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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이별

이별의 좋은 예

by for healing

엄마는 평상시에 기도하던 바대로 아주 깔끔하고 쿨하게 떠나셨다.

"엄마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너희 고생하지 않게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 화장실 나 혼자 다닐 수 있고, 치매 안 걸리고, 너희 얼굴 다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다가, 잠자듯이 가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한다. 그러니까, ○○야(내 이름) 너도 엄마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줘"


'갑상선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내심 안심했던 건, 그나마 '착한 암'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상선암에도 네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미분화암'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그 암은 발병하면 길어야 1년, 보통은 3개월, 6개월, 생존율이 0%라는 거짓말 같은 통계도 처음 들었다.

나를 낳았을 때부터 갑상선에 문제가 있었지만 검사할 때마다 이상이 없었고 그렇게 50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가 암이 되어 나타나서 우리의 뒤통수를 쳤다.


교회 온 식구들이 저녁마다 시간을 정해서 기도해 주었고, 나는 엄마와 병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가지며 더 많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드라마로 볼 때에는

'에이~그래도 빨리 본인한테 얘기를 해줘야지~그래야 마음의 준비도 하고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참 쉽게 말하곤 했는데...


3개월이었다.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꼭 3개월 만에, 엄마가 기도한 대로,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10월의 화창한 날에... 그나마 다행인 건 마지막까지 의사소통도 되고 큰 통증 없이, 우리 모두 '오진이 아닐까?'생각할 만큼 잘 지내다가 오빠와 나, 사위, 며느리,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손주 네 명의 눈물의 인사를 뒤로 채, 하룻밤 고열로 뒤척이다 거짓말처럼 그렇게 엄마는 떠났다.


돌아가시기 직전, 조용히 엄마에게

"엄마, 이제 곧 있으면 아빠 만나겠네. 아빠도 마지막에 결국 천국 갔잖아~"

했더니 기운이 없어 눈을 못 뜨면서도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왜? 아빠 보기 싫어? 그래두...엄마, 이제는 용서하자,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아빠 만나~"

또 한 번의 도리질...

마음이 아팠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그 믿음 좋은 우리 엄마, 장권사님이 용서할 수 없다는 남편, 나의 아빠... 정작 나 자신도 아직 아빠를 용서 못했으면서...


"그런데, 그렇게 가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거야. 근데 엄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아빠 덕분에 우리가 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았잖아. 생활비도 안 주고 바람피우는 나쁜 놈들도 많대. 그런 거 보면 아빠는 그렇게까지 인간 말종은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엄마~그냥 우리가 용서하자, 믿음이 있는 우리가 한번 더 봐주고 용서하자. 그리고 천국 가서 아빠 잘 만나고 풀어, 그러자, 응? 그래야 엄마 마음도 편하지, 응?"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착한 우리 엄마...


그리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힘겹게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귀를 바짝 대고 들으니

"우리 ○○이..."

나의 작은 딸 이름이다.


잘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작은 딸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체중 미달로 태어나 밤에도 깊은 잠을 못 자고 30분마다 깨고, 분유를 한 번에 많이 먹어야 50cc... 그나마도 설사에, 고열에...

병원 응급실로 뛴 것만도 여러 번...

의사의 지시대로 열 때문에 경기를 하는 아이를 다 벗겨놓고 알코올로 닦아내는 나를 보며, 응급실에 있던 다른 환자 보호자였던 시골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이며 하던 말...

"새댁, 마음 단단히 먹어, 아이구~딱해서 어째..."

온갖 검사로, 채혈로 거의 실신한 아이 곁을 분주히 오가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움직임과 발소리...

알아들을 수 없던 그들만의 다급한 외침...

큰 아이가 어려서 엄마는 집에서 큰 아이를 봐주면서 눈물로 기도하고, 나와 남편은 응급실 한편에서 거의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는 생각...

'하나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이렇게 아픈가요?'

수없이 울며 불러보던 하나님...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바닥에 주저앉던 우리 부부...

그 정도로 몸이 약했던 아이였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너무 작고 잘 먹지를 않아 발육이 느려서 찾아간 어느 대학병원에서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지금은 뭐라고 이 병명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 병원의 담당 의사 선생님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 아이가 '정신박약아'(?) 살 가능성이 90% 이상이며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할 것이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와 몇 날을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제 이 아이는 '하나님께 맡기자'며 온 가족과 교회 성도들이 기도로 키워, 지금은 언제 그렇게 아팠었나 싶을 정도로 건강하게, 누구보다도 똑소리 나는 아이로 자랐다. 언젠가 그 선생님께 찾아가

"선생님이 말하셨던 그 아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성장했습니다"라고 꼭 보여주고 싶었다.

경솔한 선생님...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내가 낳은 또 하나의 아픈 손가락...

"엄마, ○○이는 괜찮아.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긴 병에 효자 없다.'

3개월을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치기 시작할 즈음에,

엄마는 엄마 딸을 너무 잘 알았다.

'저게 허리가 부실해서 많이 아플 텐데, 많이 힘들 텐데, 지 일도 못하고 매일 병원 오느라 집안도 엉망일 텐데...'


그리고, 그렇게 떠났다.

우리 모두의 슬픔 속에 단 3개월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만을 주고...

평상시 성격대로 자식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 아주 아주 쿨하게 떠났다.


후회는 없다. 엄마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드렸고, 사랑했고, 시집가면 친정에 자주 못 들르는 다른 딸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엄마와 가까이 살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얼굴 보며 살았다.

외롭지 않게 늘 아이들과 가정방문해서 재롱부렸고, 엄마가 필요로 할 때에는 늘 '뿅'하고 곁에 있어드렸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 엄마한테 그렇게 나쁜 딸은 아니었지? 우리 진짜 친구처럼 사이좋은 모녀였어. 베프, 그치? 엄마가 내 엄마여서 나도 행복했어~우리 또 볼 거잖아?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거짓말~~ 후회 없이 잘해드렸다고 말해놓고 왜 말과 달리 눈물은 그치질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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