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카르티에는 '파샤'를 처음 출시하며 롤렉스의 대표 제품인 '데이-데이트' 처럼 18K 금시계로만 출시했다. '파샤'의 컨셉은 카르티에 역사에는 없었던 '방수 시계'였다. 더구나 회전 베젤까지 설치했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가 아닌 롤렉스의 섭마리너에 해당하는 시계를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의 전통적인 구성인 골드에 스트랩으로 출시한 것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모델이다. 파텍 필립과 오데마 피게가 골드 스트랩 시계에 안 팔려서 롤렉스 데이트 저스트 같은 스테인리스 스포츠 모델을 개발한 것인데 카르티에는 도리어 골드 스트랩 시계를 출시한 것이다. 대신 시계의 사이즈에 맞추어 스트랩도 일반 가죽 스트랩과 달리 두툼했다.
더구나 페랭이 선택한 크기는 38 밀리였다. 롤렉스 데이트-저스트보다 2밀리 큰 시계였다. 시계의 크기에서 2 밀리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차이였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가 38 밀리의 크기 때문에 고전했고, 베타 21의 쿼츠 시계들도 40 밀리에 육박하는 크기 때문에 실패했는데, 페랭은 38 밀리의 두꺼운 다이버 시계를 만든 것이다. 루이 카르티에와 무관한 첫 시계였다. 페랭이 다이버 시계 컨셉이면서 브라슬렛 없이 스트랩의 18K 모델을 출시한 시기는 블랑팡, IWC, 율리스 나르당, 프랭크 뮬러 등이 컴플리케이션으로 경쟁하던 시절이다.
페랭이 읽은 1980년대의 컴플리케이션 전쟁은 1970년대에 얇은 시계 전쟁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럭셔리와 패션 전쟁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모바도 그룹의 창업자인 그린버그가 읽었던 '성공의 상징'인 골드 시계와 분더만이 성공시킨 패션 시계 '구찌 2000'이 시작한 패션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디오르 디자이너의 말처럼 시계에 '시간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블로바는 디자이너의 그런 대답이 신기하여 이를 광고에 사용하면서도 그 말이 '시계의 미래'라는 것을 읽지는 못했던 것이다. 1970년대의 유행이 작고 슬림한 것이었지만 1980년대에 이 유행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카르티에를 통해 시계와 패션 사업을 병행하던 페랭은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샤의 발표는 럭셔리 패션 시계의 등장이지 다이버 시계가 아니다. 1990년대에 유행하게 될 스포츠 패션을 도입한 골드 시계였다.
1970년대에 고전하던 로열 오크나 노틸러스와 달리 페랭이 발표한 파샤는 발매 직후 인기 시계가 되어 다양한 모델들이 매년 새롭게 발표될 정도로 카르티에의 새로운 고급 모델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의 38 밀리의 시계에 적응한 소비자들에게 얇고 작은 탱크보다 18K의 큰 시계인 파샤가 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소비자들이 파샤에 열광하는 사이 충분히 판매한 버메일 탱크는 은근슬쩍 자취를 감추게 된다. 카르티에의 프레스티지를 높여야 할 타이밍인 것이다.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은 무브먼트가 복잡한 만큼 크고 두꺼울 수밖에 없는 시계들이며 당연히 엄청나게 비싼 시계들이다. 아무나 구입할 수 없는 최고가의 시계들이다. 즉 머스트 카르티에로 성공을 거둔 페랭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럭셔리'이지 컴플리케이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1980년대에 너무 흔해진 얇은 시계의 시대는 지나가고 두껍고 큰 시계의 유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럭셔리는 브랜드의 프레스티지이고, 유행하는 패션은 로열 오크로 상징되는 스포츠 시계, 그리고 컴플리케이션 시계처럼 두꺼운 시계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탱크, 베누아 등 1980년대 중반까지도 유행하던 얇고 작은 머스트 카르티에의 판매량이 감소하는 것을 매일처럼 확인하던 페랭이었기에 소비자들의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IWC와 JLC를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참전시키며 기계식 시계의 부활 가능성을 본 블륌레인이 IWC의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을 지연시키며 랑에를 창업하게 된 것도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얇고 작은 것이 아니라 럭셔리이며 프레스티지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IWC의 프레스티지를 수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올리기보다는 처음부터 파텍 필립 같은 프레스티지를 새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발표한 랑에의 대표 모델인 '랑에 1'의 특징도 정장용 시계치고는 큰 직경 38.5 밀리에 두께 9.8 밀리의 시계였다. 시대의 대세인 자동도 아닌 수동 시계이면서도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두께의 시계였다.
대신에 다이얼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디자인이며 시스루 백이 장착된 케이스 백을 통해서는 3/4 플레이트의 새로운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등장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동독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사라졌지만 세계 대전 전까지 독일 최고의 시계였던 랑에를 등장시키기 위한 복선이다. 처음 보는 화려한 무브먼트에 대해 기자와 소비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설명을 위해 전쟁 때문에 서독으로 피신해야 했던 발터 랑에의 불행했던 시절과 전쟁 전에 랑에 가문이 만들던 회중시계들이 소개된다. 당사자인 발터 랑에의 인터뷰들이 잡지 기사로 실리게 된다. 사라졌던 럭셔리한 브랜드에 딱 맞는 스토리텔링이다. 독일의 파텍 필립이 부활한 것이다.
