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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9. 2022

패션 시계로 돈을 번다구?

구찌2000과 패션 시계의 성공 신화

블로바의 어큐트론이 그 엄청난 신기술로 2년만에 10만개를 판매하여 베스트셀러가 된지 10년도 되지 않아 2년만에 100만개를 판매한 시계가 등장한다. 그것도 단일 디자인으로 100만개를 판매했다. 파펙 필립은 100년, 롤렉스도 10년은 걸릴 일이었다. 당연히 기네스북에 올랐다. '구찌 2000'이라는 시계이다. 그리고 쿼츠 혁명과는 별 상관도 없던 가방 전문의 구찌 가문에서 진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난다. 설마 시계 때문에???



2021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하고 레이디 가가, 아담 드라이버, 알 파치노가 출연한 '하우스 오브 구찌'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중 알 파치노가 연기한 알도 구찌(Aldo Gucci)는 미국 뉴욕에서 유태인 출신의 스베린 분더만(Severin Wunderman)과 만나며 디오르가 시작한 패션 시계를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만들며 패션 시계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게 된다.


Gucci는 1921년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이태리 투스카니의 플로렌스에서 수입한 여행 가방을 팔면서 시작되어 그 지역의 가죽 장인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중 물자가 부족해지자 캔버스로 만든 가방을 판매하면서 초록색과 붉은색의 밴드에 구찌오 구찌를 상징하는 2개의 G로 구성되는 구찌의 로고가 표시되어 유명해진다.


구찌 가문


영화로 만들어진 구찌 가문의 비극은 구찌오 구찌의 사업을 3명의 아들인 알도, 바스코, 로돌포가 물려받아 미국에 진출하면서 시작된다. 미국 뉴욕의 5번가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던 알도의 아들들이 별도의 구찌 상점을 열고 구찌의 이름을 이용한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가족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1983년 로돌포가 죽자 그의 아들인 마우리지오가 삼촌인 알도와 소송을 벌여 구찌의 경영권을 빼앗게 되고 1986년 알도는 탈세혐의로 1년간 감옥에 가게 된다. 


1988년 마우리지오 구찌(1948-1995)는 자신이 가진 구찌의 지분 중 47%를 바레인의 투자그룹인 인베스트코에 매각하게 된다. 마우리지오는 영화에서 처럼 1995년 밀라노의 사무실 1층 로비에서 이혼한 전처 파트리지아 레지아니(Patrizia Reggiani, 1948~)가 사주한 킬러에 의해 사살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1998년 29년형을 언도받았던 레지아니는 18년간 복역한 후 2016년에 출소했다고 한다. 이는 '구찌2000'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구찌2000은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도 전인 1972년에 판매된 시계이다.


구찌2000의 컨셉 : 가방에서 시계로


1972년 해밀턴이 펄사를 발표하며 쿼츠의 단두대 포커판에 올인했던 시기에 구찌2000이 등장하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 시계에는 해밀턴의 전기 시계나 펄사 같은 고민의 흔적도 없다. 구찌 가방의 디자인을 최대한 시계에 옮긴 것이 전부이다. 표준적인 로마숫자 다이얼에 구찌 브랜드명과 마크가 표시되었다. 구찌를 상징하는 초록과 빨강의 삼색선은 시계 측면에 표현되었다. 아직 무브먼트가 두껍던 시절이라 최상의 선택이었다. 시계를 다소 두껍게 만든 합당한 이유가 되었다. 다이얼에 무한반복 마크를 넣기는 찝찝해서 대신 케이스 백에 큼지막하게 하나 더 넣었다. 매장에서 시계의 어디를 보나 구찌, 구찌, 구찌인 것은 가방과 별반 차이가 없다.


구찌 2000


1972년은 세이코와 스위스 연합이 경쟁하면서 조립할 필요도 없는 쿼츠 무브먼트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굳이 전문적인 시계 기술자 없이도 시계를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다들 불안해 하며 시장을 지켜보던 시절이라 대량 생산한 무브먼트를 살 회사도 없던 시절이다. 그런 시기에 대량으로 구입한다면 ETA, 세이코 등 무브먼트 회사에서 도리어 고맙다며 인사를 드릴 시기였다. 분더만은 바로 그런 시기에 적당히 두꺼웠던 쿼츠 무브먼트로 패션 시계를 상징하는 매력 만점의 시계를 만들었다. 말이 쉽지 이런 것이 진짜 어려운 일이다. 쿼츠 혁명 초기에 쿼츠 기술로 진짜 돈을 번 유일한 시계이다. 1972년 쿼츠 혁명기의 룰렛 게임이 진행되던 시절에 소비자들이 관심을 보였던 시계는 해밀턴의 펄사가 아니라 구찌2000이었다. 당시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베스트셀러가 최고의 가치는 아니지!


이렇게 평가하는 평론가들이 어느 시대에나 꼭 있다. 그래서 시계 역사책에 구찌 2000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돈은 벌었지만 역사적으로 가치가 없는 시계라는 것이다. 기네스북에는 올랐어도 시계의 역사에는 빠진 시계이다. 


