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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말을 몇 번 해!!!...

뒷모습으로 배운다

by for healing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

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입과 지갑을 같이 열고 다니셨다. 물론 밖에서는 당연히 지갑만 여시고 자식들, 특히 나에게만 입을 여셨지만ㅎㅎ


엄마는 우리 가족을 '거북이 가족'이라고 불렀다.

엄마가 보기에는 우리 네 식구가 거북이처럼 느리기 짝이 없단다. 어디 외식을 하러 나갈라치면 "엄마, 10분 후에 아파트 정문 앞에 나와 있어" 하고 나가보면 언제나 약속한 시간 전에 나와 서 계신다. 그리고는 차에 타시면서

" 아이고! 거북이들, 내가 니들하고 어디를 가질 말아야지, 쯧쯧"

아니~우린 제시간에 왔는데 엄마가 빨리 와 놓고는 뭐래!!!


휴가도 한번 빼고(오빠네 따라갔다가 다시는 '그 집'이랑 안 간다고 했던 사건 ㅎㅎ) 우리와 항상 함께 다녔는데 엄마는 우리 네 식구의 가족 휴가에 본인이 끼어(?) 간다는 게 늘 미안했던 것 같았다. 매번 이번엔 너희끼리 가라며 사양하셨다.

그 이유가 사위인 우리 남편에게 미안해서였는데

"박서방도 애들 데리고 자기 식구들끼리 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니? 니가 너무 '우리 엄마, 우리 엄마' 하니까 말을 못 해서 그러는 거지..."


눈치 없이, 아니 사실은 '이게 당신의 솔직한 속마음이야?'를 떠보기 위해 내가 남편에게 엄마의 말을 전하자마자

남편이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무슨 소리야? 나야 어머님이 같이 가시면 좋지, 애들도 할머니가 있어야 좋고. 한 번도 우리끼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Ok.. 거기까지...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됐다. 무한이기주의... ㅎㅎ


문득 남편한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남편과 우리 엄마는 '장모와 사위'라고 하기에 사이가 참 좋다. 둘이 밖에 나가면 엄마하고 아들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외모가 닮기도 했고... (여담이지만 나와 남편도 많이 닮아서 신혼 때 슈퍼에 갔더니 '아까 오빠 왔다 갔는데' 그랬던 적도 있었다.) 남편이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장모님한테 살갑게 잘하는 데다가 엄마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옆동에 살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달려와주고 아들보다 더 자주 보는 사위가 때로는 아들보다 더 의지가 된다고 내게만 살짝 말해주기도 했었다.


입바른 소리도 많이 하는 엄마지만 휴가 떠나는 차 안에서 조용히 봉투를 건네주며

"이번에 맛있는 거 많이 사 먹고, 할미랑 재밌게 놀자, 우리 예쁜○○, ○○~~ 그리고, 이거 휴가비에 보태라" 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휴가비보다 훨씬 넘치게 금일봉을 주셨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엄마를 보며 깨달았다.

안 모으고 싶어서 돈을 못 모으는 건 아니겠지만 모을 수 있을 때 잘 모으고, 쓸 수 있을 때 쓸 만한 곳에 잘 쓰는 것도 지혜이다.


엄마는 아빠의 불륜으로 힘들었을 때에도 다행히 신앙으로 이겨내며 좋은 일을(교회기부포함 이웃 봉사) 많이 하셨다. 감사하게도 그 좋은 일에 잊지 않고 나를 항상 동참시키셨다. 강제성은 없었지만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후원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길을 가다가도 그때에는 '거지'라고 불렀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90도로 인사까지 하며(엄마가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니 엄마한테 그렇게 인사를 깍듯이 잘해봐라" 하며 웃곤 하셨다.) 동전을 넣어주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부나 후원하는 일들이 참 좋았다. 멋도 모르고 엄마 따라 시작했던 그 일이, 큰 액수는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 딸들도 조금씩 할머니와 엄마의 일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 시작은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베니아 합판으로 벽을 막아 사택으로 쓰던 어려운 목사님 가정의 아들 형제에게 매달, 그 당시 모든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던 월간잡지와 과자를 포장해서 들키지 않게 몰래 집 앞으로 배달해 주는 일이었다. 그다음은 산꼭대기 맹인 교회에 연탄 나눔, 나병 환자들 후원, 유기견 후원, 가정 형편이 어려운 신학생후원...

엄마가 후원하는 곳에 나도 조금씩 힘을 모았다. 받는 분들의 기뻐하던 모습이나 혹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보내온 감사의 손 편지는 잊을 수 없다.

그 일은 힘든 시기에 있던 엄마와 나에게는 베풀면서 동시에 받는 작은 선물 같은 귀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그들이었지만 그것과 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귀한 것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지 않은 것이, 평상시에 어려운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렸던 걸 하나님이 기쁘게 보셔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착하게 살아라, 약속 잘 지켜라. 돈을 유용하게 지혜롭게 써라. 누군가를 도와주기로 했으면 바로 실천해라, 도움을 주면서 잘난 척하거나 우월감을 갖지 마라. 혼자 있을 때에도 항상 누가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해라.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비상금을 가지고 다녀라. 남편 모르는 비자금을 만들어 두어라(엄마의 도둑사업 참고ㅎㅎ)...

그때에는 엄마의 그 말들이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 엄마! 내가 애야? 내가 알아서 할게. 잔소리 좀 그만해. 똑같은 말을 몇 번 해!!!"라고 했었다.


모든 자식들이 다 그렇듯 엄마의 얘기는 들어보기도 전에 무조건 잔소리로 넘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더 재미있는 건 이미 집에서 귀가 닳도록 수백 번, 수천번을 들은 이야기임에도 어느 세미나에서 듣거나,

유명 강사의 입을 통해 들으면 세상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감동받고 심지어 노트필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해주는 자신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경험담이나 생활의 지혜 같은 이야기는 들을 때에는 잔소리 같지만 거짓말처럼,

'맞아, 그때 엄마가 그랬었어. 엄마 말이 다 맞았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깨달아지고 그 듣기 싫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나는 엄마에게 들었던 그 말들을 지금 내 두 딸에게 똑같이 해주고 있고 내가 엄마에게 했던 똑같은 대답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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