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or healing Aug 29. 2024
엄마는 기도와 성경 읽기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우아하게 모닝커피를 마시며, 장장 두꺼운 노트 8권에 성경필사를 하셨다.(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신, 구약 성경을 노트에 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퍼즐 맞추기'를 취미로 하셨는데 디즈니만화 캐릭터나, 예쁜 동물사진이 있는 것으로 주로 300에서 500조각 퍼즐을 즐겨하셨다.
집에는 퍼즐 상자 수십 개가 쌓여 있었는데 조각을 다 맞추었다가 부수기를 하면서 그 수십 개의 퍼즐을 먼저 색깔별로, 모양별로, 가장자리, 가운데 조각들로 분류해 놓고 돌아가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집중해서 맞추신다. 치매 예방에도 좋을 듯하여 외국에 나가서도 엄마가 좋아할 만한 퍼즐이 보이면 많이 사다 드리곤 했다. 일반 할머니들과는 다른, 특별하고 고상한(ㅎㅎ) 취미생활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또 하나, 엄마가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해오던 가장 귀한 취미생활이랄까, 정말 양갈래머리 학창 시절부터 키워왔던 소중한 꿈은 바로 글쓰기였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일을 일기 형식으로 원고지에 쓰곤 하셨는데, (그때에는 컴퓨터나 노트북이 없었으므로) 내가 그동안 사다 드린 원고지를 대강 어림잡아 헤아려보면 엄청난 양의 글을 쓰셨을 터이다.
돋보기를 쓰고 글을 쓰는 엄마를 보며 나도 옆에서 끄적끄적 뭔가를 썼었고, 그게 일기가 되었든, 시가 되었든, 연필이 사각사각 종이 위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좋았고 연필심에서 나는 흑연 냄새가 좋았다. 한 장 한 장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때마다 마치 큰 작품을 완성이라도 한 양, 대단한 글을 집필하는 작가가 된 양, '다음엔 무슨 주제로 글을 쓸까?' 골똘히 생각해보기도 했고 그 덕분에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엄마가 자신을 일컬어 표현하는 대로 '아무에게도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배운 바 없는 무식한 할머니'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가감 없이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이 책장 한편에 차고 넘치게 되었을 때, 엄마에게
"엄마, 그동안 진짜 많이 썼네, 양이 장난 아닌데?"
했더니
"저거 나 죽은 뒤에 없애는 것도 일이겠다. 쓸 때는 좋아서 썼는데 모아놓고 보니까 걱정이다, 얘~"
하신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남편이 대뜸
"우리, 어머니 회갑 선물로 책 내드리자" 한다.
"책? 어떻게? 책으로 낼 수 있어?" 했더니
"낼 수야 있지, 몇 부 이상이라는 전제가 있지만 내가 알아볼게~" 한다.
내가 누구인가? 엄마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얘기했더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펄쩍 뛰면서 싫단다. 이유인즉, 창피하다는 거다.
들어보니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함경도 청진이야기. 6.25 때, 외할머니는 아들 셋만 데리고 먼저 피난 내려왔고, 나머지 딸 다섯은 맏이인 열일곱 살 우리 엄마에게 데리고 내려오라고 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피난 내려왔다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독수리 다섯 자매의 한 맺힌 이야기, 중매이야기, 결혼해서 우리 남매 낳은 이야기, 문제의 아빠의 불륜이야기, 그 중간중간 가미되는 남편을 향한 입에 담지 못할(육두문자 ㅎㅎ) 독설, 딸의 얼굴로 인해 가슴 아팠던 이야기, 신앙이야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네 명의 손주이야기...]
모두가 개인적인 일기형식이라 공개하기가 꺼려진다는 것이다.
내가 또 누구인가? 이럴 때 찬물로 엄마의 정신을 차리게 해 드리는 게 딸로서의 도리 아닌가?
"엄마, 정식으로 책을 내는 게 아니라 그냥, 그동안 엄마가 써둔 거 아까우니까 약식으로 만들어서 가까운 사람들한테 선물로 드리자는 거야, 엄마는 엄마 글을 책으로 갖고 있게 되는 거고... 원고지로 쌓아놓는 것보다 책으로 보관하면 나중에 애들이 읽기도 좋고..."
"돈 많이 들잖아"
그렇지! 왜 그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자식들이 돈 쓸까 봐 미안해서...
"엄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나하고 박서방이 다 알아서 할게, 소규모로 우리끼리만 갖고 있자"
그 후, 엄마와 이런저런 상의 끝에 남편이 아는 분께 인쇄를 부탁하고, 책 표지디자인에서부터 제목까지, 미술전공인 이 몸(ㅎㅎ)께서 담당하여 100부를 만들어 가족, 친척분들, 교회분들, 엄마 친구분들께만 드리기로 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어 준 남편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딸인 나도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었는데...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은 힘들었다.
그 많은 내용을 다 읽어가며 추려내고, 심한 욕설, 19금 ㅎㅎ은 순화시켜가며(자존심을 그렇게 지키던 엄마도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 중, 남편의 불륜에 관해서는 '될 대로 되라지, 내가 뭐 없는 말 했니? 니 아빠 바람피운 거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텐데, 뭐. 죽은 다음에 지가 어쩔 거야? 뭘 잘했다고!!' 이런 식이 되었다 ㅎㅎ), 여러 번의 검토와 수정작업을 반복한 후에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탄생시켰다.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몇십 년 동안 본인이 틈틈이 써왔고, 회갑기념으로 딸과 사위가 책으로 내드렸다고 하니까 받아 본 분들이 모두 부러워하며, 엄마의 글솜씨와 딸내외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 많이들 칭찬해 주셨다.
비록 고급스럽고 번듯하게 정식 발행된 책자가 아닌, 간소화된 기념책자라고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며 기뻐하시던 엄마 모습에 모처럼 자식 된 도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엄마가 간직하고 싶었던 혼자만의 삶, 생각들...
즐거웠던 시간, 힘들었던 시간, 결혼과 배신...
우리 남매가 엄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선물과 같은 네 명의 손주들...
눈물의 시간 뒤에 찾은 소소한 행복...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결국 모든 엄마의 삶을 돌아보니 감사하다는...
놀라운 신앙의 힘...
스스로에게 날마다 각인시켰을 새삼스러운 이야기들...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하고 너무 일상적이어서 '저런 건 나도 쓰겠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엄마를 포함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알기에, 그런 이야기를 글로 쏟아낸 엄마에게, 나는 존경의 의미를 가득 담아 박수를 쳐 드렸다.
지금도 그 책은 우리 집 피아노위에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엄마가 떠난 지금도,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볼 수 있는, 할머니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우리 딸들이 그 어떤 위대한 위인들의 전기보다 더 많이 읽어 손때 묻은 엄마의 책...
돌아가신 분의 사진이나, 생전에 즐겨 쓰시던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 유품도 고인을 추억하는 좋은 기억법이 될 수 있지만,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오래전 이야기를 추억으로 소환해서 다시금 생각에 잠겨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엄마의 책...
그것은 남아있는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소중한 유산이 되어버렸다.
나의 엄마,
이제는 훌쩍 커버려 대학생이 된 나의 딸들의 할머니,
살아계실 때, 그리도 싫어하던 이름,
'장○자'씨의 흔적으로... 소중한 당신의 자투리 시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