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유동적일 때, 삶은 오히려 숨 쉴 틈을 얻는다.
치유는
통제의 강화가 아니라
이해의 확장이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자유란 필연을 이해하는 것이다.”
관계를 이해할수록
삶은 덜 조급해진다.
치유는 확정이 아니라 수용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보통
치유를 이렇게 상상한다.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상태.
하지만 관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치유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라,
정리되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양자역학에서
확정되지 않은 상태는
결함이 아니다.
오히려 가능성이 살아 있는 상태다.
이 관점을 삶에 가져오면,
불완전함은 더 이상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열림의 증거가 된다.
불안이 줄어드는 순간은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때가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있는 그대로 허용할 수 있을 때다.
이때 삶은 갑자기 가벼워진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항상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어긋나고,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불안정하다고 부르지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상태다.
관계가 고정되면 편해지지만,
그만큼 숨이 막히기도 한다.
관계 중심의 세계관이 주는 치유는
통제의 강화가 아니라,
통제의 완화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확정하려는 태도 대신,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조금 더 신뢰하는 태도다.
이때 중요한 변화가 하나 생긴다.
나는 더 이상
‘잘 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과정’이 된다.
치유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이 관점은
삶의 속도를 바꾼다.
결정을 미루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결정하지 않은 상태를
무능이나 회피로 보지 말자는 제안이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실패는 아니다.
관계 속에서 생기는 흔들림은
삶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완전히 고정된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치유 역시 움직임 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치유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불안해도 괜찮고,
확정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상태.
이제 연재는
마지막 방향으로 접어든다.
이 관점은 과학에서 철학으로,
다시 삶으로 이어진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양자역학의 질문이
어떻게 철학을 거쳐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오는지를
차분히 정리해보려 한다.
머무는 생각 - 스피노자
“자유는 관계의 필연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머무는 시 - 도종환
“기다림 자체가 / 우리를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