 기술자였던 브라운 가문으로 옮겨지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솔로몬스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시작될 이야기이기도 하다. 솔로몬스가 이 책을 쓰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당시 브레게의 사장이 아닌 데쑤터라는 영국 사람으로 그는 일평생 브레게를 연구한 컬렉터였다고 한다. 이 책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솔로몬스는 브레게를 수집하기 전부터 브레게에 대한 관심 때문에 브레게 시계 수집가들과 오랜 인연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인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 스스로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했지만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는 브레게의 인생이 아니라, 솔로몬스가 브레게를 수집하게 된 과정이다.



'23살 어쩌면 조금 그 후였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브레게의 이름이 존경과 함께 언급되는 것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까지 브레게의 진품을 본 적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리젠트가의 시계숍에 진열된 브레게의 클럭(탁상용 시계)을 처음 보았으며 가격은 150 파운드였다.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매우 저렴한 것으로 보였으나 그 탁상용 시계가 진품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른 사람이 그 시계를 사도록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브레게의 진품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파리의 가장 저명한 시계기술자를 찾아가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브레게는 가품이 많으며 진품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진품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구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 1915년인가 1916년에 뉴본드 스트리트에 있는 유명한 시계숍으로부터 브레게의 자동 회중시계가 입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게 되었다. 시계숍의 주인의 설명에 따르면 실력이 없는 시계기술자가 수리를 하면서 톱니바퀴 하나를 망가트려서 수리가 필요하지만 다른 곳은 아주 멀쩡한 시계라는 것이었다. 시계의 디테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시계를 구입했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브레게가 만든 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계 마스터'의 작품에 대해 정말 감동하게 되었고 그가 남긴 시계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7년 5월 3일이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그날 나는 현대적인 보석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던 리젠트 스트릿의 도로에 인접한 가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가게의 쇼윈도에서 나는 특이하게 생긴 시계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그 시계를 구경했다. 그 시계 옆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나는 쇼윈도에 바짝 다가가 그 시계가 불운했던 여왕을 위해 브레게가 만든 시계이며 그의 최고의 걸작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그 시계의 판매 가격이 엄청난 고가였으므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 그 시계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을 해야 했다. '이 시계를 구입할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가 그치고 나면 이런 명품이 쇼윈도에 그대로 남아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내가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의 금액을 정한 후 비옷을 입고 다시금 그 가게로 찾아갔다. 그 가게의 사장은 평생 동안 브레게의 시계들에 대해 나 이상으로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그 시계는 이미 거래가 진행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한 최대의 구입 가격을 제시하고는 편한 마음으로 시계를 자세히 구경했다.


정말 완벽한 시계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나의 제안에 대한 그의 결정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0시 30분에 그 시계의 주인이 그 시계를 가지고 직접 찾아와서, 선금으로 50 파운드를 추가로 지불하겠다면 시계를 팔겠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50파운드를 추가로 지급하고서 그 시계를 받았다. 그 후 이 시계에 대해 받은 여러 구매 제안들을 고려할 때 성공적인 거래였다. 나는 며칠 밤이고 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공부했다. 정말 복잡하고 한편으로 흥미진진한 시계였다.'



1920년 3월에 나는 16개의 브레게 시계를 개인적으로 판매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결국 그 시계들은 나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당시 가장 우수한 브레게 컬렉션이 크리스티 경매에 올라왔다. 판매자는 가능하다면 그 시계들을 개별 판매하지 않고 일괄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수집한 시계는 총 52개나 되었다. 물론 이 시계들은 결국 나의 소유가 되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 번의 거래를 통해 내가 수집한 브레게 시계들은 총 87개가 되었다. 이 책은 내가 수집한 87개의 브레게 작품들에 대한 소개이다.'


솔로몬스의 수집품 중 넘버 56으로 설명된 시계가 마리 앙투아네트 시계이다. 이 시계에 대한 솔로몬스의 설명을 인용한다.


'브레게의 걸작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알려진 시계이다. 1802년에 완성되어 브레게 회사에 보관되던 시계였다. 브레게의 사업이 끝났을 때 이 시계는 브레게의 미망인인 마담 브레게에게 넘겨졌다. 그녀는 1887년에 당시 600 파운드의 가격에 스페니어 브룬톤경에게 시계를 판매했다. 이 시계는 그 후 그의 동생에게 넘어가 그의 컬렉션에 포함되었다.


