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츠 혁명기의 반항아 크로노스위스
기계식 시계의 부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과 브랜드가 게르트 루디거 랑(Gerd-Rudiger Lang)과 크로노스위스(Chronoswiss)이다.
크로노스위스를 창업한 게르트 루디거 랑(1943~)은 에드먼트 캡트보다 3살이 많고 쟝 클로드 비버보다는 6살이 많은 3명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이지만 모두 1940년대 생이다. 스위스인들은 1940년대 생들을 앙팡 테러블 세대라고 부르는 듯하다. 2차 대전 전후로 태어난 탓인지 안주보다는 도전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캡트가 샐러리맨으로 살았던 것 때문에 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해도 비버와 랑은 그런 인물들이다. 랑은 스위스 출신이 아니라 독일 출신이다.
제르드 루디거 랑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크로노스위스를 창업한 것이 우연히도 비버가 블랑팡을 창업한 1983년이었다. 쿼츠 혁명기를 공부하다 보면 1983년에 우연이라고 부르기엔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 무수히 발생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까지도 등장한다. 쿼츠 시계의 승리를 상징하는 스와치와 Casio G-Shock가 발매되기도 했지만, 기계식 시계 부활의 선봉장으로 여겨지는 블랑팡과 크로노스위스가 창업한 연도이기도 한 것이다. 즉, 쿼츠 시대의 완성이자 기계식 시계 부활의 신호탄이 쏘아 올라졌던 연도이다.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사건들이 1983년에 등장했으며 이 책을 읽는 내내 1983년의 신기한 우연들에 대해 놀라게 될 것이다. 최근에 시계를 선택할 때 유행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태어난 해에 등장한 대표적인 시계 모델을 구입하는 것이다. 1983년생이라면 다른 연도와 달리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민해야 한다.
랑은 1964년 21살에 스위스의 호이어에 취직하게 된다. 이 시기는 잭 호이어가 사장으로 활동하며 호이어의 대표적인 모델들을 디자인하여 명성을 날리던 호이어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969년 호이어가 브라이틀링과 함께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만들던 시기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1970년 잭 호이어가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사용하여 최초의 방수 '사각형 크로노그래프'인 몬자를 만들었다. 이 시계를 스티브 맥퀸이 출연하는 영화 '르망'에 제공하기로 했을 때 미국에 있던 잭 호이어를 대신하여 스위스에서 시계를 가지고 할리우드까지 달려갔던 열성 직원이기도 했다.
호이어에 근무할 때부터 크로노그래프에 관심을 가지게 된 랑은 탁상시계부터 회중시계는 물론 손목시계까지 700개의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크로노그래프를 수집했다. 1993년에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에 대한 책을 출판할 정도로 크로노그래프의 역사에 탐닉하게 된다. 직장에 취업하자마자 자신이 업무인 크로노그래프에 제대로 미쳐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호이어의 파산으로 직업을 잃자 1983년에 독일의 뮌헨에서 기계식 시계만 만드는 크로노스위스를 창업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창업한 1세대 시계기술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성공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성공은 창업 후 6년이 지난 45살이 되었던 1988년 레귤레이터 모델을 발매하면서 시작된다. 레귤레이터는 시간, 분, 초침을 별도의 다이얼로 표현하는 시계이다. 스탠드 시계에서는 시간을 맞추기 위한 기준 시계(레귤레이터)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던 방식인데 손목시계에서는 처음이었다. 센터에 배치되는 시침을 12시 방향의 섭다이얼에 표현하기 위해 무브먼트의 다이얼 측의 구성을 변경해야 한다. 타임 온리 시계이면서 크로노그래프의 다이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디자인과 이 무렵부터 등장하는 크로노스위스의 독특한 베젤과 러그 디자인 및 어니언 크라운으로 불리는 개성 있는 크라운 디자인으로 그해 바젤 페어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90년에는 그가 창업 초기에 다량으로 구입해 두었던 애니카의 무브먼트(크로노스위스 칼리버 122)를 사용한 자동 모델이 출시되게 된다. 거루트 랑의 솔직함은 이 무렵부터 시작된다. 기자들의 질문에 거루트 랑은 그 무브먼트가 1970년대 애니카의 자동 무브먼트라는 것을 사실대로 밝혀버린 것이었다. ETA를 구입하여 시계를 만들면서도 인하우스 무브먼트라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던 스위스의 저명 브랜드들과 전혀 다른 솔직함이었다.