구찌 2000은 알도 구찌(1905-1990)로부터 25년간 구찌의 상표로 시계를 독점 생산하기로 계약을 맺은 세베린 분더만이 기획하여 판매한 것이다. 세베린 분더만은 시계 업계에서 기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시계를 분더만이 디자인한 것인지, 알도 구찌의 지시를 받은 구찌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남아 있는 에피소드로 판단하자면 알도 구찌의 지시에 따라 구찌의 이름 모를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던 것같다. 이 시계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도 이 시계가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지, 혹은 디자인이라고 말하기도 민망스러웠던지 자기가 디자인한 거라는 주장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시계의 디자인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다.



1960년대 말 스위스의 소규모 브랜드이자 콩코드처럼 판매자 상표로 시계를 제조하던 알렉시스 바르셀레이(Alexis Barthelay)의 미국 직원이었던 세베린 분더만(1938-2008)은 구찌를 방문하여 시계를 납품하는 일로 상담을 하려고 했다. 매장에 책임자가 부재중이어서 책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서 있던 곳이 매장의 전화기 옆이었다. 전화가 울려도 아무도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자 분더만은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게 된다.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알도 구찌였다. 알도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직원이라고 생각하여 이태리 남부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5개 국어에 능했던 분더만은 자신도 모르게 알도의 사투리를 따라 응답을 하게 되었다. '너 누구야?' 자신의 직원 중 이태리 남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의아해진 알도가 눈치를 채자 분더만은 자신이 찾아온 목적과 전화를 받게 된 사정을 말하게 되었다.


알도는 이 특이한 세일즈맨에게 흥미를 느껴 시간을 정하여 자기가 있을 때 찾아오라며 다시 만날 약속을 하게 된다. 알도를 만나러 구찌의 사무실로 찾아온 분더만은 낡은 옷과 구두를 신은 곤궁한 모습이었다. 알도는 분더만의 사업 제안을 듣고는 즉석 해서 일 년 판매분으로 25만 달러 상당의 시계를 주문하게 된다. 예상 밖으로 엄청난 물량을 계약한 분더만은 베일러에 연락하여 알도와 맺은 계약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소규모 회사였던 베일러는 25만 달러의 물량은 고사하고 1년에 그 10%도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분더만의 사업적 재능이 발휘되는 것이다.


분더만은 알도를 다시 찾아와 회사의 사정을 설명하며 기회를 준다면 자신이 회사를 설립하여 25만 달러의 계약을 이행하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알도는 분더만과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분더만으로부터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당돌한 청년이었던 분더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분더만이 회사를 차릴 자금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알도는 분더만에게 먼저 자신에게서 사업을 하는 방법부터 배울 것을 충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분더만은 알도 밑에서 일을 배우며 알도로부터 사업자금까지 빌려서 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패트리샤 구찌에 따르면 이후 분더만은 알도가 마우리지오와 법적 분쟁을 겪는 과정에도 알도를 찾아와 조언을 할 정도로 평생 동안 알도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2년 향후 25년간 독점적으로 구찌의 시계를 제조하기로 계약하고 스위스에 시계 제조 회사까지 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발매한 구찌 2000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분더만은 단 기간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구찌로서는 분더만의 성공으로 시계가 핵심 사업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분더만이 그 다음에 만든 구찌 시계나 분더만으로부터 시계 공장을 인수한 후 구찌에서 만든 수 많은 시계들 중 구찌 2000의 판매량을 넘어선 시계는 아직 등장하 않았다. 살인 사건까지 일어난 '구찌 가문의 그 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죽기 2년 전인 1993년 계속해서 자금 압박을 받던 마우리지오는 50%의 지분을 추가로 인베스트코에 매각하여 구찌 가문은 창업 후 67년 만에 퇴장하게 된다. 1989년 마우리지오에 의해 부사장이자 선임 디자이너로 영입된 돈 멜로(Dawn Mello)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구찌의 재건 작업을 시작하여 1,000개나 되던 상점을 180개로, 22,000개나 되던 판매상품을 7,000개로 축소하게 된다. 인베스트코에 인수된 1994년에는 1980년대 내내 구찌 가문의 변호사였던 도메니코 드 솔(Domenico De Solle)이 사장으로 취임하고, 톰 포드가 선임 디자이너로 참여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구찌가 다시금 이익을 내게 되자 구찌는 뉴욕 증시에 상장한다. 인베스트코는 1995년에서 1997년까지 주식을 처분하여 19억 달러를 벌게 된다.


구찌가 뉴욕 증시에 상장되자 '카시미어를 입은 늑대'가 지휘하는 LVMH 그룹이 구찌의 주식을 은연중 확보하여 구찌 그룹 인수를 계획하게 된다. 1999년 LVMH에서 모은 주식은 38%에 도달했다. 늑대가 무서웠던 구찌의 사장 도메니코 드 솔과 칩 디자이너 톰 포드는 프랑스 PPR(Pinault Printemps Redoute)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후에 케링(Kerring)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PPR이 슈퍼맨으로 등장해서 대규모로 주식을 구입하고 증자를 통해 LVMH의 지분을 12%로 낮추게 된다. 그 덕분에 늑대의 구찌 인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구찌 그룹은 케링그룹의 핵심 브랜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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