브레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계는 1783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호대의 장교가 주문한 것이라고 하며, 그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컴플리케이션이 들어가야 하며, 황동 부품은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금이 사용되어야 한다. 완성되는 시기에 대한 제한은 없으며 가격에도 한계를 두지 않는다. 이 시계는 1783년에 주문되어 1802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1789년에서 1795년까지 제조가 중단되었었다. 제조 가격은 3만 프랑이었다. 브레게는 이 시계가 18세기 말 시계 제조기술의 기념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시계에 대한 솔로몬스의 설명은 상당히 많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후의 이런저런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이 시계를 주문한 사람은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의 숨겨진 연인이었던 스웨덴의 백작인 한스 악셀 본 페르센(1755-1810)이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페르센이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낸 암호 편지에서 드러난 내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으로 179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시계를 만져보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17년 후에는 이 시계를 실제로 주문한 페르센도 죽게 된다. 그리고 제조 기한에 제한이 없다는 1827년의 주문을 받은 지 44년이 지나서 시계가 완성되었다. 그 사이 이 시계를 설계한 아브라함 브레게도 1823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 시계를 완성한 것은 아브라함 브레게의 아들인 루이즈 안톤 브레게였다고 한다. 이 시계에 대한 판매 기록은 브레게의 장부에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1838년에 라 그로예 후작(Marquis de la Groye)이 수리를 맡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현재까지 이 시계를 실제로 주문한 사람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로예 후작이 브레게의 오기이거나 시계를 맡긴 사림이 신분을 속이기 위해 거짓 이름을 진술한 것이며 실제로는 '라 크로와(la Croix) 카스트리스 후작이며 당시 프랑스의 해군성 장관이며 원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시계를 실제로 주문한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수리를 맡겼던 사람은 그 후 몇십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아, 주인이 없어진 이 시계는 1855년 파리 국제 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리고 1887년 이 시계는 런던의 경제전문가이자 시계 컬렉터인 스펜서 브룬톤(1846-1901)에게 600 파운드에 판매되었고(브레게 사장인 에드워드 브라운의 기록) 1901년 브룬톤이 죽자 네덜란드의 예술품 딜러인 머레이 마크스에게 넘겨졌고, 1904년 프랑스 출신의 시계 제조자로 영국에 정착했던 루이스 알베르트 데슈터(1858-1930)에게 넘어갔으며 1915년경 데이비드 솔로몬스가 구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볼 때 솔로몬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브레게 전문가인 데슈터의 대리인을 통해 판매자의 정확한 이름도 모른 상태로 데슈터에게 상당한 이익을 남겨주고 시계를 구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데슈터는 엄청난 손해를 보고 이 시계를 판매한 것이며, 솔로몬스는 그의 책에 서술한 것처럼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계를 구입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살로몬스의 삼촌은 유대인 출신으로 런던의 시장을 지냈던 시림이었다. 1925년 데이비드 살로몬스가 죽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하여 57점의 브레게 시계들이 그의 딸인 베라 브라이스(Vera Bruce, 1888-1969)에게 유산으로 남겨지고, 나머지 시계는 그의 미망인에게 남겨졌다.


유산을 받기 전인 세계 1차 대전 후 베라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인류학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를 지도한 헤브류 대학의 교수인 레오 아레야 메이어(Leo Aryeh Mayer)가 죽자 베라는 교수의 이름을 딴 L. A. Mayer 이슬람 예술 미술관을 건립하고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시계들을 미술관에 전시하게 된다. 이 미술관이 공식적으로 개관한 것은 1974년이었다. 미술관 완성 5년 전에 베라가 죽게 된다.


1983년 미술관이 개관하고 9년이 될 즈음 이 미술관에 이스라엘의 탁월한 도둑인 나만 딜러가 미술관을 침입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회중시계 대부분을 훔치게 된다. 이스라엘 경찰은 딜러가 범인임을 의심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2004년 20년이 지나도 범인을 찾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 즈음 브레게를 인수한 스와치의 하이섹은 다니엘스가 남긴 사진 등을 토대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계를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작업이 완성되기도 전인 2006년 L. A. Mayer 미술관에 텔아비브에 소재하는 힐라 에프톤 가바이라는 여자 변호사가 연락을 하게 된다. 그의 고객은 죽은 전남편으로부터 그가 미술관에서 브레게의 시계들을 훔쳐 20년간 보관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으며 200만 달러의 보상금만 준다면 그 시계들을 모두 돌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런저런 협상을 통해 그녀가 요구한 200만 달러를 35,000 달러로 깎아 2007년 8월에 브레게의 시계들이 미술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밀은 유지되지 못했고, 이스라엘 경찰은 나단 딜러의 미망인인 닐리 사무라트를 찾아내게 된다. 딜러와 사무라트는 2003년에 결혼한 후 텔아비브로 여행하며 물품보관함에 미술관에서 훔친 시계들을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결국 닐 사무라트는 2008년에 체포되었고, 경찰은 프랑스의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43점의 시계들을 찾게 된다. 이렇게 해서 도난 후 25년이 지나 도난당한 106점의 시계 중에서 96점이 회수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2004년 남아 있던 자료며 사진들에 의지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의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던 스와치의 니콜라스 하이엑크는 오리지널 브레게가 미술관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2008년 바젤 페어를 통해 브레게 1160으로 명명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복제품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기의 기준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복잡한 시계였다. 오리지널 시계가 등장했으므로 이는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여 만들어진 가장 비싼 짝퉁시계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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