마빈(Marvin)의 무브먼트(크로노스위스 칼리버 111)을 사용한 크로노스위스의 엔트리 모델 오레아(Orea)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수동 시계로 한 동안 시계 마니아들에게 인기 제품이었다. 이 무렵부터 크로노스위스의 무브먼트 피니싱은 블랑팡의 7002 못지않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크로노스위스는 거의 모든 제품을 디스플레이 백(케이스 백에 유리를 설치하여 무브먼트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으로 제작하여 디스플레이 백의 시초로 인정되고 있다. 블랑팡의 7002 정도의 피니싱은 아니었지만 같은 가격대에서 이 정도의 피니싱을 하는 브랜드는 전무했다.
디스플레이 백은 무브먼트의 품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므로 프레드릭 피게의 최상급 무브먼트를 사용하던 블랑팡조차 모든 제품에 시도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계식 시계가 쿼츠 시계와 경쟁하는 방법이 무브먼트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모든 제품에 걸쳐 실천한 브랜드였다. 1990년대에도 델피스, 파토스 등 다양한 신모델을 오메가 정도의 가격에 판매했다. 인하우스 무브먼트로 논쟁을 벌이던 시대에 랑의 솔직함은 시계의 실질적인 품질에도 불구하고 빈티지 시대에 중급 이하의 평가를 받았던 애니카며 마빈의 무브먼트, 티솟이나 해밀턴도 사용하는 ETA 7750을 베이스 무브먼트로 사용한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창조한 개성적인 시계 디자인이며, 정직하고 성실한 피니싱으로 크로노스위스의 시계들은 다른 브랜드의 시계들의 가성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화려한 출발과 함께 10년 만에 스와치로 넘어간 블랑팡과 달리 창업 후 5년간 다른 브랜드에 시계를 납품해 가며 충분한 준비기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준비기간을 거쳐 1988년 바젤 페어에서 레귤레이터라는 개성적인 모델과 크로노스위스만의 케이스와 크라운 디자인을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빠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성장하며 생산량을 조금씩 늘려가며 기계식 시계가 완전히 부활한 2012년까지 큰 어려움 없이 회사를 성장시켰다. 그 후 가업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어 은퇴하면서 오랫동안 크로노스위스에 관심을 보이던 스위스인 올리버 엡스타인(Oliver Epstein)에게 매각했다. 그 후 크로노스위스는 현재까지 독립 브랜드로 유지되는 중이다. 하지만 게르트 랑이 떠난 이후 크로노스위스는 더 이상 시계 잡지와 마니아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버렸다. 도리어 10년 후 자신의 후배를 지원하기 위해 잠시 등장한 게르트 랑이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랑은 창업 초기 팔지 못하고 남은 애니카의 자동 무브먼트와 마빈(Marvin)의 수동 무브먼트(칼리버 700)를 고철 가격에 대량으로 구매했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 공들여 피니싱하여 판매했기 때문에 그가 30년 동안 시계를 제조하고도 마빈의 수동 무브먼트는 엄청난 양이 남아 있었다.
2022년 'Lang 1943'이라는 모델로 2차 대전 당시 군용 시계를 모델로 하는 섭세컨드(초침이 6시 방향의 섭 다이얼에 있는 시계) 모델이 발매되면서 10년 만에 다시금 시계 잡지에 등장하게 된다. 1943은 바로 게르트 랑이 출생한 연도이다. 새롭게 등장한 시계는 랑을 모델로 했지만 독일에서 새로 창업한 소규모 공방 수준의 회사였다. 사용하지 못하고 남은 마빈 무브먼트를 이용하여 등장한 시계였으므로 랑은 그를 존경하는 독일인 후배를 위해 잡지에 딸과 함께 등장하게 되었다.
랑이 크로노스위스로 명성을 날리던 1995년 발표한 크로노스위스의 가장 고가의 모델이 Opus라는 모델이었다. 캡트가 설계했던 밸쥬 7750을 스켈레턴으로 만들었던 자동 크로노그래프였다. 스켈레턴은 고가의 슬림한 무브먼트로 슈퍼 하이엔드에서나 만드는 시계였다. 그런데 게르트 랑은 과감하게 대중적인 자동 크로노그래프인 밸쥬 7750으로 스켈레턴 모델을 발매했던 것이다.
밸쥬 7750이 당시 스위스 자동 크로노그래프면 어느 브랜드에서도 사용하는 범용 무브먼트였으므로 랑의 오퍼스는 오랫동안 이런저런 논란이 되었다. 게르트 랑은 비버에 비하면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첫 번째 직장은 그가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로 돌아가 호이어의 서비스센터를 운영했지만 이마저도 호이어가 파산하며 그만두어야 했다. 비버가 오메가에서 사직하고 블랑팡으로 슈퍼 하이엔드에 도전했을 때 게르트 랑은 자신의 브랜드로는 팔기 어려운 시계들을 만들어 이름 있는 브랜드들에 납품하며 작지만 흔들림 없이 성공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