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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과 제리

오빠는 '나 일 등'

by for healing

내가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엄마는 한 번을 빼고는 늘 우리와 여름휴가를 같이 다녔다.

그 한 번도 오빠가 함께 가자고 정중하게 요청(?)해서 손주 예쁜 마음에 따라 간 거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안 들어도 뻔하지만, 엄마의 까탈스러움과 오빠의 무뚝뚝함, 올케의 깍쟁이 같은 성격이 가히 환상적으로 만나, 서로의 불편함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결국, 환장(?)의 불협화음을 이루었겠지),

"그 집이랑 다시는 안 간다"라고 했다.

심지어 '그 집'이라는 표현을 썼다.ㅎㅎ


오빠는 우리 엄마가 끔찍이도 아끼는 손주와 손녀, 이렇게 두 남매를 두었고 나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성이 차고 넘치는 딸만 둘을 두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손주 때문에 따라간 휴가였지만 아무래도 며느리가 딸만큼 편할 리가 없고, 아들이 무뚝뚝하기가 나무토막 같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겠다 싶었다.


오빠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엄마와 아빠의 온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살았던 우리 오라버니는 아마 누군가가

"어떻게 항상 그렇게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나요?" 하고 물었다면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요" 이따위 대답을 할 인간이다.

그렇다고 공부만 잘하는 공붓벌레였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는 게 나를 열받게 하는 포인트이다.

통기타가 유행하고 대학가요제가 한창일 당시, 가수는 '딴따라'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빠의 눈을 피해 통기타를 메고 친구들과 밴드를 조성해 자작곡으로 '대학가요제'에도 참가하는, 이른바 공부도 잘하고 놀 줄도 아는, 나같이 놀기만 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고 밥맛 없어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하긴 또 오빠 입장에서 본 내 모습(나는 예체능 전공이다)은 한심 했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 '나일등'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그게 만화책이었는지 그냥 동화책이었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책 속의 주인공인 '나일등'이라는 아이가 공부는 안 하고, 장난도 많이 치고, 늘 놀기만 하니까 어른들이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렇게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하냐?"

라고 핀잔을 주지만 시험을 보면 항상 일등을 하는데 알고 보니 낮에는 친구들과 같이 신나게 놀고, 남들이 다 자는 밤에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그렇게 일등을 한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일등'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주인공이 우리 오빠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그런 오빠에게 과외를 받으라고 했을 때에,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땅 위에 잘난 언니, 오빠들로 인해 설움 받는 수많은 동생들의 억장 무너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또르륵...

오빠는 과외할 때 야단치거나 혼내지 않는다.(원래 말이 없음. 그런 사람이 더 무서움) 조용한 한숨과 함께 노트를 연필로 톡톡 치면서

"내가 니 IQ였으면 이렇게 공부 열심히 안 하고 전교 1등 하겠다. 그 좋은 머리 뒀다가 어따 쓸래? 돈 아깝게 과외를 왜 하는지 모르겠네, 나야 뭐, 엄마가 용돈 준다니까 좋긴 한데"

자존심 박살 나는 소리만 해대곤 했다.

'그니까 엄마! 기왕 돈 주고 과외하는 거, 잘 생긴 대학생 선생님으로 구해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오빠하고 공부 마치고 나올 때면 나는 늘 목이 메고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사실 따지고 보면 고마운 일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오빠공부도 바쁜데...

그렇게 나는 고등학생 선생님에게, 심지어 같은 집에 거주하며, 늘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지켜봐 주는(말이 좋아 지켜보는 거지, 그것은 완전한 감시였다.) 조건 좋은 선생님에게 개인과외를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성적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예체능계를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님) 실기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빠에게 도전받아 나의 주특기인 벼락치기로 이틀밤을 새워 (나름 암기머리는 우수했음ㅎㅎ) 다크서클로 줄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죽을힘을 다해 암기과목 위주로 공부를 해서 대망의 반 석차 3등을 이뤄내고야 만 것이다.(참고로 그때 당시, 중학교 한 학년은 10반에서 12반, 한 반의 인원은 65명 정도였고, 그 성적은 전무후무하였다.ㅎㅎ) 기쁜 마음으로 성적표를 흔들며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칭찬을 받고 뻐렁쳐 오르는 가슴을 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엄마에게 당당히 치킨을 주문하여 먹기 시작하는데 문제의 잘난 우리 오빠가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아싸! 표정을 보니 성적이 그저 그런 가보네, (그때, 오빠가 시험을 망쳤을 거라는 나의 헛된 기대를 멈추고 깨달았어야 했다. 원래 이 인간은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표정변화가 없다는 것을, 절대 나처럼 나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좋은 성적이었다는 것을... 반에서 3등이라는 걸 처음 해봐서 그만 너무 흥분해서...)


