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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롤렉스에서 생긴 일


쿼츠 혁명 이후 롤렉스는 단일 브랜드로 비교해서는 경쟁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고 시계 그룹들과 비교해야 비로소 스와치 그룹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로 내려가는 세계 최대의 단일 브랜드이다. 3위가 리치몬트 그룹이다. 롤렉스의 시작은 정확한 시계를 의미하는 '크로노미터(Chronometer)'였다.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유행이 변하는 것을 방해한 것은 작은 무브먼트의 부정확성이었다.


손목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은 무브먼트가 필수적이었지만 작은 무브먼트는 부정확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돈 많은 소비자들은 여전히 회중시계를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목시계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윌즈도프는 손목시계도 정확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작지만 정확한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이어 '정확함(Precision)'이라는 문구를 다이얼에 사용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회중시계들이 출전하는 천문대 경연에 손목시계 무브먼트로 참여하여 회중시계급의 성적표를 얻었다. 그리고, 1927년에 스위스 비엔에서 처음 시작된 손목시계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아 손목시계 다이얼에 제일 먼저 크로노미터(Chronometer) 표기를 하게 되었다.



1951년 오메가가 롤렉스를 견제하며 대량으로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기 전인 1927년 ~ 1950년까지는 전체 인증의 80~90%를 롤렉스가 차지할 정도로 비엔에서 설립한 크로노미터 인증기관은 손목시계로 제한하면 롤렉스 무브먼트의 정확성을 인증하는 롤렉스 출장 사무소 같은 곳이었다. 롤렉스의 첫 번째 도전은 손목시계 크로노미터였고, 이 목표를 달성하면서 롤렉스는 창업 20년 만에 정확성에서는 오메가, 론진, 제니스와 대등한 브랜드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오이스터(1926)와 퍼페츄얼(1931)의 끊임없는 개량을 통해 1950년대에 이들을 앞서 나가게 되었다.


롤렉스 오이스터


1920년대 초 손목시계가 부주의한 소비자들조차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생활 방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자 방수 크라운 관련 특허를 구입하여 경쟁에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나사 체결식 밀폐 케이스와 스크루다운(나사 체결) 크라운으로 오이스터는 완성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용하는 무브먼트가 수동 무브먼트라 매일 밥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매일 아침 크라운을 풀러 밥을 주고 혹시라고 크라운의 나사를 잠그는 것을 까먹으면 방수 기능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계 밥을 줄 일이 없도록 자동 무브먼트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자동 무브먼트 개발은 당시 막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라 윌즈도프에게 크로노미터 다음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도전이 되었다.


롤렉스의 초창기 자동 무브먼트 분해 사진


창업 이후 롤렉스에 줄곧 무브먼트를 공급하던 에이글러(Aegler)와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하면서도 그동안 쌓아온 수동 무브먼트 기술인 정확성을 잃지 않기 위해 수동 무브먼트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동 와인딩이 가능하면서 먼지의 유입까지 막도록 로터(rotor)를 무브먼트에 뚜껑처럼 덮는 방식의 와인딩 기구를 개발했다. 그 결과 롤렉스와 에이글러가 개발한 자동 무브먼트는 오메가, 론진, 제니스 등 경쟁회사들에 비해 두꺼웠다. 


롤렉스의 케이스와 무브먼트


더구나 이 두꺼운 무브먼트로 당시의 보편적인 손목시계 사이즈였던 28~30밀리로 만들다 보니 작은 시계가 뚱뚱해졌다. 디자인만으로 감출 수 없는 두꺼움이 결국 케이스 백을 볼록하게 만들게 된다. 롤렉스에서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1933년에서 1944년까지 만들어진 오이스터 퍼페츄얼을 켈럭터들은 '버블 백(Bubble Back)'이라고 부른다. 


롤렉스에게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다가 경제공황기인 1931년에는 영국 파운드화의 폭락으로 수출물량이 전년도의 삼분의 일로 감소하는 타격을 입게 된다. 윌즈도프는 파리, 아르헨티나, 이태리, 남미와 일본까지 돌아다니며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서게 된다. 덕분에 수많은 스위스 브랜드들이 도산했던 1930년대에 연 3만 개를 판매하는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해외 시장을 쉽게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집중해서 개발한 크로노미터 덕분이었다. 당시 손목시계의 품질은 정확성이었고, 공인기관의 크로노미터 인증은 이를 증명해주는 서류였다. 당시 롤렉스는 오메가나 론진 같은 지명도는 없었지만 공인기관의 인증서가 롤렉스의 품질을 보증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5년 롤렉스의 40주년 기념시계인 롤렉스의 'Date Just'가 발표되었고, 40주년을 기념하는 '쥬빌리 브라슬렛'과 함께 롤렉스의 브라슬렛 자동 방수시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윌드도프는 1926년 오이스터 방수 케이스를 완성한 후 마케팅에 집중하여 롤렉스 매장에서 시계들을 어항 속에 전시하고, 롤렉스 시계를 사용하는 유명인들(말콤 캠벨 등)의 동의를 얻어 유명인의 사진과 함께 시계를 선전하는 롤렉스만의 탁월한 마케팅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 이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선전하여 명성을 얻는 것이 윌즈도프의 영업방식이다. 사업가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를 윌즈도프처럼 실천하는 경쟁자가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5만 번째 크로노미터를 받게 되면서, 이를 기념하여 2차 대전중 중립국인 스위스를 침공한 나치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스위스의 영웅이었던 앙리 기상(1874-1960) 장군에게 선물한다. 1947년에 10만 번째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시계는 영국의 처칠에게 선물했다. 1951년 15만 번째 크로노미터를 인증받자 2차 대전에서 5성 장군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끈 미국의 아이젠아워 장군에게 선물하게 된다. 2차 대전의 영웅들에게 차례로 선물한 것이었다. 1952년 아이젠아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1956년 데이-데이트의 '프레지던트' 브라슬렛이 탄생하게 된다. 선물한 시계는 데이트 저스트 모델이었다. 당시 롤렉스의 최상급 골드 시계인 것은 같다.



