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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길을 조금씩만 보여주신다.

버거씨병

by for healing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알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10분 후의 일도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아마 '너무 자만하지 말고 살라'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겠지...

원래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조금만 서있거나 걸으면 다리가 붓고 피부가 얼룩덜룩해지곤 했었다.

추운 게 아닌데도 피부색이 얼룩덜룩해지니까 주위 사람들이 춥냐고 물어보기 일쑤였고, 여름에도 반바지 입기가 불편했다.

가는 병원마다 그저

"혈액순환이 안 돼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통증이 없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큰 병은 아닙니다"라는 이야기뿐이었다.

한마디로 美를 추구할 나이도 아니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 그냥저냥 살라는 말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러운 것이, 이제는 어디가 불편해서 병원을 찾으면 의사 선생님들이 대놓고 하는 말이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까..."

뭐, 어쩌라는 거지? 그러니까 죽더라도 왜 죽었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내가 나이가 많아 늙어 죽나 보다, 꼴까닥...' 하라는 이야기인가? 싶어 서글퍼진다.


얼마 전에는 남편과 차를 타고 가는데 좌측에서 끼어들던 차가 우리 차와 살짝 부딪힌 일이 있었다.

상대방 운전자가 급히 내려서 남편을 보더니 하는 말이

"아이고, 어르신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어머니 모시고 병원 가는 길인데 급하게 차선 바꾸다가...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어르신?"

예의 바르고 싹싹한 젊은 친구였다.

사실 그때, 차가 부딪히면서 놀란 것도 컸지만 내가 더 충격을 받았던 포인트는 어이없게도

'어르신'이라는 호칭이었다.

막연하게 '어르신'이라고 하면 시골에 계신 얼굴에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 할머니들께나 해당되는 호칭이라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우리 부부가 젊은이들 눈에는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나이가 되었나 보다.

다친데 없으니 됐다고, 어머니 모시고 가는데 운전 조심하라고 하고는 가던 길을 가면서 내가 '어르신'에 충격이 더 크다고 했더니 남편이

"우리 ○○이(작은 딸) 보다도 어린 친구던데.. 걔네 눈에는 우린 완전 할아버지, 할머니지,. 하긴 당신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데 내 옆에 있어서 덤으로 넘어갔다" 라며 웃는다.

'아~이렇게 나이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말이 없어졌다.


아무튼 나이 들면서 혈액순환이 더 안 되는지 발이 저리고 너무 아파서 다니던 동네 한의원에 갔더니 '사혈'이라는 걸 해보자 해서 난생처음 '사혈'이라는 걸 하고 왔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는데, 내 피부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혈 한 부위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니면서 항생제 주사를 맞기도 하고 약을 먹기도 하고 연고를 발라봐도 염증이 점점 심해지더니 걸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하루에 진통제를 8~10알을 먹으며 버텼다. 그 와중에도 그 한의원에 가서 따져보지는 않았다. 다니던 병원인 데다가 워낙 친절한 선생님이 나를 치료해주려고 하다가 내가 이상체질인 걸 모르고 그런 건데...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어디 가서 따지고 문제가 커지는 걸 잘 못하긴 한다. 후에 주위사람들이 나보고 "바보 아냐? 그래도 일단 가서 말은 했어야지!!"

그때 알았다. 나는 참 바보구나, 할 말도 못 하는...


어찌 됐든 상처와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이러저러하다 큰 대학병원까지 가게 되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생뚱맞게 담배 피우냐고 묻더니 이 검사, 저 검사해 보고 나온 결론이 '버거씨병'이라며 발가락이 궤사 되었으니 절단해야 한단다.

응? 이건 또 무슨 일이래?


큰아이는 버거씨환자모임에 가입해서 정보를 얻고 작은 아이는 인터넷을 검색하고...

집안이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혈액순환 치료받으러 한의원을 찾았다가 발가락을 잘라야 하는 지경까지 이른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기가 막혔으니까. 게다가 '버거씨'라는 병은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 절단부위가 또 궤사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고 그러면 또다시 궤사 된 부분을 절단해야 하고~

이 병에 대해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나는 중학교 때, 친구오빠가 이 병을 앓다가 결국 발가락에서 시작하여 무릎아래까지 절단한 걸 알고 있어서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살다가 나한테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온 식구들이 나 때문에 너무 걱정하고 속상해하는 게 미안했다. 그래서 담담하게

"괜찮아,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뭐~괜찮을 거야"

오히려 내가 식구들을 안심시켰다.


큰아이는 다른 환자들과 계속 정보를 공유하고, 작은아이는 성격대로 여전히 쿨한 위로를 해주었다.

"엄홍길아저씨는 동상으로 발가락이 몇 개가 없는데도 아직도 산을 타고 잘 걷고 잘살아. 발가락 10개? 쓸데없이 너무 많아, 한두 개 없어도 괜찮을 거야"

위로인지, 뭔지ㅋㅋ

"맞아, 한 두 개 없어도 괜찮아, 몸무게나 줄었으면 좋겠다. 그치?" 하며 나도 웃었다.


반면에 남편은 그야말로 걱정이 태산이다. 수술부위가 안 아물어서 더 안 좋은 결과가 생길까 봐...

그리고는 민망하게도(아~나 그런 거 진짜 싫어하는데) 아는 분들께 기도를 부탁했다.

그렇게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기다리는데 우리 작은 아이가

"엄마, 거머리치료 한번 해보자. 내가 검색해 봤는데 궤사 된 상처에는 그게 효과가 좋대"

발가락 10개가 너무 많아서 한두 개 없어도 된다더니... 그게 딸 방식대로의 걱정의 표현이었다.

그나저나, 거머리라고? 징그러워~

그런데 식구들이 솔깃해하며 자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이것저것 다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난 벌레 같은 거 싫어하는데...

"엄마, 어리광 부리지 말고, 징징대지 말고 거머리치료받자"

엄마와 딸들이 바뀐 느낌ㅎㅎ

이렇게 나는 거머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ㅎㅎ


그날 저녁, 내가 기도한 만큼만 내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떼쓰듯이 기도했다. 아니 물어보았다.

"하나님! 저 정말 발가락 자르게 내버려 두시진 않을 거죠? 갈 때 가더라도 온전한 몸으로 가고 싶다고요~"

직접적인 대답은 안 하셨지만 내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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