'랑에 원'(Lange 1)이 발표된 1994년이 기계식 시계 부활을 완벽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이런 종합적인 의미이다. 정장용 시계로는 큰 38밀리대의 시계, 독일 최고의 시계를 만들던 클라슈테와 랑에의 화려한 역사가 선사하는 파텍 필립과 대등한 프레스티지, 처음 보는 독특한 다이얼 그리고 고급스러운 무브먼트의 조합이다. 그리고 엔트리 모델조차 파텍 필립보다 비싼 시계이다. 시계의 다이얼과 무브먼트가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패션이다. 이후 등장하는 글라슈테의 시계들은 블륌레인이 시작한 유행에 따라 시계 디자인은 달라도 무브먼트만은 전부 3/4 플레이트의 디자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패션에 대한 성공의 척도는 유행이다.
세 사람 중 가장 불리했던 젊은 독립제작자인 프랭크 뮬러가 읽어낸 것도 컴플리케이션 마스터의 이미자로 만들어낸 '프레스티지'와 생트레 커벡스와 아르데코로 상징되는 새로운 패션의 결합이었다.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 컴플리케이션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고 매년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발표하여 만들어진 프레스티지와 20세기 초에 유행하고 사라진 토노형 케이스와 팝아트 같은 아르데코 다이얼의 결합이 프랭크 뮬러가 단기간에 성공을 거둔 이유였다. 프랭크 뮬러는 프레스티지만으로는 부족했고 유행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발표한 시계들은 전부 큰 시계들이었다. 그리고 자본이 부족했던 프랭크 뮬러가 단기간에 엄청난 물량을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은 ETA 덕분이었다.
오메가, 론진과 제니스가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IWC처럼 이들도 오랜 기간 골드 시계를 만드는 대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스테인리스 시계 제조에 집중했던 것이다. 롤렉스는 그 점에서 이들과 달랐다. 롤렉스는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지 않는 대신 최상위의 모델은 언제나 골드 시계로만 판매했다. 1945년 롤렉스의 DNA인 '오이스터 퍼페츄얼'(자동 방수 시계)과는 날자창을 가진 것만 다른 '데이트 저스트'를 발표하고 오랫동안 골드 모델로만 판매했다. 1956년 데이트 저스트 보다 고급 시계인 '데이-데이트'가 등장할 무렵 데이트 저스트에 스틸 모델이 등장하게 되고 대신에 최상급의 모델인 '데이-데이트'는 '프레지던트(president)' 브라슬렛이라는 골드 브라슬렛을 세트로 하여 파텍 필립이나 바세론 콘스탄틴의 컴플리케이션 가격에 판매했다. 컴플리케이션 대신 그 가격에 해당하는 금덩이를 판매한 것이다. 남성용 시계의 다이얼과 케이스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하면 더 비싼 '데이-데이트'가 만들어진다.
롤렉스는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지 않고도 최고급 시계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린버그가 시작하기도 전에 신분의 상징은 멀리서도 쉽게 보이는 올 골드 시계와 시계의 페이스에서 빛나는 다이어먼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비버가 오데마 피게를 그만두고 오메가에 입사했을 때 주어진 임무가 오메가의 골드 시계를 판매하는 마케팅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골드 캡이며 금도금 시계를 많이 판매해서 골드 시계를 제조해도 소비자들이 도금 시계와 혼동했던 것이다. 론진이나 제니스가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한 일도 강력한 경쟁자인 오메가를 따라 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에 이 브랜드들이 판매했던 빈티지 시계들은 얇기만 했을 뿐 파텍 필립, 바세론 콘스탄틴, 롤렉스 같은 럭셔리한 금시계가 아니었다. 골드 시계도 도금 시계로 보이는 브랜드에서 어떤 프레스티지를 느낄 수 있겠는가? 도미니크 페랭이 파샤를 발표하면서 버메일 시계들의 생산을 줄여나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블륌레인이 IWC와 JLC의 사장이 된 후 시작한 것이 1980년대에 개성 없이 미투 시계들로 혼잡한 모델들 중에서 대표 모델을 찾고 매년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는 일이었다.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고 컴플리케이션을 통해 프레스티지를 확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프랭크 뮬러가 이들보다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선풍을 일으키게 된 것은 IWC나 JLC 같은 과거의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통해 곧바로 하이엔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블륌레인과 프랭크 뮬러는 경쟁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랑에와 달리 2000년대 중반 가장 성공한 시점에서 몰락하게 되는 과정은 동업자인 시르마케와 분란을 일으키다가 도리어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고, 한편으로 컴플리케이션이 아닌 생트레 커벡스에는 론진이나 티솟이 사용하는 ETA 2892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프레스티지는 이미지 관리에 실패하면 순식간에 몰락하는 법이다. 무수히 라이선스를 남발한 피에르 가르뎅에게서 샤넬이나 아르마니같은 프레스티지를 느낀 수 없는 것과 같다.
니콜라스 하이에크가 스위스의 대부분의 에보슈 업체들을 ETA로 통합하게 되면서 정부의 압력에 의해 스위스 브랜드들에게 마지못해 주게 된 선물이 스위스 에보슈 업체에서 만들어온 수백 가지의 무브먼트 중 엄선한 ETA 무브먼트들이었다. IWC도 밸쥬 7750 덕분에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즉시 승선하여 슈퍼 컴플리케이션까지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을 중단했던 수많은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ETA 덕분에 급격히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니콜라스 하이에크를 화나게 만든 건 ETA로 돈을 벌면서 도금만 바꾼 무브먼트를 '인하우스 무브먼트'로 발표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분신술 때문이었다. IWC, 프랭크 뮬러, 율리스 나르당 등 ETA 무브먼트를 사용하며 하이엔드를 자처하는 브랜드들에게 전부 'intel inside' 처럼 'ETA Inside'를 각인하도록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