☆♡여기서 잠깐! 늘 일등만 하던 분들이 들으면 너무 우습겠다. 기껏 3등 해놓고, 누가 들으면 전국 수석했는 줄... 예체능을 준비했지만 그래도 성적이 그렇게까지 형편없지는 않았다. 중상위권을 유지했지만 홀수등수는 처음이었던 게지, 너무 구체적이었나 ㅎㅎ 구차하다...


아무튼 닭다리를 뜯으며 눈알만 굴리는데 엄마가

"성적 잘 나왔어?" 하니까

" 그렇지 뭐" 이런다, 오빠가... 뭔가 불길하다...

엄마가 오빠 가방에서 성적표를 꺼내보더니 활짝 웃으며

"오빠 또 전교 1등 했네"

......... 재수 없어.......

'또'라는 말이 더 재수 없다. 나는 반에서 3등(1등도 아니고, 2등도 아니고)... 그것도 죽을 둥 살 둥 해서 겨우 한 건데...


오빠와 나는 꼭 만화 속 '톰과 제리'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맛이 있는 것과 맛이 없는 것 중, 항상 맛이 없는 것을 먼저 먹는다. 그건 습관이다. 내 딴에는 맛이 있는 것을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먹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오빠는 자기 것을 다 먹고 나서

"아이고~우리 ○○, 이거 싫어하는구나, 왜 안 먹어? 먹기 싫어?" 하면서

내가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걸 홀랑 집어 먹곤 했다. 눈물 찔끔~~

오빠에게 당할 줄 알면서도 난 습관적으로 매번 맛이 없는 걸 먼저 먹었고 멍청하게도 그걸 먹는 동안

이미 내 배는 다 차곤 했다.


어쩐 일인지 친절하게도 친구와 영화 보러 가라고 극장표를 주길래 좋아라 하면서 친구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잡으려고 보면 이미 날짜가 지난 표를 선심 쓰듯 주었다거나...


그런가 하면,

고3 때 미술학원에서 늦게 끝나 집으로 오는 길에 어떤 남자가 따라와서 너무 무서웠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하고 난 다음 날,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또 누군가가 뒤따라 오는 것 같아 무서워서 잔뜩 겁에 질려 뛰는데 뒤에서

"야!! 천천히 가"

오빠의 목소리에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워

"오빠야? 웬일이야?" 했더니

"담배 사러..."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며 옆으로 지나간다. 동생 데리러 나왔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한다.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부는 잘하지만 재수는 좀 없는, 기타 잘 치고 놀 줄도 알지만 싸가지는 없는, 그런데 쪼끔은 인간미 있는...


톰이야기가 길어졌다. 기억의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서러움과 사연이 많다 보니 ㅎㅎ

그래도 나이 든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듬직한 오라버니이다.

아빠의 불륜과 내 외모로 인해 방황하던 사춘기시절, 눈물마를 날 없던 때, 말없이 곁을 지켜 주던 '나무 같은 존재'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서 즈이들끼리 그런 말 하는 걸 들었다.

"근데 우리 엄마는 우리 성적 가지고 막 야단치고 그러지는 않았어, 그치? 다른 집 엄마들은 마치 자기들은 학교 다닐 때 다 1등 했던 것처럼 애들 쥐 잡듯이 잡고 그랬거든... 내 친구들은 시험 망치면 울고불고 집에 못 들어가고, 아빠, 엄마한테 맞고 그랬어.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시간 보내다가 가고 그랬잖아, 우리는 성적 때문에 안 혼난다고 했더니 부럽다 그러고... 근데 엄마는 솔직하게 엄마도 학교 다닐 때 공부 그렇게 썩 잘하지 못했었다고... 그니까 니들한테도 큰 기대 안 한다고 그랬잖아, 그냥 열심히만 하라고, 그래서 참 좋았어. 자식들 앞에서 엄마도 공부 못했었다고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치? 근데 어떻게 보면 우리도 엄마, 아빠가 그렇게 쥐 잡듯이 잡았으면 공부를 좀 더 잘했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치?킥킥"


쉽지 않기는... 그게 속인다고 속여지니? 니들이 커서 엄마, 아빠랑 대화해 보면 견적이 다 나올 텐데 뭘~~~

내 친구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는 영어도 몰라?○○엄마는 영어 디따 잘하는데"라고 아이한테 몇 번 타박받더니 서러워서 울다가 일주일 동안 가출한 적도 있었다.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친구가 하는 말이 어린 자식한테

"엄마는 너무 무식해, 어떻게 아는 게 없어?"

이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고 너무 무안해서 어디로 도망가 숨고 싶었단다.


그나저나 솔직하게 엄마 성적 다 공개하고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게 인간적으로 대해줬더니 뭐? 쥐 잡듯 잡아줬으면 공부를 더 잘했겠다고???

어이가 없다. 이래서 사람이 너무 잘해주면 고마운 줄을 모른다니까...

애니웨이~~ 얘들아~한때 영화 제목처럼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란다♡

너희에게는 괴롭히는 '톰'이 없잖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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