데이 저스트와 데이-데이트는 롤렉스가 1933년부터 개발해온 모든 기술의 집합체인 오이스터 퍼페츄얼(방수 자동시계)이 진화해온 결과로 탄생하게 된 디자인이다. 현재까지도 롤렉스는 1950년대에 완성된 오이스터 퍼페츄얼의 기본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을 원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지루한 브랜드이고, 보수적인 소비자들에게는 변함없는 롤렉스이다. 롤렉스만이 가진 매우 특별한 역사이고 그것이 현재의 롤렉스를 만든 것이다.


쿼츠 혁명기를 다루면서 롤렉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롤렉스는 쿼츠 혁명기 20년에 걸쳐 진행된 '얇은 시계 전쟁'에는 일부 참여했지만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쿼츠 시대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롤렉스를 표현한다면 스위스에서 최초로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인 '베타 21' 개발에 참여하여 1969년에 바젤 페어에서 스위스 최초의 쿼츠 시계를 발표한 16개 브랜드의 하나였으며 첫 물량으로 준비된 6,000개 중에 가장 많은 수량인 1,000개나 주문한 돈 많은 브랜드였다.


롤렉스의 첫 쿼츠 시계 Ref. 5100 (베타 21 쿼츠)


그리고 천 개밖에 안 되는 고가의 첫 쿼츠 시계를 중요한 고객들에게만 귀띔하여 판매했다. 그런데 의외로 판매가 지지부진하고 반응도 별로 좋지 않았다. 전부 판매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고 한다. 집적회로를 사용하지 않은 베타 21의 크기(가로 33, 세로 37, 두께 6.2 밀리)가 컸으므로 시계 역시 40 밀리로 당시로서는 너무 큰 탓이었다. 작고 얇은 시계가 유행하던 시절에 40 밀리에 두께도 10 밀리나 되는 큰 시계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던 것이다.


파텍 필립과 오데마 피게의 베타 21 시계


롤렉스보다 적은 수량만 판매했던 파텍 필립은 1968년부터 칼라트라바를 이을 대표 제품으로 예정한 '골든 엘립스' 모델을 크게 만들어서 42 밀리가 되었고, 오데마 피게는 베타 21에 맞추어 그나마 작은 시계로 만들었지만 두껍고 큰 시계였다. 이 때문에 베타 21을 사용한 시계들은 높은 가격과 함께 큰 인기가 없었다. 작은 시계를 목표로 개발했던 '골든 엘립스'의  베타 21 버전은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그랜드 엘립스'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스위스의 주요 브랜드들이 이후 개별적으로 자신들에게 적합한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되는 이유이다. 작고 얇거나, 작고 정확한 쿼츠 무브먼트.


롤렉스 오이스터 쿼츠


롤렉스는 자신들의 대표 제품인 '데이트 저스트'와 '데이-데이트' 모델의 크기에 맞으며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기 위해 스위스에서 가장 정확한 쿼츠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1975년에 케이스 디자인까지 마치고 자동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시제품을 만들어 판매한 후 1977년에 첫 쿼츠 시계를 '오이스터 쿼츠'로 표기하여 대표 모델인 '데이트 저스트'와 18K 전용 모델인 '데이-데이트'의 판매를 시작한다.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했지만 기존의 '데이트 저스트', '데이-데이트'와 같은 36 밀리 시계였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된 오이스터 쿼츠는 다른 브랜드들과 달리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까지 받았지만 베타 21 쿼츠 시계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후 2000년 초까지 판매되었지만 약 25년간 25,000개 정도 판매되었다. 1년에 약 천 개 정도만 판매된 것이다. 당시 롤렉스는 1년에 50만 개 이상을 판매하던 회사였으므로 1,000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판매량이었다.


롤렉스 첼리니


롤렉스의 입장에서는 쿼츠 시계보다 얇고 작은 시계의 인기를 예상하고 만든 첼리니 시계들의 판매량이 더 많았다. 첼리니도 쿼츠보다는 수동 시계가 더 많이 팔리게 된다. 쿼츠 시대의 최절정기에 생긴 일들이다. 1980년대 초까지도 성공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던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의 판매량도 1980년대 중반부터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쿼츠가 아닌 기계식 모델들의 판매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계식 시계가 부활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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