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은 불확실성 때문이 아니라, 확정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불안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이렇게 정의했다.
“불안은 가능성 앞에 선 자유의 현기증이다.”
불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자유가 살아 있는 자리다.
우리는 보통 불안을 이렇게 설명한다.
앞날이 불확실해서,
미래를 알 수 없어서,
그래서 불안하다고.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불안의 방향은
항상 ‘열려 있음’을 향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빨리 확정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 관계는 어디로 가는지,
이 선택이 맞는지 틀린지.
이 질문들에
당장 하나의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불안은 시작된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상태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현실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가능성의 상태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상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열려 있음 앞에서
쉽게 초조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과 자신이
이미 정해진 상태로 존재해야
안전하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할 때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빨리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아.”
“확실한 답이 필요해.”
확정은 불안을 없애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확정은 가능성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한 번 정해진 정체성,
한 번 굳어진 관계,
한 번 내려진 결론은
다른 선택지를 차단한다.
그리고 그 차단이
다시 다른 형태의 불안을 낳는다.
이런 순환 속에서
우리는 불안을
불확실성의 문제로 오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불안을 키우는 것은
불확실함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아직 정의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고,
역할을 정하고,
미래를 미리 규정하려 한다.
물론 정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너무 이른 확정은
관계를 살아 있는 과정이 아니라
고정된 구조로 만들어버린다.
그 순간 관계는 편해질지 몰라도,
숨 쉴 틈은 줄어든다.
양자적 관점에서 보면
불안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아직 형성 중이라는 신호다.
관계가 살아 있고,
선택이 열려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다루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불안을 없애려 하기보다,
확정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
오히려 불안을 누그러뜨린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불안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더 붙잡아야 할까 가 아니라,
무엇을 조금 내려놓아야 할까.
다음 이야기에서는
관계 중심의 세계관이
어떻게 이 지점에서
치유의 언어로 이어지는지를
차분히 살펴보려 한다.
머무는 생각 - 쇠렌 키르케고르
“불안은 가능성 앞에 선 자유의 현기증이다.”
머무는 시 - 이성복
“흔들리지 않으면 /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