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링고 Oct 22. 2022

오메가와 SSIH

오메가의 전성시대

고급시계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선전하고 전 세계적인 판매망을 만드는 것이 자국 시장이 작고 경쟁업체들이 난립한 스위스 업체들의 숙명이었다. 이에 비하면 수출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 내의 판매만 늘리면 되는 미국이나 일본은 시계 사업을 하기에 편한 나라였다.


1920년대 오랫동안 계속된 장기불황과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스위스 시계 업체들의 대부분이 이익 크게 감소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고객들이 가난해 지자 오메가나 론진처럼 고급 시계를 만드는 회사들이 더 힘들었다. 1901년 850만 개의 시계를 제조하던 스위스는 1913년 1,400만 개로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1921년에는 790만 개로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메가는 1923년 가장 강력한 경쟁업체인 론진과의 통합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시계를 만드는 론진과의 통합은 아무런 시너지 효과도 없었다. 결국 오메가는 1925년 티솟과 협상을 시작하여 1930년 티솟의 사장인 폴 티솟에게 오메가의 경영을 맡기는 조건으로 지주회사를 만들어 통합하게 된다. SSIH의 출발이며 오메가가 세계 최고의 시계로 등극하는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메가는 고급 시계의 제조에 집중하고, 티솟은 그보다 저가의 시계들을 판매하며 무브먼트 제조를 부분적으로 통합하여 생산단가를 줄이고, 오메가와 티솟이 별도로 확보해 온 판매망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경영을 티솟의 사장이던 폴 티솟에게 일임하고 오메가는 제품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1932년 스톱워치 제조업체이자 크로노그래프 에보슈 업체였던 레마니아가 합류하게 되며, 1932년 로스 엔젤리스 올림픽의 공식 계측 업체(official timekeeper)로 선정된다. 올림픽의 공식 계측 업체가 선정된 첫 번째 올림픽이었다. 1920년에서 1928년까지 올림픽 공식 계측 업체는 없었으나 스톱워치 전문 업체였던 호이어(Heuer)가 개발한 '마이크로그래프'라는 스톱워치가 사용되었다. 1932년 이후 오메가는 올림픽 공식 계측을 전담하여 기술의 오메가라는 역사도 만들게 된다.


또한, 이때 레마니아가 SSIH에 합류함으로써 1969년 문와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1942년 레마니아는 당시 가장 작은 수동 크로노그래프인 레마니아 2310(직경 27밀리)을 개발하게 되고 오메가에서 1957년에 개발한 씨마스터 케이스에 사용되어 오메가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Moonwatch'가 만들어진 것이다. 



SSIH로 통합된 후 1938년 오메가의 상징적인 수동 무브먼트인 30밀리 칼리버(1963년까지 300만 개 생산)가 개발된다. 이 무브먼트로 오메가는 수많은 천문대 경연에 참여하여 론진, 제니스 등과 경쟁하여 높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또한, 1941년 오메가 최초의 손목시계 크로노미터로 판매되고, 2차 대전과 그 이후 영국군에만 11만 개가 군용 시계로 납품되는 등 개발 이후 25년간 오메가의 빵과 버터와 같은 무브먼트였다. 1952년에는 자동 크로노미터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 등장하게 된다. 자동 무브먼트의 전성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오메가를 상징하는 시계이다.


오메가의 콘스텔레이션은 1966년 스위스에서 COSC가 설립되기 이전 B.O.로 불리던 스위스의 공인 검정 기관에 제조 번호순으로 10만 개의 무브먼트를 제출하여 하나의 탈락도 없이 모두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다. 오메가의 자동 크로노미터를 대표하는 시계이다. 시계의 케이스 백에는 오메가가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에서 탁월한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상징하는 천문대 문양도 각인했다.



이 무렵 오메가는 롤렉스를 경쟁상대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부터 1950년까지 롤렉스가 마케팅 목적으로 거의 혼자 참여하던 B. O. 크로노미터 인증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이 콘스텔레이션을 발매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어큐트론 시계 발매에 집중하기 직전인 1971년까지 20년간 오메가는 롤렉스의 인증 기록을 넘어서게 된다. 후발주자였지만 급격히 성장하던 롤렉스의 마케팅 방식에 동참하여 마음만 먹으면 무한대의 인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론진과 제니스는 기술력을 겨루는 올림픽과 비슷한 천문대 경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제조원가만 높이는 크로노미터 인증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오메가는 1957년에는 롤렉스와 경쟁할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듯 오메가 트릴로지로 불리는 '씨마스터', '스피드마스터', '레일마스터'를 발표했다. 이 시계들이 중요한 것은 스테인리스 케이스와 브라슬렛으로 상징되는 스포츠 모델들의 주요 대상이었던 다이버 시계, 내자성 시계, 크로노그래프에 대해 통일성 있는 모델들을 발표하여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던 롤렉스와 경쟁할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1957년 트릴로지 발표 이후에도 오메가는 1960년대를 통해 롤렉스의 섭마리너와 비교될 씨마스터의 후속 모델들을 1967년까지 지속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또한 레마니아에서 개발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들을 사용하여 스피드마스터를 포함하여 브라슬렛을 장착한 스포츠 크로노그래프 시계들도 다양하게 출시하게 된다. 레마니아와의 통합이 가져온 오메가만의 강점이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론진이 오메가와 롤렉스에 뒤쳐지게 된 이유는 스포츠 모델에 대한 무관심과 그에 따른 개성 없는 마케팅이었다. 론진의 역사에 없는 것이 1950년대 롤렉스 섭마리너와 오메가 씨마스터 300으로 상징되는 브라슬렛 다이버 시계의 역사이다. 오메가는 1961년 다이버 시계에서 롤렉스, 오메가와 비견될만한 역사를 가진 블랑팡을 제조하던 빌러레(Villeret)의 레이빌(Rayville)을 인수하게 된다. 오메가는 1957년 브라슬렛이 장착된 씨마스터 300을 발표하고 지속적으로 씨마스터 300을 개량하는 중이었으므로 아무런 시너지 효과도 없는 시계였다. 그 결과 블랑팡의 피프티 페이톰스(Fifty Fathoms)는 사장되어 버렸다. 



피프티 페이톰스의 페이톰(fatom)은 6피트의 깊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50 페이톰스는 300 피트 즉, 91.4 미터의 잠수 깊이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시계는 롤렉스와 오메가 보다 빠른 1952년 개발되어 미국 해군과 독일 해군에도 납품되었던 군용 다이버의 전설적인 시계이다. 1961년 블랑팡이 오메가가 아닌 론진으로 인수되어 개성적인 디자인을 가진 피프티 페이톰스를 통해 다이버 시계에 진출했더라면 론진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1970년대까지 오메가나 롤렉스에 뒤지지 않는 최상급의 무브먼트를 만들면서도 론진을 상징할 만한 디자인은 만들지 못했던 론진에 대한 아쉬움이 그런 상상을 하게 한다. 



롤렉스는 창업 초기부터 오이스터로 상징되는 방수 기능과 이를 이용한 마케팅에서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며, 제품 디자인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길을 택하여 결국 스위스 고급 시계의 최종 승자가 된 것이다. 1950년대 이후 론진의 빈티지 시계들을 보면 크로노미터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지만 손목시계의 주요 테마였던 방수 기능보다는 슬림하고 정확한 정장용 시계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시기에 론진의 광고들은 스포츠를 테마로 할 때에도 강건해 보이는 케이스와 스테인리스 브라슬렛이 아닌 슬림한 가죽 시계인 '엘레강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역사로부터 론진은 극한의 스포츠 시계(tool watch) 개발에 몰두한 롤렉스나 오메가가 아닌 슬림하고 정확한 시계를 제조하던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과 경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 년에 수십만 개의 시계를 제조하면서 클래식한 디자인의 시계들만 계속 발표한 것이다. 당시 유행이 시작되던 스포츠 모델에 대한 론진의 무관심이 경쟁상대인 오메가, 롤렉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진 가장 궁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론진 이후 비행 시계로 유명해진 브라이틀링을 보아도 론진이 린드버그와 윔스를 개발한 이후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를 활용하여 비행에 특화된 더 다양한 모델을 개발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쿼츠 개발에 집중하면서 론진이 마지막까지 도전한 것은 정확하고 얇은 시계(VHP)였다. 창업 초기부터 경쟁자가 없을 정도의 무브먼트를 만들어 왔던 역사 때문인지, 론진의 관심은 정확성과 슬림함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시계니까 소비자들이 알아서 고르겠지... 이런 생각이었을까?



제니스는 론진이나 오메가에 비하면 후발주자였고 천문대 경연을 통해 이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것도 1950년대였다. 그러나 제니스는 창업 초기 롤모델이었던 론진을 모델 삼아 정장용의 크로노미터 시계 제조와 판매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이미 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오메가는 물론 론진을 앞설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01년 가장 늦게 창업한 롤렉스가 공식 인증을 선전하는 크로노미터 다이얼, 탁월한 방수 기능을 가진 케이스와 브라슬렛을 특징으로 하는 스포츠 모델을 기반으로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론진이나 제니스의 기대와 달리 소비자들의 관심이 스포츠 모델로 쏠리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에는 롤렉스 vs 오메가의 구도가 정착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제니스는 다른 브랜드들이 어큐트론 이후 쿼츠 개발에 집중하던 시절 자동 크로노그래프 개발에 몰두하여 1969년 쿼츠 혁명이 시작되던 그 해에 호이어-브라이틀링-해밀턴 연합, 일본의 세이코와 함께 세계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엘 프리메로'(스페인어로 '처음'을 의미)로 불리는 현재 제니스를 대표하는 무브먼트이자 시계의 이름이다. 50년 이상 론진, 오메가와 크로노미터로 경쟁하던 이미지와는 달리 회사가 도산할 무렵 만들어 몇 년 후 생산이 중단되었던 무브먼트가 현재까지 제니스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것은 쿼츠 혁명이 가져온 의외의 결말이다.


쿼츠 시대 이후 제니스의 운명은 모바도를 인수한 그린버그의 이야기에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1971년 미국 라디오 제조 회사인 '제니스 라디오'에 인수되었다가 1978년 스위스의 딕시라는 무브먼트 제조 설비 회사로 매각되었다. 그리고, 1999년 LVMH 그룹으로 넘어가 현재 LVMH 그룹에서 태그 호이어와 함께 시계 분야의 주력 기업이 되어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태그 호이어의 전신인 호이어보다는 생산량이 많은 오메가와 론진급의 대기업이었지만 현재 LVMH의 간판 브랜드는 태그 호이어이다. 제니스에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상징적인 모델이 없는 탓이다.



손목시계의 시대는 회중시계의 시대와 달리 무브먼트보다는 시계의 디자인이 더 중요한 시대였다. 호이어는 비록 스톱워치에 특화된 소규모 회사였지만 마지막 주인이었던 잭 호이어가 1960년대에 아우타비아, 카레라, 몬자, 카마로 등 롤렉스의 섭마리너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와 경쟁할 만한 매력적인 디자인을 만들었던 것이 LVMH의 간판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 이유이다. 

작가의 이전글 론진의 전성시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